제 17 장 (Chapter Seventeen)

성령의 은사(The Gifts of the Spirit)

성경에는 남자와 여자가 성령님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신약 성경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은 “성령의 은사”라고 불린다. 이런 은사들은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뢰성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초자연적으로 사용하실 가능성이 더 크므로 온전히 성별 되고 성령님께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은 어느 한 번 당나귀를 예언자로 사용하셨는데 그분은 원하시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가 완벽하게 되어야만 사용하실 수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사용하실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열되어 있는데 모두 9가지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각각의 은사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는 것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 그리고 초대 신약 교회의 목회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분류하거나 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모두 성령의 은사대로 쓰임 받았다. 그럼에도, 신약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를 분류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썼다.

9가지 은사에 대한 분류(The Nine Gifts Categorized)

성령의 9가지 은사는 현대에 와서 사람들에 의해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1) 말하는 은사, 즉 각종 방언을 말함, 방언의 통역, 예언; (2) 계시의 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그리고 (3) 능력의 은사: 기적을 행함, 특별한 믿음, 치유의 은사이다. 그 중 세 가지 은사는 뭔가를 말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계시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행하는 것이다. 이 은사 중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와 통역하는 은사를 제외한 모든 은사는 구약에서 볼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신약에만 있는 독특한 은사이다.

신약 성경에는 “능력의 은사”를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계시의 은사”를 어떻게 적절할지에 대한 가르침도 아주 적다. 그러나 “말함의 은사”의 적절한 사용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양의 가르침이 바울을 통하여 주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교회 모임에서 “말함의 은사”가 가장 많이 나타나고, “계시의 은사”는 적게 나타나며, “능력의 은사”는 가장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모임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제일 많이 필요로 할 것이다.

둘째로, “말함의 은사”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가장 높아 보이기 때문에 잘못 다뤄지기 가장 쉽다. 치유의 은사를 파괴하기보다는 예언을 파괴하기가 훨씬 쉽다.

성령님의 뜻을 따라 (As the Spirit Wills)

성령의 은사가 사람이 아닌 성령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강조 추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4 강조 추가).

사람이 특정 은사로 자주 쓰임 받을 수는 있으나 어떤 은사도 소유할 수는 없다. 당신이 어느 한 번 기적을 행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여 당신이 원할 때마다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당신이 앞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은사에 대한 성경의 몇 가지 예를 간단히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방법으로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은사가 매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이 9가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정의 내린 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것들의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성경의 예를 살펴보고 각각의 은사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결정함으로써 표면적인 차이에 의해 그것들을 정의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초자연적인 은사를 통하여 그분 자신을 나태내는데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기에 우리가 내린 정의에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은사들은 실제로 몇 가지 은사들의 조합과 같을 수도 있다.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강조 추가).

능력의 은사(The Power Gifts)

1) 치유의 은사: 치유의 은사는 분명히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들은 종종 갑작스럽게 육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으며, 나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 가의 앉은뱅이를 치유할 때 그분을 통해 치유의 은사가 나타난 예를 살펴본 적이 있다(요 5:2-17을 보라).

하나님은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우상 숭배자인 나병 환자 나아만을 치유하셨다(왕하 5:1-14을 보라). 우리가 누가복음 4장 27절에서 나아만이 치유받은 것에 관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엘리사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떤 나병환자든지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갑자기 초자연적인 영감을 받아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며 나아만은 결과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해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졌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하셨다(행 3:1-10). 이 초자연적인 기적은 앉은뱅이를 치유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듣도록 인도하였으며, 그날 약 오천 명의 사람이나 교회에 추가되었다. 치유의 은사는 종종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된다.

베드로는 그날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 앉은뱅이를 치유하신 이유가 그의 개인적인 권능이나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 기적을 행하기 두 달 전만 하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었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원하시면 우리도 사용하실 것이라는 신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베드로가 그 사람이 치유받은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그것을 “치유의 은사”로 분류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베드로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와 요한이 앉은뱅이 곁을 걸어 지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자신한테 그 사람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곧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베드로는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그가 걷기를 기대하는 것에는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런 특별한 치유의 은사와 함께 믿음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치유의 은사가 복수인 것은(치유의 “은사들”을 가리킴) 다른 병을 치유하는 은사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치유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은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사역 속에서 특정한 병을 다른 병보다 더 자주 치유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도자 빌립은 특별히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행 8:7)을 치유하는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 몇 세기 동안, 어떤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실명과 난청, 그리고 심장 질환과 같은 병을 고치는 데에 가장 자주 나타났다.

2) 믿음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 믿음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매우 유사해 보일 것이다. 이 두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갑자기 불가능한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 두 은사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적을 베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믿음의 은사를 때로는 “특별한 믿음”이라고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믿음을 뛰어넘은 갑작스럽게 받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음에서 생기지만, 특별한 믿음은 성령님에 의한 갑작스러운 전이에서 생긴다. 특별한 믿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일들이 갑자기 가능해 보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그들은 의심 자체를 할 수가 없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기적을 행하는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는 “특별한 믿음”이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이 왕의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불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때, 그들은 모두 특별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풀무불에 던져져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을 초월한 것이다! 이 세 젊은이가 왕 앞에서 보여준 믿음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강조 추가).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지기 전에 믿음의 은사를 받았음을 주목하라.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내실 것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의 통치 시절 3년 반 동안의 기근 속에서 날마다 까마귀들이 날라온 음식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17:1-6). 하나님께서 새를 사용하셔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날라오게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을 초월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까마귀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날라다 줄 것이라고 말씀으로 약속하신 적은 없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마 6:25-34을 보라).

기적을 행하는 믿음은 모세의 사역 속에 꽤 자주 나타났다. 모세는 애굽 홍해를 가를 때(출 14:13-31을 보라)와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릴 때 이 은사를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물고기 몇 마리와 떡 몇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사용하셨다(마 14:15-21을 보라).

바울이 실루기아 섬에서 사역을 방해하는 엘루마라 하는 마술사를 얼마 동안 맹인이 되게 한 것도 기적을 행하는 믿음의 예이다(행 13:4-12을 보라)

계시의 은사(The Revelation Gifts)

1).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종종 과거 또는 현재의 특정 정보에 대한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전이로 정의된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신 하나님은 어떤 때에 사람에게 지식의 작은 부분을 나누어 주시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부를 것이다. 한 단어가 문장의 단편적인 부분인 것 처럼, 지식의 말씀도 하나님의 지식의 단편적인 부분일 것이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과 매우 비슷하지만, 그것은 종종 미래의 사건에 대한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전이로 정의된다. 지혜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관한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다소 추측 적이다.

지식의 말씀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를 살펴보자. 엘리사가 시리아인 나병환자 나아만을 치유한 후, 나아만은 그를 치유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엘리사에게 큰 금액의 돈을 주었다. 엘리사는 그 예물을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샀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개인적인 재물을 얻을 기회를 엿보았고 비밀리에 나아만의 의도된 돈을 받았다. 게하시가 자신의 거짓 획득은 숨겨둔 후, 엘리사 앞에 나타나며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게 된다.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왕하 5:25하-26상).

게하시의 추한 행위를 다 아시는 하나님은 그 사실을 엘리사에게 초자연적으로 드러내셨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엘리사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그가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경우였다면, 게하시가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에게 그런 일들을 계시하실 때에만 알 수 있었다. 그 은사는 성령님의 의지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에게 그녀가 다섯 남편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17-18을 보라).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판 돈 전부를 교회에 바쳤다고 회중들에게 거짓말한 것을 알았던 것도 이 은사로 쓰임 받은 것이다(행 5:1-11을 보라).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관해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이 은사가 자주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할 때마다 지혜의 말씀으로 한 것이다. 예수님도 꽤 자주 이 은사를 받으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 땅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셨다(눅 17:22-36, 21:6-28을 보라).

사도 요한은 환난의 심판을 계시받을 때 이 은사로 쓰임받았다. 그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종종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거나 분별하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정의된다.

신자가 눈과 마음을 통해 본 비전도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은사는 바울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경험한 것처럼(행 18:9-10; 22:17-21; 23:11을 보라) 신자로 하여금 천사, 마귀,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볼 수 있게 해준다.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아람 군대에 쫓겨 도단에 갇혀있을 때, 그의 사환이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음을 보고 근심에 잠겼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6-17).

당신은 천사가 영적인 말과 영적인 병거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의 사환은 그것을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 은사를 통하여, 신자는 사람을 억압하는 악령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 영이 어떤 종류의 영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 은사는 영적인 영역의 일들을 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을 분별할 수도 있게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영적 영역에서 무언가를 듣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은사는 “분별의 은사”가 아니다. 이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은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판의 은사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은사”이다. 사실은, 구원받기 전에 당신은 그 “은사”를 가졌을 수 있지만, 구원받은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건져내고 싶어하신다.

말함의 은사(The Utterance Gifts)

1).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는 말하는 자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말하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로 자주 시작한다.

이 은사는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을 받은 설교와 가르침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에 예언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예언은 아니다. 많은 경우,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자나 교사는 그들이 계획하지 않은 말을 갑작스러운 영감에 의해 말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비록 나는 그것을 예언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예언의 은사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고전 14:3).

따라서 예언의 은사 그 자체에는 어떠한 계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달리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서로 함께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은 예언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가 집회에서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언을 들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 지혜의 말씀을 들었다. 예언의 은사는 마치 사람이 “너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라는 성경 속의 권면을 읽는 것처럼 들려진다.

일부 사람들은 신약 성경의 예언은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여야 한다는 특성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제한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것만 말씀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는 것이다. 책망은 확실히 덕을 세우고 권면하는 범주에 속한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 속에 확실히 책망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책망들을 버려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 각종 방언과 통역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란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은사에는 일반적으로 통역의 은사가 동반되는데 통역의 은사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한 것을 갑자기 통역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한다.

이 은사는 방언의 번역이 아닌 방언의 해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의 메시지를 단어마다 번역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 때문에 짧은 “방언의 메시지”와 긴 통역이 있을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역의 은사는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도 계시를 포함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 따라 방언에 통역의 은사를 더하면 예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에는 능력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계시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도 매우 적으나 말함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많다. 왜냐하면, 말함의 은사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 약간의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거의 고린도전서14장 전부를 할애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방언의 적절한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 세례에 대한 장에서 배운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 예배 중에 방언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질서가 없었다.

방언의 다른 용도(The Different Uses of Other Tongues)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한 공용 사용과 개인 사용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비록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가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는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중적인 방언의 은사로 사용하시리라는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방언의 기본 용도는 각 신자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함께 모여 통역이 없이 동시에 방언을 말하였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통하여 도움을 받거나 덕을 세우지 못했다(고전 14:6-12, 16-19, 23, 26-28을 보라).

방언의 공용 사용과 개인 사용을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개인 사용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공용 사용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두 가지 사용에 대해 모두 언급하고 있다. 차이점이 무엇일까?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2, 14을 보라). 그러나 누군가가 각종 방언의 은사를 갑자기 받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이며 일단 통역이 주어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전 14:5을 보라).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원하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고전 14:15을 보라), 각종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신다(고전 12:11을 보라).

각종 방언의 은사에는 일반적으로 통역의 은사가 동반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 기도는 일반적으로 통역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그의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4:14).

한 개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단지 만이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4:4을 보라). 그러나 각종 방언의 은사가 통역과 동반하여 나타날 때에는 전체 회중이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4:4후-5을 보라).

모든 신자는 주님과의 일상적인 교제의 일환으로 매일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 방언기도에 대한 놀라운 것들 중 하나는 그것이 당신이 마음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당신의 마음이 직장이나 다른 것들에 점유되어 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강조 추가)라고 말했다. 그가 방언을 말하는데 보낸 시간이 전체 고린도 교회를 능가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또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종종 “주님을 축복하게 된다”(고전 14:16-17)라고 썼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이 내가 “기도하는 언어”를 이해했던 적이 세 번 있었다. 나는 세 번 모두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일본어로 주님께 “당신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한 번은 “매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번은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일본어를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적어도 세 번이나 일본어로 “주님을 축복하였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Paul’s Instructions for Speaking in Tongues)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어떠한 모임에서든지 대중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 사람의 인수는 두 명 또는 세 명에 국한되었으며 방언을 할 때 모두 한 번에 말하지 말고 차례를 따라 기다렸다가 말해야 한다(고전 14:27을 보라).

바울은 단지 세 “방언의 메시지”만 허용된다고 의미한 것이 아니라 세 명 이상의 사람이 특정 예배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사람이 세 명 이상이라면, 그 중의 누구라도 성령님께 순복하여 성령님이 교회에 나타내고자 하는 “방언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실제로 특정 모임에 나타날 수 있는 방언의 메시지를 제한함으로써 성령님을 제한하게 된다. 만일 성령님이 한 모임에서 세 명 이상에게 각종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바울이 이런 가르침을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방언의 통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회중 중에 아마도 한 명 이상은 성령님께 순복하고 “방언의 메시지”를 통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통역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기 때문에 “통역하는 자”로 간주된다(고전 14:28을 보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라고 가르칠 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단지 한 사람만이 모든 방언의 메시지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같은 메시지에 대해 “경쟁적인 통역”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만일 한 통역하는 자가 하나의 방언의 메시지를 해석했으면, 다른 통역하는 자는 자기가 더 나은 통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같은 메시지를 통역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교회 모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적절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하며 동시적이고 혼란스럽고, 심지어 경쟁적인 발언으로 뒤죽박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신자들은 바울이 쓴 것처럼, 그들의 모임에 함께 있을 수 있는 모든 불신자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그것은 정확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었다 – 사람마다 동시에 방언을 하였으며 거기에는 종종 어떠한 통역도 없었다.

계시의 은사에 관한 몇 가지 지침(Some Instruction Concerning Revelation Gifts)

바울은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계시의 은사”에 관해 몇 가지 지침을 주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29-33).

고린도 교회의 지체 중에 통역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통역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듯이, 거기에는 예언과 계시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선지자”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거나 신약 성경의 아가보(행 11:28; 21:10을 보라)와 같은 선지자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사역은 지역 교회의 지체들에게 국한되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 모임에 이 같은 선지자가 세 명 이상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예언 사역을 하는 인수를 “둘이나 셋”으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성령님이 모임에서 성령의 은사를 주실 때,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순복함으로써 그런 은사들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지침은 어떤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나 많은 선지자가 말할 수 있는지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만일 모임에 세 명 이상의 선지자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비록 말하는 것으로부터 억제당했지만, 말해지는 내용을 분별함으로 도울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성령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며 어쩌면 그들이 다른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예언의 은사에 쓰임을 받도록 성령님께 순복했음을 암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숙한 신자가 할 수 있듯이, 단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이미 보여주신 계시와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예언과 계시를 분별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선지자들이 차례대로 모두 예언할 수 있으며(고전 14:31을 보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전 14:32)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각 선지자가 성령님으로부터 회중들과 함께 나눠야 할 예언과 계시를 받았을 때에도 다른 선지자를 방해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령님이 모임 중에 있는 여러 선지자에게 동시에 은사를 주실 수 있으며 각 선지자가 이런 계시거나 예언을 지체들과 나눌 때에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말하는 은사가 어느 신자를 통해 나타나든지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다. 만일 한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방언이나 예언의 메시지를 받았다면, 그는 모임에서 말하기 적절한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예언이나 가르침을 방해하면서 자신의 예언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이 “너희는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라고 주장할 때, 그는 예언을 받은 선지자의 맥락에서 말한 것임을 기억하라.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문맥을 무시하고 바울의 말이 모든 신자는 신자들의 모든 모임에서 다 예언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예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

오늘날, 교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임재와 은사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우리의 사모하는 정도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께 쓰임 받기를 사모하며, 진심으로 영적인 은사를 사모할 것이며 그들의 제자들도 똑같이 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제 18 장 (Chapter Eighteen)

사역의 은사(The Ministry Gifts)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7, 11-13, 강조 추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서로 돕는 것다스리는 것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강조 추가).

사역의 은사는 특정 신자들을 향한 부르심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 또는 교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도 이런 직분을 자기 절로 감당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받아야 한다.

한 사람이 다섯 가지 직분 중 한 가지 이상을 감당할 수는 있지만, 특정 조합이어야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신자는 목사와 교사, 또는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목사와 복음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왜냐하면, 목사의 사역은 한 지역의 사람들을 목양할 것을 요구하므로 자주 여행해야만 하는 복음 전도자의 소명을 목사가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 다섯 가지 직분이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다른 은사를 받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총체적인 목적인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엡 4:12)[1] 하기 위해 교회에 주어졌다. 모든 사역의 목표는 거룩한 사람들을(“성도”의 의미)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사역자들은 그들이 거룩한 백성을 봉사를 위해 온전하게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봉사 가운데 앉아 있는 육적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직분 중의 하나에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데 대한 자신의 공헌을 항상 평가해야 한다.

일부 사역의 은사는 초대 교회만 위한 것일까?(Were Some Ministry Gifts Only for the Early Church?)

이런 사역의 은사는 교회에 얼마나 오랫동안 주어질까? 예수님은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봉사를 위해 온전하게 될 때까지, 적어도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이런 은사를 주실 것이다. 교회에는 항상 성장해야 할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며, 나머지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영적으로 성숙해야 할 공간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변경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오직 목사와 복음 전도자 두 종류의 사역만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아니, 우리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사도, 선지자, 교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전 세계 많은 교회 가운데서 이런 은사의 예를 볼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런 은사를 가짜 교회, 거룩하지 않은 교회, 거짓 복음 교회가 아닌, 그분의 교회에만 주셨기 때문이다. 가짜 교회에서는 단지 일부 사역의 은사들(대부분 목사와 몇 명의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미약한 시도를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은 사역의 은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용서받았다는 생각을 하게끔 기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온전하게 되어 봉사의 일을 하려는 소원이 없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는지 여부를 어떻게 있을까? (How do You Know if You are Called?)

한 사람이 교회에서 이런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우선, 그는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특정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부담은 단순히 어떤 필요가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이다. 오히려 그 안에는 그로 하여금 특정 사역에 투입하려는 하나님께서 주신 굶주림이 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는 자신의 부르심대로 살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 임명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만이 그를 부르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둘째로, 진정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다섯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기름부음을 받았다. 부르심에 따라 기름부음도 받게 된다. 만일 기름부음이 없다면, 부르심도 없다. 한 사람이 특정 사역에 참여하려는 뜻을 품고 그 사역을 위해 신학교에서 4년 동안 교육받으면서 자신을 준비시켜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특정 은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이미 여러 가지 기회를 주셨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그는 자기가 더 큰 기회, 책임, 그리고 은사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내적 충동과 다섯 가지 사역 은사 중 하나에 대한 부르심을 느끼지 못했거나,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완성하기 위한 어떠한 기름부음도 받지 못했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은사를 훈련할만한 어떠한 기회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이 부르심이 없는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는 지역 교회의 지체들과 그의 이웃들과 자신의 직장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비록 그가 “다섯 가지” 사역에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다섯 가지 사역의 은사를 언급했다고 하여, 특정 직분을 맡은 사람마다 모두 같은 사역의 은사를 가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역은 여러 가지”(고전 12:6)라고 썼는데, 이것은 같은 직분을 가진 사역자라도 사역이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정도가 다양해 보이기에,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은 정도에 따라 각 직분을 분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교사들은 다른 교사보다 특정 방면에서 기름부음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역의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사역자라도 일정 기간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하게 성별함으로써 그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더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도의 직분을 살펴보다(A Closer Look at the Office of Apostle)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는 apostolos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신약 성경의 진정한 사도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특정 장소에 보내진 신자이다. 그는 사도인 바울이 쓰다시피 하나님의 “집”의 영적인 터를 닦아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매(고전 3:9-10상, 강조 추가).

“지혜로운 건축자”는 건물의 전반 건축 과정을 감독하며 완성된 모습을 구상한다. 그는 목수 또는 벽돌공 같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는 목수나 벽돌공의 일을 할 수는 있으나 아마 그들처럼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는 복음 전도자나 목사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지만, 교회를 세우는 제한된 시간 동안만 가능하다(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한 곳에 6개월에서 3년 동안 남아 있었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도록 감독하는데 가장 뛰어나다. 사도는 회중들을 목양하기 위해 장로/목사/감독을 교회에 세울 책임이 있다(행 14:21-23; 딛 1:5).

진정한 사도와 거짓 사도(True and False Apostles)

오늘날, 교회에서의 권위를 갈망하는 일부 사역자들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성급하게 선포하는데,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세운 교회가 없고(한두 개의 교회를 세웠을 수 있다), 성경적인 사도가 가져야 할 은사와 기름부음이 없기에, 그들이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도록 허용하는 속기 쉬운 목사를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목사라면, 이러한 자고하고 권력에 목마른 거짓 사도들에 의해 속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그들은 종종 돈을 추구한다. 성경은 거짓 사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후 11:13; 계 2:2을 보라). 만일 그들이 당신에게 자신이 사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대개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는 표시이다. 그들이 맺은 열매가 그들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자신만의 교회를 세운 후 그 교회에 수년 동안 목사로 있는 사람은 사도가 아니다. 이러한 목사들을, 아마도, “사도적 목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만의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속적으로 교회를 세워가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오늘날 “선교사”로 불려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된 부르심인 사람들은 사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신학교를 세우거나 목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선교사들은 사도가 아니라 교사이다.

진정한 사도의 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에 의해 특징 지을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1하-12).

한 사람의 사역에 표적과 기사가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도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도는 드물며, 거짓되고, 거룩하지 않은, 거짓 복음의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주로 이 세계에서 여전히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도의 높은 지위(The High Rank of the Apostle)

신약 성경에서 사역의 은사에 관한 나열에서 두 번 모두 사도의 직분을 첫 번째로 나열하였는데, 이것은 사도의 직분이 최고의 부르심임을 나타낸다(엡 4:11; 고전 12:28).

아무도 자신의 사역을 사도로서 시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지만, 처음부터 사도의 직분으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는 반드시 몇 년간의 복음 전파와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한 후에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비하신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전직 사역을 하였다(갈 1:15-2:1을 보라). 그는 실제로 교사와 선지자로 시작하였으며(행 13:1-2을 보라), 나중에 성령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고 사도로 된 것이다(행 14:14을 보라).

우리는 바울과 최초의 열두 사도 이외의 사도들에 대한 언급을 사도행전 1:15-26; 14:14; 로마서 16:7; 고린도후서 8:23; 갈라디아서 1:17-19; 빌립보서 2:25; 데살로니가전서 1:1과 2:6에서 찾을 수 있다. (고린도후서 8:23과 빌립보서 2:25에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apostolos이다.) 이것은 사도적 직분은 열두 사도한테만 한정한다는 이론을 뒤엎어 버린다.

그러나 열두 사도만이 “어린 양의 사도”로 분류될 수 있으며,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에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마 19:28; 계 21:14을 보라). 성경의 계시가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독특하게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사도들이 더는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성령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갈 사도가 필요하다.

선지자의 직분(The Office of Prophet)

선지자란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지자는 종종 예언의 은사뿐 아니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계시의 은사에도 쓰임 받는다.

모든 신자는 성령님이 뜻하시면 예언의 은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는, 우선, 기름 부음이 있는 설교를 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사역자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두 번째로 높은 부르심인 것으로 보이며(고린도전서 12:28에 나열된 순서를 참조하라), 비록 전직 사역자라 할지라도 수년 동안의 사역을 하기 전에는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한 사람이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한다면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도 따르게 될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선지자로 칭함을 받은 두 사람은 유다와 실라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5:32에서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 긴 예언을 하였음을 읽게 된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신약 성경에서 또 다른 선지자의 예는 아가보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 11:27-28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아가보는 지혜의 말씀을 받았음을 주목하라. 그에게 미래에 대한 무언가가 계시된 것이다. 물론, 아가보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알았던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성령님이 그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일들만 알았다.

사도행전 21:10-11을 보면 아가보의 사역을 통해 지혜의 말씀이 나타난 또 다른 예가 나온다. 이번에는 바울에 관한 예언이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새 언약 아래에서 선지자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구하는 것이 성경적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신자들 안에는 그들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마땅히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아가보가 바울에게 예언했을 때, 그는 바울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바울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은 사도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선지자(그리고 교사)로 있었다(행 13:1을 보라). 우리는 갈라디아서 1:11-12으로부터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으며 또한 많은 비전을 보았음을 알고 있다(행 9:1-9; 18:9-10; 22:17-21; 23:11; 고후 12:1-4을 보라).

진정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짓 교회에서 진정한 선지자를 찾을 수 없다. 거짓 교회는 실라, 유다, 아가보와 같은 진정한 선지자를 피할 것이다(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선지자는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기 때문이다(계시록의 처음 두 장에서 소아시아의 대부분의 교회에 대한 요한의 계시처럼). 거짓 교회는 그런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사의 직분(The Office of Teacher)

고린도전서 12:28에 나열된 순서에 따르면, 교사의 직분은 세 번째로 높은 부르심이다. 교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초자연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사람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신약 성경의 교사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자기가 좋아서 가르치거나 또는 의무적으로 가르치지만, 교사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가르침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았다. 그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여받으며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끔 설명할 수 있다.

아볼로는 이 직분을 맡은 신약 성경의 한 예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의 사도적 사역과 아볼로의 가르침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고전 3:6, 10중, 강조 추가).

아볼로는 처음부터 심거나 터를 닦은 것이 아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씨앗에 물을 주었으며 기존의 터 위에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 18:27에서도 언급되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아볼로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힘 있었음”을 주목하라. 기름부음을 받은 가르침은 항상 힘 있다.

교회에서, 가르침의 사역은 심지어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는 은사보다 더 중요하다. 바로 그 때문에 고린도전서 12:28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먼저 나열하였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강조 추가).

불행하게도, 신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삶에 영적 성장과 거룩함을 가져다주는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듣는 것보다는 병 고침을 받는 것을 더 추구한다.

성경은 설교와 가르침 모두에 대해 말씀한다. 설교가 더 많은 영감과 동기부여를 주는 반면 가르침은 더 논리적이고 교육적이다. 복음 전도자는 일반적으로 설교한다. 교사와 목사는 일반적으로 가르친다. 사도들은 설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신자가 가르침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강사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유일한 시간은 그들이 큰 소리로 빠르게 설교할 때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교사의 가장 좋은 예이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많은 사람은 그분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마 8:19; 막 5:35; 요 11:28).

교사와 가르침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서 사도행전 2:42; 5:21, 25, 28, 42; 11:22-26; 13:1; 15:35; 18:11; 20:18-20; 28:30-31; 로마서 12:6-7; 고린도전서 4:17; 갈라디아서 6:6; 골로새서 1:28; 디모데전서 4:11-16; 5:17; 6:2; 디모데후서 1:11; 2:2와 야고보서 3:1을 보라. 마지막에 나열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교사들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므로 그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해야 함을 알려준다. 그들은 단지 말씀만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The Office of Evangelist)

복음 전도자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갖게 인도한다. 불신자의 관심을 끌고 메시지의 참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종종 기적이 동반한다.

초대 교회 때에 많은 복음 전도자가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복음 전도자로 기록된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인데 그의 이름은 빌립이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행 21:8, 강조 추가).

빌립이 처음에 접대하면서 일꾼(또는 “집사”)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행 6:1-6을 보라). 그는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시기에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5-8).

빌립은 하나의 메시지 곧 그리스도만을 전파했음을 주목하라. 그의 목표는 제자 곧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추종자들을 삼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하시는 자, 하나님의 아들, 주님, 구주, 곧 오실 심판자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따를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빌립에게는 자신의 메시지를 입증하는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가 함께했음을 주목하라.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와 다른 영적인 은사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것이다. 거짓 교회에는 단지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거짓 복음 전도자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이런 거짓 복음 전도자들로 가득하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적과 치유로 그들의 메시지를 확증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필요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 할 수 있는지를 전파하거나, 회개가 없는 구원의 공식만을 전파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죄책감은 없애지만, 구원은 이루지 못하는 거짓 결단만 하게 한다. 그들의 복음 전파 결과는 그들이 거듭날 기회마저도 적어지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더는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 전도자는 실제로 사탄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돕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8에서는 에베소서 4:11에서처럼 복음 전도자의 직분이 다른 사역의 은사들과 함께 나열되지 않았지만, 나는 능력을 행하는 자와 병 고치는 은사가 복음 전도자의 직분에 적용된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 전도자 빌립의 특징이며, 모든 복음 전도자의 사역에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초자연적인 입증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교회로 옮겨 다니면서 스스로 복음 전도자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건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설교하며,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같은 은사를 가지고 있는 척하지만, 그들은 단지 순진한 바보들만 속일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기적은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는 것뿐이다.) 이런 옮겨 다니는 사역자들은 교사거나 설교자거나 권사일 수 있다(롬 12:8을 보라). 하지만 그들은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은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이 권사 또는 설교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하고 나중에 그에게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맡길 수 있으시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에 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빌립의 사역을 기록한 사도행전 8:4-40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역의 은사들이 상호 의존하는 것의 중요성과(특히 14-25절을 보라) 빌립이 무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로 개별적인 사람을 향한 사역도 하였음을 주목하라(행 8:25-39).

복음 전도자들이 그들의 회심자에게 세례를 줄 수는 있어 보이지만, 그들이 반드시 새 신자에게 성령세례를 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사도나 목사/장로/감독의 책임이 될 것이다.

목사의 직분(The Office of Pastor)

이전의 두 장에서, 나는 목사의 성경적인 역할과 제도적 교회 목사의 역할을 비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목사의 사역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목사의 직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개의 핵심 헬라어 단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그들은 (1) poimen, (2) presbuteros (3) episkopos이다. 그들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1) 목자나 목사, (2) 장로, (3) 감독 또는 주교이다.

단어 poimen은 신약 성경에서 열여덟 번 나오는데, 열일곱 번은 목자로, 한 번은 목사로 번역되었다. 동사의 형태 poimaino는 열한 번 나오는데 목자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

헬라어 presbuteros는 신약 성경에서 육십 여섯 번 나오며, 육십 번은 장로 또는 장로들로 번역되었다.

마지막으로, 헬라어 episkopos은 신약 성경에서 다섯 번 나오며, 그 중 네 번은 감독으로 번역되었다. 킹 제임스 버전은 주교로 번역하였다.

이 네 단어 중의 세 단어는 교회에서 같은 위치를 가리키며, 그들은 서로 교체되어 씌어졌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립하고 떠날 때마다, 장로들(presbuteros)을 임명하여 교회의 회중들을 보살피게 하였다(행 14:23, 딛 1:5을 보라). 그들의 책임은 감독자(episkopos)로서 그들의 양 떼를 보살피는(poimaino)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17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된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presbuteros] 청하니(강조 추가).

그리고 바울은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episkopos]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poimaino] 하셨느니라(행 20:28, 강조 추가).

세 개의 헬라어 단어가 서로 대체하여 사용됨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세 가지 다른 직분이 아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그들은 목자처럼 행하여야 할 감독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너희 중 장로들[presbuteros]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poimaino]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강조 추가).

베드로는 장로들이 그들의 양떼를 치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치라고 번역된 동사는 에베소서 4:11에서 (명사의 형태인) 목사로 번역되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강조 추가).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장로와 목사가 같은 의미임을 믿게 한다.

바울은 디도서 1:5-7에서 장로(presbuteros)와 감독(episkopos)을 의미하는 단어를 서로 교환하여 사용하였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강조 추가)

따라서 목사, 장로, 그리고 감독의 직분이 같은 직분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서 감독과 장로에 대해 쓴 모든 것은 목사에게도 적용된다.

교회 관리(Church Governance)

위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에서 보다시피, 장로/목사/감독에게는 교회에 대한 영적인 감독권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되었음이 매우 분명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장로/목사/감독이 교회를 담당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목사에게는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어떤 목사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목사/장로/감독은 아버지가 자기 가족에 대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2-5, 강조 추가).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강조 추가).

분명히, 장로는 교회를 관리할 것이다.

비성경적인 장로(Unscriptural Elders)

많은 교회들은 장로들로 구성된 관리 그룹이 있어 그들의 관리 구조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장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장로는 정기적으로 선출되고 교회 내에서 교대한다. 그들은 종종 “장로 위원회”로 불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의 정의에 의하면 장로가 아니다. 우리가 바울이 장로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열거한 요구 사항을 살펴보면, 이것은 아주 분명해진다. 바울은 장로는 전직으로 섬고 삯을 받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고 썼다(딤전 3:4-5; 5:17-18; 딛1:9). 교회의 “장로 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이 자격에 부합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삯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전직으로 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어떻게 다스릴지를 잘 알지 못한다.

비성경적인 교회 관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교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를 다스릴 때, 문제가 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툼과 타협을 일으키며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다. 비성경적인 교회 관리 구조는 악마에 대한 환영 인사와도 같다.

나는 제도적 교회뿐 아니라 가정교회의 목사들에게도 이 글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일부 제도적 교회 목사들은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출하는 비성경적인 관리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관리 구조는 일반적으로 투쟁이 없이는 변경될 수 없다.

이러한 목사들에 대한 나의 충고는 그들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관리 구조를 변경하여야 하며 불가피한 일시적인 충돌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정기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일시적인 충돌을 견디는 데 성공한다면, 모든 미래의 충돌을 피면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그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부터 성경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고통이 따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만일 현재 자신의 교회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라면, 그에게는 그들이 현재의 구조에 대한 필요한 변화를 가져오게끔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장로는 다수제인가? (The Plurality of Elders?)

일부 사람들은 성경에서 장로에 대하여 항상 복수상태로 언급했기 때문에 그대로라면, 한 명의 장로/목사/감독이 회중을 인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특정 도시에서 한 명 이상의 장로가 교회를 감독한다고 언급했지만, 그 장로들이 같은 회중을 공동으로 감독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였을 때(행 20:17을 보라), 그들은 전체 인구가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는 도시에서 왔음이 분명하다(행 19:19을 보라). 따라서, 에베소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며 매 장로마다 하나의 가정교회를 감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떤 위원회를 부르셔서 일을 시키신 사례가 없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셨을 때, 그분은 한 사람, 모세를 부르시고 지도자로 세우셨다. 다른 사람들은 모세를 돕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모두 그에게 종속되었고, 모세와 같이, 그들도 각각 특정 하위 그룹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양식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 한 사람을 부르시며, 다른 사람을 부르셔서 그 사람을 돕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장로 위원회를 부르셔서 스무 명 규모의 매 작은 가정 교회를 모두 감독하게 하실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분쟁에 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든 가정 교회는 오직 한 명의 장로에 의해 감독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에 한 명 이상의 장로가 있으면, 젊고 영적으로 덜 성숙한 장로(들)은 가장 나이가 많고 영적으로 성숙한 장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적으로, 신학교가 아닌, 교회가 젊은 목사/장로/감독들을 훈련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며, 한 가정교회에 여러 명의 장로/목사/감독이 있고 영적으로 미숙한 장로가 성숙한 장로의 제자 훈련을 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바람직할 수 있다.

나는 “같은 지위”의 장로들에 의해 감독 되는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음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항상 다른 장로들에게 존중받는 한 장로가 있었거나 다른 장로들이 수동적인 반면 지배적인 한 명의 장로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실, 위원회에서조차 항상 한 명의 의장을 선출한다. 같은 지위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한 명의 지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4-5에서 바울은 장로의 책임을 아버지의 책임에 비교했다. 장로들은 반드시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교회를 관리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같은 지위의 두 아버지가 어떻게 한 가정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나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장로/목사/감독들은 더 넓은 범위 지역의 지체들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동료 장로들 사이에 상호 책임을 지고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 도울 수 있다. 바울은 “장로의 회”(딤전 4:14을 보라)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장로들의 모임이 틀림없으며, 가능하게 사역의 은사를 가진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설립 사도가 있으면 그는 장로의 오류로 말미암아 생긴 지역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제도적 교회의 목사가 타락하면, 교회의 구조 때문에 항상 큰 문제가 발생한다. 거기에는 건물과 각종 프로그램들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즉시 해산시킬 수 있으며 회원들은 다른 모임에 참여하면 된다.

봉사할 수 있는 권한(Authority to Serve)

하나님은 목사에게 교회에서의 영적 및 관리 권한을 부여하셨지만, 그에게 자신의 양떼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하시지 않았다. 목사는 그들의 주님이 아니며 예수님만이 그들의 주님이시다. 그들은 목사의 양떼가 아닌 하나님의 양떼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 강조 추가).

각 목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언젠가 회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목사/장로/감독은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 어떤 이유로 정기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모금하고 있다면, 교회 내의 다른 지체들이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야만 헌금을 관리하는 것에 대한 불신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고후 8:18-23을 보라). 재정을 맡은 사람들은 선출하거나 임명할 수 있다.

장로에 대한 지급(Paying Elders)

장로/감독/목사들이 교회에서 전직으로 사역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들이 삯을 받아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7-18).

이 주제는 명확하다. 바울은 심지어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앞 구절들을 보면, 바울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과부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교회의 책임을 명백하게 썼으며,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딤전 5:3-16을 보라)라는 같은 표현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문맥을 보았을 때 “존대하라”는 표현은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여김을 받아야 하며, 적어도 과부에게 지원하는 것의 두 배는 받아야 하며 자녀가 있으면 그 이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세계 각곳의 대부분(심지어 가난한 국가)의 제도적 교회들에서는 목사들을 지원하지만, 전 세계의 많은 가정교회, 특히 서방의 가정교회들에서는 지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부분적으로는 가정교회에 다니려는 서양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반역적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요구가 가장 적은 기독교 형식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제도적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교회에 다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모든 헌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아무런 재정적인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신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교회를 찾았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않고 땅에 쌓아 두며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아니다(마 6:19-24; 눅 14:33을 보라). 만일 한 사람의 기독교 신앙이 돈에 대한 영향력을 잃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가정교회는 목사들을 지원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돌봐주고 선교사역에 후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재정적인 방면에 있어서, 제도적 교회를 훨씬 능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불이 필요한 건물과 프로그램을 위한 직원들이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의 목사를 지원하기 위해 열 명의 신자가 십일조를 내면 된다. 소득의 20%를 헌금하는 열 명의 신자는 한 명의 목사와 한 명의 선교사를 목사와 같은 수준에서 지원할 수 있다.

목사는 무엇을 하는가?( What do Pastors do?)

교회의 평범한 출석자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은 누구의 직업인가?”고 묻는다고 상상해보자.

누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거룩한 삶을 살고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다른 신자들을 권계하고 격려하고 병든 자를 방문하고 안수하고 치유해줘야 하는가? 누가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져야 하는가? 누가 지체를 위하여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가? 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가? 누가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가?

많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주저함이 없이 “이 모든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신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모든 신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모든 신자는 기도하여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모든 신자는 다른 신자를 권계하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강조 추가).

모든 신자는 병든 자를 방문하여야 한다.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6).

많은 책임(More Responsibilities)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모든 신자는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치유하여 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 강조 추가).

모든 신자는 지체들의 짐을 서로 져야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모든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여야 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강조 추가).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그들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강조 추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강조 추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강조 추가).[2]

이러한 책임은 모든 신자에게 다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출석자들은 이런 일들은 단지 목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목사 스스로 너무 자주 이런 일들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So What are Pastors Supposed to do?)

만일 이러한 책임들이 모든 신자에게 주어졌다면, 목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거룩한 신자들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세워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엡 4:11-12을 보라). 그들은 거룩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해(마 28:19-20을 보라) 교훈과 본을 통하여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딤전 3:2; 4:12-13; 5:17; 딤후 2:2; 3:16-4:4; 벧전 5:1-4을 보라).

성경은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명확할 수가 없다. 목사의 성경적인 역할은 주일 아침 예배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워가는 것”(골 1:28)이다. 성경적인 목사는 사람들의 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딤후 4:3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권면하고, 경책하고, 바로 잡고, 책망한다(딤후 3:16-4:4을 보라).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한 사람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일부 자격 조건을 나열하였다. 열다섯 가지 중의 열네 가지는 성품에 관련된 것인데 이것은 모범이 되는 삶이 가장 중요함을 보여준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1-7).

이러한 자격 조건들과 제도적 교회에서 종종 새로운 목사를 찾을 때 명시하는 조건들을 비교해보면 많은 교회들의 주요 문제가 보인다. 그들은 직원 관리일꾼/즐겁게 해주는 사람/연설을 짧게 하는 사람/행정가/심리학자/활동 및 프로그램이 감독/모금 전문가/인맥이 넓은 사람/불평이 없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사역을 끌어갈” 사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감독은 무엇보다도 좋은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께 헌신된 진정한 일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때문이다. 그는 그의 무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목사의 직분에 관한 진일보의 연구를 위하여 사도행전 20:28-31; 디모데전서 5:17-20; 및 디도서 1:5-9을 보라.

집사의 직분(The Office of Deacon)

끝으로, 나는 집사에 대한 언급을 조금 하겠다. 집사의 직분은 지역교회에서 다섯 가지 사역의 은사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직분이다. 집사는 장로처럼 교회에서 관할 권한이 없다. 집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diakonos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종”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임명된 일곱 명의 남자들은 최초의 집사로 간주된다(행 6:1-6을 보라). 그들은 교회 회중에 의해 택함을 받고 사도들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 중 적어도 두 사람, 빌립과 스데반은 나중에 하나님의 의해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디모데전서 3:8-13과 빌립보서 1:1에도 집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직분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맡을 수 있다(딤전 3:11을 보라).

 


[1]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기 위함이다”라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2]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제자들도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게끔 가르쳤다면, 그들도 결국 그들의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모든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영원한 계명이다.

제 15 장 (Chapter Fifteen)

신유(Divine Healing)

비록 신유의 주제가 다소 논란이 있지만,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사실, 사복음서의 기록 중 십 분의 일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관한 것이다. 구약 성경, 사복음서, 신약 서신 모두에 신유에 대한 약속이 있다. 병든 사람은 믿음 위에 세워진 말씀 속에서 큰 격려를 받을 수 있다.

전 세계의 교회들에 대한 나의 관찰에 의하면, 헌신적인 신자(진정한 제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신유가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교회가 미지근하고 순전하지 않을수록 신유가 드물게 일어난다.[1] 이런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아지는 표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 16:18을 보라).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교회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교회가 불신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5-18).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본받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이 영향 줄 수 있는 영역에서 신유의 사역을 촉진하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당연히 사용할 것이다. 그는 신유가 적어도 두 가지 방면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첫째로, 복음서 또는 사도행전을 읽어본 아이들은 다 이해할 수 있듯이(그러나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역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치유의 기적은 복음을 위한 훌륭한 광고이다. 둘째로, 건강한 제자들은 사역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질병으로 인한 방애를 받지 않는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또한, 치유받기를 원하지만, 치유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들은 종종 부드러운 가르침과 온유한 격려가 필요한데 특히 그들이 어떤 치유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면 말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 그는 신유의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피함으로 아무도 거스르지 않거나 아무도 치유받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또는 그 주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으로 하여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하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거스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번째를 선택할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십자가에서의 치유(Healing on the Cross)

신유에 대해 연구하기 가장 좋은 곳은 보편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되는 이사야서 53장이다. 성령님을 통하여, 이사야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질고를 담당하셨다고 선언하였다. 히브리어 본문의 뜻을 더 잘 번역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담당하신 것이 된다. 많은 신뢰할 수 있는 성경 번역본에서도 이 부분을 주석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사야서 53:4에서 질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choli 란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명기 7:15; 28:61; 열왕기상 17:17; 열왕기하 1:2; 8:8과 역대하 16:12; 21:15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경우에서 그 단어는 으로 번역되었다.

슬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makob는 욥기 14:22과 33:19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경우에서도 그 단어는 아픔으로 번역되었다.

이 때문에, 이사야서 53:4을 “그는 실로 우리의 아픔을 지고 우리의 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사실은 마태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직접 인용한 이사야서 53:4을 통해서도 보증된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

이러한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일부 사람은 이사야가 우리의 “영적 질병”을 언급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이 인용한 이사야서 53:4은 이사야가 말 그대로 육체적인 질병을 언급하였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보여준다. 그 성경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강조 추가).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육체적인 병의 치유가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의 성취라고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사야서 53:4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증거임이 틀림없다.[2]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성경 말씀처럼(사 53:11을 보라),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육체적 인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셨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소식이다. 예수님은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치유를 주셨다.

제기된 한 가지 질문(A Question Asked)

그러나 일부 사람은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지 못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 질문은 “왜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장 잘 대답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었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의 믿음에 합당한 치유를 받게 된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담당하신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들어보았지만 거절했다.

병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태도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심을 읽게 된다. 따라서, 병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가 아버지께서 병을 향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의 태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라도 자신한테 나아와서 치유를 간구한 사람은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치유받기를 갈망하는 병든 사람에게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안돼, 당신이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당신은 계속 병을 앓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한테 온 병든 사람들을 항상 치유하여 주셨으며, 그들이 일단 치유되면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치유하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은 절대 변하시지 않으며(말 3:6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고 선언한다.

선포된 치유(Healing Proclaimed)

불행하게도, 오늘날 구원은 단지 죄의 용서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구원”으로 가장 자주 번역되는 헬라어는 용서뿐 아니라 완전한 해방과 치유의 의미도 나타낸다.[3]이러한 의미에서의 구원을 경험한 성경 속의 한 인물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치유되었다.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행 14:6-10).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그 사람은 육체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무언가를 들었다. 최소한, 그는 바울이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며, 예수님께 치유받게 해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한 사람들이 어떻게 치유받았는지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도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말했을 수 있다. 우리가 모르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롬 10:17) 때문에, 그 병자가 마음속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 무언가를 들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이 한 말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가 계속 마비상태에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음을 확신하게 하였다.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치유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할 수가 없으며, 바울도 그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했을리가 없다. 만일 바울이 많은 현대 설교자들이 하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그가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설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치유받지 못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할 설교자들이 정작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되었음을 주목하라. 비록 그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믿지 않았다면 여전히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날 거기에 있던 무리 중에 그 사람 외에 아픈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터이나, 그들 중 누구도 치유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왜 치유받지 못했을까? 그날 무리 속에 있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은 같은 이유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치유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거듭나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과 같다. 구원받으려는 사람마다 반드시 복음을 믿어야 하며, 치유받으려는 사람마다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마다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진일보 증거하다(Further Proof of God’s Will to Heal)

구약에서, 육체적인 치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한 후 며칠 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정직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치유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포함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덧붙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7-31에서 신약에서의 육체적인 건강도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강조 추가).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신 7:14-15, 강조 추가).

사람은 만일 육체적인 치유가 구약에 포함되었다면, 또한, 성경에서 주장한 것처럼 신약이 구약보다 더 좋은 약속이라면, 왜 신약에는 육체적인 치유가 포함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강조 추가).

더 진일보된 증거(Yet Further Proof)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세 가지를 나열하겠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1-3, 강조 추가).

어느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다윗의 선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22, 강조 추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강조 추가).

이 마지막 약속은 모든 병든 자들에게 한 것임을 주목하라. 그리고 장로나 기름 때문에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로 치유받음을 주목하라.

이 믿음은 장로의 믿음일까 아니면 병든 자의 믿음일까? 이 믿음은 장로와 병든 자 모두의 믿음이다.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를 청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표현하였다. 병든 자의 불신은 장로의 기도를 폐할 수도 있다. 야고보가 쓴 이 기도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8:19에서 언급하신 “합심의 기도”의 좋은 예이다. 두 당사자는 이 기도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합심”하여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은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합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의 여러 말씀에서 병의 이유를 사탄에게 돌린 것을 알고 있다(욥 2:7; 눅 13:16; 행 10:38; 고전 5:5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몸에 사탄이 일하는 것을 막아주실 거라고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보다도 그분의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마 7:11을 보라).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자신의 자녀가 병들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동안, 행하신 치유의 역사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해준다. 예수님은 자주 그분께 치유받기를 구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으며, 그들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칭찬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람만 골라서 치유해 주시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어떤 병든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면 치유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치유하기를 원하시나 그들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몇 가지 보편적인 반론에 대한 답변(Answers to Some Common Objections)

아마도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닌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그런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암이 치유받기 위해 기도했던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바로 요단 강 건너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을 알고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것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음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했다(히 3:19을 보라).

지금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어떨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천국에 가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는 아픈 사람을 보고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없다. 한 그리스도인의 치유를 위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치유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 그리스도인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는데도 치유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이다. 우리가 치유받지 못하고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믿음에 대해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에 대한 기도를 믿음을 파괴하는 “만일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란 문구로 부당하게 마무리한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가 보았 둣이,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매우 명백하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만일 그것이 당신이 뜻이라면”이란 말을 치유의 기도에 추가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 “주님, 나는 당신께서 저를 치유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거짓말을 하셨을지도 모르니까, 오직 그것이 당신의 뜻일 때에만 저를 치유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신자들을 훈계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질병을 허락하시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죽음의 변두리까지 가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치유받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 분명히 필요하다(고전 11:27-32을 보라). 또한,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홀시함으로 병든 신자들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먹고,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필요한 휴식을 취할 만큼 충분히 지혜로워야 한다.

두 번째 보편적인 반론(A Second Common Objection)

사람은 종종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시가 질병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신학 이론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고후 12:7-9, 강조 추가).

사자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 “aggelos”는 신약 성경에서 160여 곳에서 천사로 번역되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사탄이 바울을 타격하기 위해 보낸 천사이지 질병이 아니다.

또한, 바울이 치유받기 위해 기도를 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를 거부하셨다는 표시가 없었음을 주목하라. 세 가지 경우에, 바울은 단지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누가 바울에게 이 가시를 주었을까? 어떤 사람은 그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불려지기에 그것을 준 것도 사탄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은 가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가시로 인해 교만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도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했다.

킹 제임스 번역본은 이 구절을 조금 다르게 번역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를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지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는다. 사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면 우리를 높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때문에 하나님은 높여주시는 분이시지만, 사탄은 바울이 어디로 가든지 교란시키는 사자를 보내어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그가 높임을 받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의 능력은 바울의 약한 데서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병든 바울을 하나님이 치유해주기를 거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왜곡이다. 육체의 가시에 대한 성경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질병도 언급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이 그를 치유해주시지 않았다는 언급도 한 적이 없다. 만일 정직한 사람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3-30에 열거한 모든 시련을 읽어보면, 그 가운데 질병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같은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An Elaboration on the Same Theme)

어떤 사람은 바울의 가시에 대한 나의 설명에 대해 “그러나 바울 자신이 처음으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육체가 약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육체의 가시를 말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반대한다.

아래의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쓴 편지의 실제 내용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3-14).

갈라디아서 4:13에서 약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asthenia 이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약함”이다. 약함은 병 때문일 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강조 추가)고 썼다. 이 구절에서 약하심으로 번역된 단어도asthenia 이다. 번역가가 “하나님의 병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번역했다면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마 26:41과 벧전 3:7에서 asthenia 는 모두 약함으로 번역되었으며 으로 번역될 수 없다).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바울이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가 병들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알고 내버려 두었으며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거나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는 언급은 있다(행 14:5-7, 19-20을 보라). 돌로 친 후 죽은 줄로 알고 내쳐둔 바울의 몸은 분명히 온통 상처로 뒤덮인 끔찍한 상태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병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청중들에 대한 시험이었다. 오히려, 그의 몸이 약해진 것은 돌에 맞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갈라디아에서 받았던 박해로 인한 몸의 상처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서신을 이렇게 마무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또 다른 반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 받는다”(Another Objection: “I’m Suffering for the Glory of God”)

이 반론은 나사로가 부활한 이야기 중의 한 말씀을 가지고 그들이 병을 앓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다. 예수님은 나사로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사로의 병의 결과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치유받고 죽음에서 일어나므로 인해 영광 받으신다고 하셨다. 즉, 병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 때문에 영광 받으신다(마 9:8; 15:31; 눅 7:16; 13:13; 17:15을 보라. 거기서 사람은 치유받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 다른 반론: “바울은 그가 밀레도에 드로비모를 병든채로 남겨두었다고 했다” (Another Objection: “Paul Said He Left Trophimus Sick at Miletum”)

내가 이 부분을 쓰고 있을 당시 마침 독일의 한 도시에 있었다. 지난주 내가 미국의 고향을 떠날 때에, 많은 아픈 사람들을 남겨뒀다. 나는 병원에 수많은 병든 자들을 남겨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울이 방문한 도시에 병든 사람 한 명을 두고 떠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다. 바울은 또한, 많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두고 떠났는데 그 사람은 어떠한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절대 할 수 없다.

또 다른 반론: “나는 욥과 같다!”(Another Objection: I’m Just Like Job!”)

 

주님을 찬양하라! 당신이 욥기를 끝까지 읽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그가 치유받았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욥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당신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욥의 이야기는 치유가 하나님의 뜻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또 다른 반론: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에 대해 한 조언(Another Objection: Paul’s Advice to Timothy About His Stomach)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딤전 5:23을 보라).

사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마시는 것을 중지하고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했다. 이것은 물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만일 당신이 오염 된 물을 마셨다면, 당신은 그 물을 마시기를 중지하고 다른 뭔가를 마시기 시작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마 디모데와 같은 위장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반론: “예수님은 단지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치유하셨다”(Another Objection: “Jesus Only Healed to Prove His Deity.”)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이 치유하신 유일한 이유는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믿기를 원한다. 지금은 그분의 신성이 이미 확립되었기에, 그분은 더는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그분의 신성을 입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치유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마 8:4; 9:6, 30; 12:13-16; 막 5:43; 7:36; 8:26을 보라). 만일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한 목적이 단지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라면, 그분은 치유받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말하도록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신 동기는 무엇일까?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씀한다(마 9:35-36; 14:14; 20:34; 막 1:41; 5:19; 눅 7:13을 보라). 예수님이 치유하신 이유는 그분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이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적어졌는가? 그분의 사랑이 적어졌는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반론: “하나님은 모종 이유 때문에 내가 병들기를 원하신다”(Another Objection: “God Wants Me to be Sick for Some Reason.”)

그것은 우리가 고려했던 모든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지속적으로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당신의 병을 허용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그분은 당신이 회개하고 치유받기를 원하신다.

또한,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병들게 하시고자 한다면, 왜 당신은 의사에게 가서 약을 복용하고 치유받기를 원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려는가?

마지막 반론: “우리가 질병의 고통이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A Final Objection: “If We Never Suffer Disease, How Will We Die?”)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부패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후 4:16을 보라). 우리가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몸이 늙어가는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국,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좋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젊었을 때처럼 빨리 달리지 못하고 우리의 심장도 튼튼하지 못하다. 우리는 천천히 낡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병으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완전히 낡아질 수 있으며, 그때가 되어 하나님이 천국의 본향으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의 영은 우리의 몸을 떠나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왜 당신이라고 안 되겠는가?

 


[1]북미의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이 주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소위 신자들에 의해 큰 저항을 받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그분의 치유사역에 대한 저항과 불신을 만나셨다(막 6:1-6을 보라).

[2]일부 사람들은 불신에 매달리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잡으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저녁에 사람들을 치유하심으로 이사야서 53:4의 말씀을 완전히 성취하셨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예수님이 상하신 것이 우리의 죄악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말하였다(사 53:4, 5을 비교하라). 예수님은 질고를 지신 사람들의 죄악때문에 상하셨다. 따라서, 마태는 가버나움에서의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그분이 우리의 죄악과 질고를 담당하실 이사야서 53장의 메시야임을 입증한다는 것만 나타냈다.

[3]예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이 치유하신 혈루증에 걸린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5:34)고 말씀하셨다. “구원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sozo)는 신약성경에서 열 번 나타나는데 그 중 여덟 번은 “구원” 또는 “구원받았다”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5에서 같은 단어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번역되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인 치유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장 많이 번역됨을 알 수 있다.

제 16 장 (Chapter Sixteen)

예수님의 치유사역(The Healing Ministry of Jesus)

사람은 종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거나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확실히 신성을 지니셨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분명히 자기 제한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은 어느 한 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자기 제한적이고 그분의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으로 되셨을 때 자기를 비우셨으며, 그분이 비우신 것은 전에 하나님처럼 소유하셨던 것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7, 강조 추가).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신성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음이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그분은 더는 무소부재하시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더는 전지하시지 않으며 전능하시지 않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분의 사역 속에서, 그분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람으로 활동하신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분이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왜 성령세례가 필요했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왜 하나님하나님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분명히 예수님은 사역을 위한 성령세례가 필요하셨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세례 받으신 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강조 추가).

그것은 베드로가 아래와 같이 설교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강조 추가).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30세에 성령세례를 받기 전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이 25세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을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30세 때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가지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자기에게서 비우셨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람으로 사역하셨다는 더 많은 증거들(More Proof that Jesus Ministered as a Man Anointed by the Spirit)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지셨을 때와 그렇지 않으셨던 때가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예수님은 종종 정보를 얻으시기 위해 질문을 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에게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17-18을 보라).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일까? 아니, 만일 그 경우라면, 예수님은 일관성 있게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비록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예수님은 사람으로 되실 때 전지의 자기를 비우셨다. 예수님이 우물가 여자의 결혼사를 아는 것은 그 순간에 성령님이 그분에게 “지식의 말씀”(고전 12:8)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또는 과거의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자세히 다룰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아니,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시고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막 5:30 하)라고 물으셨다. 마가복음 11:13에서 예수님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서 보셨다.”

왜 예수님은 누가 그분을 다쳤는지 모르셨을까? 왜 그분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혔는지 여부를 모르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어진다(고전 12:11; 히 2:4을 보라). 예수님은 성령님이 뜻하시고 그분께 “지식의 말씀”을 주지 않으면 초자연적으로 무언가를 아실 수 없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예수님이 아무 때나 누구든지 치유할 수 없다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그분이 원하셨던 일을 아무것도 이루실 수 없었음을 읽게 된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막 6:1-6, 강조 추가).

마가는 예수님이 거기에서 권능을 행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하실 수 없었다고 했음을 주목하라. 왜서일까? 왜냐하면, 나사렛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동네 목수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 6:4)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았다. 그 결과로, 그분이 성취하신 일은 다만 소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시는 것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만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으셨던 곳이 있었다면, 그곳은 분명히 그분이 삶 대부분을 사셨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곳에서 그분은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말씀한다.

누가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More Insight from Luke)

예수님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치유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병든 자들이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셨다. (2) 성령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치유의 사역을 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 요인의 제한을 받으셨다. (1) 병든 자들이 믿지 않는 것과 (2) “치유의 은사”를 통해 그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님의 뜻인지 여부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다른 도시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것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분이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분은 그들을 치유할 수 없으셨다. 또한, 성령님은 나사렛에서 예수님께 “치유의 은사”를 명백히 주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는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가보다 보다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16-22).

예수님은 그분이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청중들이 믿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그분의 기름 부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믿고 받을 수 있기를 원하셨는데 이사야에 의하면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된다.[1]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고, 비록 그들이 그분의 말씀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요셉의 아들이 특별하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에 의심을 품은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3-24).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던 일을 하실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적이었다. 그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하여 예수님을 어떤 기적이나 치유도 행하실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받은 다른 제한성(Jesus’ Other Limitation in Nazareth)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분께서 또한, “치유의 은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게 하는 성령님의 뜻에 제한받음을 보여준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25-27).

예수님의 요점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3년 기근 동안 어떤 과부든지 그가 원하면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왕상 17:9-16을 보라). 비록 그 당시 이스라엘에 수많은 고통 받는 과부가 있었지만, 성령님은 엘리야가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한 명의 과부만 도와주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엘리사도 그가 원하면 어떤 나병환자든지 깨끗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아만이 깨끗게 함을 받을 당시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그것이 순전히 엘리사 자신의 선택이었다면, 그가 우상 숭배자인 나아만을 깨끗게 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다른 나병환자들도 깨끗게 하였을 것이다(왕하 5:1-14을 보라).

엘리야와 엘리사는 모두 성령님의 뜻대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쓰임 받은 성령님께 기름 부음 받은 선지자들이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른 과부에게 보내시지 않았을까? 나는 모른다. 왜 하나님은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다른 나병 환자들을 치유하시지 않았을까? 나는 모른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익숙한 구약 성경 이야기는 모든 과부의 필요를 제공하거나 모든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하지 못한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사악한 왕(아합)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만 했어도 자신들의 기근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기근은 하나님 심판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나병 환자들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육체적인 치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더라면 치유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청중들에게 엘리야와 엘리사가 제한 받았던 것처럼 그분도 같은 제한을 받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성령님은 나사렛에서 모종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어떤 “치유의 은사”도 주지 않았다. 그 사실과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고향에서 큰 기적을 행하시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은사”를 보다(A Look at One “Gift of Healing” Through Jesus)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다양한 치유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치유받은 사람은 “치유의 은사”가 아닌 그들의 믿음 때문에 치유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치유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각자의 예를 통하여 살펴보자. 먼저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닌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은 베데스다 못의 다리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연구해보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 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2-9).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람이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닌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첫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 사람이 못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면,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셨을 때처럼 그 사람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치유하였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셋째로,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한 사람이 누군가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사”를 통하여 치유받은 명확한 사례이다.

또한, 많은 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만 치유하셨고 나머지 사람은 병든 채로 남겨 두셨음을 알 수 있다. 왜서일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사람은 병든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 병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고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다. 사실,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것은 병든 사람들을 그들이 믿기만 하면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께 집중시키기 위함일 수 있다.

많은 경우, “치유의 은사”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설계된 “표적과 기사”의 범주에 속한다. 때문에 빌립과 같은 신약 성경 속의 복음 전도자는 다양한 “치유의 은사들”로 장비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한 표적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행 8:5-8을 보라).

그리스도인이 병들었을 때,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와서 치유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과 은사는 결코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받는 것은 가능하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는 있다. 교회에 치유의 은사를 주신 것은 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치유받음으로 인해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치유받기를 기대하신다.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은 사람의 한 예(One Example of a Person Healed By His Faith)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 받은 한 맹인이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그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46-52).

우선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찾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베데스다 못가의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과는 정반대이다). 사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스쳐 지나가고 계셨다. 그리고 만일 바디매오가 부르짖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계속하여 걸어가셨을 것이다. 즉, 바디매오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아래의 가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 앉아 “그래, 내가 치유받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면, 그분은 나에게로 오셔서 나를 치유하여 주실 거야”라고 자신한테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비록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바대매오를 치유하시기를 뜻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행동은 곧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에 의해 좌절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게 하려고 할 때,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막 10:48). 그것은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최초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물론,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최초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셨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들으셨다 할지라도 응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이 시험받게 하실 수 있다.

만일 바디매오가 한 번만 부르짖고 포기했다면, 그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때로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믿음은 시험받게 되며, 우리는 계속하여 굳게 서야 하여 역경 때문에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바디매오의 믿음에 관한 추가 암시(Further Indications of Bartimaeus’ Faith)

예수님이 마침내 그를 부르셨을 때, 성경은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렸다”고 말씀한다. 나의 이해에 의하면 예수님의 시대에 맹인들은 대중들이 맹인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특별한 겉옷을 입었다. 확인 망토의 특정 종류를 착용 한 나의 이해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린 것은 그가 더는 맹인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라면, 그의 믿음은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또한, 바디매오가 자신의 겉옷을 내버렸을 때, 성경은 그가 “뛰어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흥분된 기대감을 표시한다. 치유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때 흥분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치유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그분 앞에 섰을 때 그의 믿음을 한 번 더 시험하셨음을 주목하라.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으신 예수님께 드린 바디매오의 대답으로부터 보아, 그가 예수님이 그를 능히 치유하실 수 있으며 또 치유하여 주시리라는 것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바디매오가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었다면, 누구든지 다 치유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일보된 연구(For Further Study)

아래에 나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21가지 치유의 사례들을 나열하였다. 물론, 예수님은 21명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셨지만, 아래의 경우에서 우리는 병자 개개인과 그들이 어떻게 치유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례들을 믿음으로 치유된 사람과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된 사람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치유받은 경우, 예수님은 그들에게 치유받은 것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진일보 그들이 치유받은 것이 “치유의 은사”에 의한 것이 아님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병든 자들이 예수님이거나 복음을 선전하기 위해 치유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믿음으로 치유받았다고 언급한 사례들:(Cases Where Faith or Believing is Mentioned as the Cause of Healing:)

1. 백부장의 하인(또는 종): 마 8:5-13; 눅 7:2-10 “네가 믿는 대로 될지어다.”

2.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다. 마 9:2-8; 막 2:3-11; 눅 5:18-26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내가 네게 이르노니… 집으로 가라”

3. 야이로의 딸: 마 9:18-26; 막 5:22-43; 눅 8:41-5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

4. 혈루증으로 앓은 여자: 마 9:20-22; 막 5:25-34; 눅 8:43-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5. 두 맹인: 마 9:27-31 “너희 믿음대로 되라…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6. 맹인 바디매오: 막 10:46-52; 눅 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7. 열 명의 나병 환자: 눅 17:12-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8. 왕의 신하의 아들: 요 4:46-53 “그 사람은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믿었다.”

다음 4가지 사례에서, 병든 자의 믿음이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보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0번째 사례에 나오는 두 맹인도 바디매오가 한 것처럼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 부르짖었다. 다음의 4가지 예에서 나오는 모든 병든 자들은 주동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명확히 나타낸다. 다음의 4가지 사례 중 3가지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치유하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들이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은 경우가 아님을 나타낸다.

9.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병 환자: 마 8:2-4; 막 1:40-45; 눅 5:12-14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10. 두 맹인(아마 한 명은 바디매오였을 것이다): 마 20:30-34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1. 귀머거리와 벙어리: 막 7:32-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12. 한 맹인: 막 8:22-26 “마을에는 들어도 가지 말라.”

마지막 두 사례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기를 간구한 사람은 실제로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구원에 영향 줬다고 칭찬하셨다.

13. 귀신 들린 아이: 마 17:14-18; 막 9:17-27; 눅 9:3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14.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 마 15:22-28; 막 7:25-30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의 사례:(Cases of People Healed Through “Gifts of Healings”:)

아래의 7가지 사례들은 명백히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 3가지 사례에서는, 병든 자가 치유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특정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이러 경우에. 예수님은 치유받은 자들에게 치유받은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병든 자가 예수님을 먼저 찾은 적도 없다.

15. 손 마른 사람: 마 12:9-13; 막 3:1-5; 눅 6:6-10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네 손을 내밀라.”

16. 베데스다 못가의 남자: 요 5:2-9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17.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 9:1-38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18. 베드로의 장모: 마 8:14-15; 막 1:30-31; 눅 4:38-39

19. 열여덟 해 동안이나 꼬부라진 여자: 눅 13:11-16

20. 수종병 든 남자: 눅 14:2-4

21. 대제사장의 종: 눅 22:50-51

위의 스물하나의 모든 사례에서, 성인이 전적으로 다른 성인의 믿음으로 치유받은 경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치유 받았던 모든 경우를 보면, 그것은 항상 아이가 그 부모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은 경우였다(사례 1, 3, 8, 13, 14를 보라).

유일하게 가능한 예외는 백부장의 하인의 사례와 중풍 병자를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로 내려온 사례가 될 것이다. 백부장의 하인의 사례에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pais 인데 이 단어는 마태복음 17:18에서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강조 추가) 라고 번역된 것처럼 아이로 번역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가 백부장의 아이가 아니라 하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하인은 어린아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백부장은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로서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며,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아이를 대신하여 믿음을 행사할 수 있다.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경우에서, 중풍병자 자신이 반드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친구들이 그를 지붕을 통해 달아 내리게 허락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적으로 친구들의 믿음으로 치유 받은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만일 병든 성인 자신이 믿음이 없다면, 다른 성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치유되게 할 수 없다. 물론 한 성인이 치유가 필요한 성인과 함께 기도할 수는 있지만, 병든 성인의 불신은 잠재적으로 다른 성인의 믿음의 효과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아이들은 특정 나이까지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나이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주님의 치유에 대한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 위에 열거한 매 사례마다 자세히 공부할 것을 권장한다.

치유의 기름 부음(The Healing Anointing)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감지할 수 있는 치유 능력을 기름 부음 받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분은 실제로 치유의 능력이 그분의 몸에서 나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치유받고 있는 병자도 그 능력이 자기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19은 이렇게 말씀한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라”

분명한 것은, 치유의 기름 부음이 심지어 예수님의 옷에도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병든 사람이 그분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면, 치유의 기름 부음은 그 사람의 몸으로 흐를 것이다. 아픈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의 옷을 만진 경우, 기름 부음 치유 자신의 몸에 흐를 것이다. 마가복음 6장 56절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막 5:25-34을 보라)는 그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치유될 수 있기를 믿음으로 기대했으며 또 믿는 대로 치유받았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그의 사역의 후년에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1).

바울의 몸이 닿았던 옷은 모두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옷이 치유의 능력을 전달하는 좋은 도체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하나님은 예수님이나 바울의 시대 이후로 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바울에게 주셨던 치유의 기름 부음을 오늘날 그분의 일부 종들에게 부어주셨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은 새 신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일정 기간 동안 신실함과 이기적인 동기가 없음이 검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1]이 모든 것은 육체적인 치유로 볼 수 있으며 병도 눌린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제 14 장 (Chapter Fourteen)

믿음의 기초(Fundamentals of Faith)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기초를 두며,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과 자기를 찾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여 대하신다.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1)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2) 하나님께 순종하고, (3)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모두 구현되어야 한다.

이 장은 우리의 믿음의 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은 믿음을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물질적인 번영을 강조한다. 그 이유 때문에, 일부는 이 주제에 대해 전혀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는 균형을 잡고 성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주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을 단련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으며, 그분의 제자가 그분을 본받기를 기대하셨다. 마찬가지로,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그의 제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21:22; 약 1:5-8을 보라). 성경은 분명히 의심하는 자는 신자가 받는 축복을 박탈당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정의(Faith Defined)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히브리서 11:1에서 찾을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정의에서, 우리는 믿음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확신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희망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항상 의심의 여지를 둔다. 희망은 항상 “아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는 오늘 비가 내려 정원을 적셔주기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비가 오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올지 여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반대로, 믿음은 항상 확실하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믿음 또는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종종 성경적인 정의가 아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늘 위의 어두운 구름을 보면서 “나는 비가 올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비가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성경적인 믿음에는 의심의 요소가 없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외의 다른 결과를 용납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Faith is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히브리서 11:1의 믿음의 정의에 의하면 믿음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감을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거나 감지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손에 책이 있음을 믿는다.” 물론, 당신은 그 사람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당신은 내 손에 책이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책을 잡고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근처에 천사가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나는 확신한다.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천사를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내가 천사가 날고 있는 것을 감지했거나 들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만일 내가 천사를 보거나 듣거나 감지했다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 – 천사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로 하여금 천사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확신할 수 있게 할까? 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시편 34:7에서 그분은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말씀 외에는 내가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적인 믿음이다. 세상 사람은 “보는 것을 믿게 된다”는 표현을 쓰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믿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상황에 놓이거나, 우리의 상황이 변화가 없으므로 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겪게 된다. 그런 경우, 우리는 단순히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분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딛 1:2).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How Do We Acquire Faith?)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로마서 10:17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강조 추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뜻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때에만 그것을 믿을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듣거나 또는 읽어야 한다. 믿음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 믿음을 받도록 안수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며, 당신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겠다는 결단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믿음의 갖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성경은 아주 작은 믿음에서부터 산을 옮기는 믿음까지 여러 가지 믿음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믿음은 인간의 근육처럼 먹고 훈련하는 것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계속하여 우리의 믿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모든 일에 반응해야 하기 위해 믿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문제, 걱정과 우려를 대면하는 시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마 6:25-34; 빌 4:6-8:1; 벧전 5:7을 보라). 염려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믿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의 말과 행동도 그렇게 표현될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이 역경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행함으로써 기적을 경험한 예로 가득하다. 우리는 나중에 이 장에서 몇 가지 예를 볼 것이며, 다음 장에서는 영적 치유에 관해 고려할 것이다(기타 좋은 예들은 왕하 4:1-7; 막 5:25-34; 눅 19:1-10; 행14:7-10을 보라).

마음으로 믿는다(Faith is of the Heart)

성경적인 믿음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롬 10:10상)고 썼으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강조 추가).

당신이 머리로는 의심하지만, 마음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노력할 때, 육체적 감각과 사탄의 거짓말에 영향받은 우리의 지성은 의심의 공격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생각 대신 믿음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잘못된 믿음(Common Faith Mistakes)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훈련할 때, 때로는 원하는 것을 받는 데 실패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믿으려고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녀를 주실 것을 믿는 것은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근거로 삼을 수 있게 그 부분에 대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로부터 임신할 수 없다고 들은 한 부부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 대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아래의 두 약속을 붙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건강한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네가 복음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신 7:14).

이 약속은 자녀가 없는 부부들을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아들이나 딸을 낳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믿음이 효과적이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경계 내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만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보고, 우리가 그 약속에 따라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결정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내일 재림하시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말씀과 다른 어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분이 재림하실 날과 시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내일 재림하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우리는 죽은 신자들의 몸이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남은 자들도 같은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전에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왜냐하면,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 반대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사실, 바로 다음 구절은 계속하여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살전 4:17)진다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가장 먼저 받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당신은 사전에 나한테서 약속을 받지 않은 이상, 내가 내일 점심에 당신의 집을 방문 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약속의 근거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때문에 당신이 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한테 어느 성경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약속하셨는지 물어보라. 당신이 약속을 받지 못한 이상, 당신은 믿음에 대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Second Common Mistake)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부가된 모든 조건은 충족시키지 않으면서 약속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된다고 믿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스도인이 시편 37편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만 말씀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1-5).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실, 나는 위의 약속에서 적어도 8가지 조건을 셀 수 있다.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으며 우리의 믿음은 기초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빌립보서 4:19의 약속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러나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는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빌립보서 4:19의 약속의 문맥을 살펴보면, 당신은 그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약속은 구제함에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에게 쓸것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했으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마 6:33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과 관련된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돈에 관한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자격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았다고 하셨으며, 그들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순종적으로 드리면 축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말 3:8-12을 보라).

성경에서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이라고 믿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약속에 따른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세 번째로 흔한 잘못된 믿음(A Third Common Mistake)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매번 뭔가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적용되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2-24,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그들이 기도 응답을 보았을 때에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제 받을 것이라고 믿지 이미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고 기도할 때, 응당 이미 응답을 받았다고 믿고, 응답하여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응답하심을 본 가 아닌 보기 에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쓴 것처럼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과 일치하다. 예수님은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잘못을 범하는 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줄로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같은 것을 반복해서 간구할 필요가 없다.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번째 간구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같은 간구를 두 번 이상 하시지 않았는가?(Didn’t Jesus Make the Same Request More Than Once?)

물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 연속 같은 기도를 하셨다(마 26:39-44을 보라).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따라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라. 사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 번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을 알고 계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세 번의 같은 기도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켰다.

예수님의 그 같은 기도는 종종 모든 기도의 모범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일부 사람은 우리는 응당 모든 기도는 끝마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라,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아시는 것을 간구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예수님의 예를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믿음이 없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죄를 고백하오니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자기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성경에서 약속하셨음을 알고 있다(요일 1:9).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계시한 뜻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끝마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이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신 적은 그번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번도 예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아시면서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의 뜻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란 말로 기도를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하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간구하고 약속의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킨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간구한 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히 6:12). 사탄은 반드시 우리에게 의심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패배시키려 할 것이며,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정신이 전쟁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의 생각이 우리의 정신을 공격할 때, 우리는 단지 그런 생각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생각으로 바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사탄은 반드시 피하게 된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실례(An Example of Faith in Action)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준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 중 하나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3).

예수님의 제자가 전에도 갈리리 바다의 배에서 큰 풍랑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마 8:23-27). 그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제자가 믿음이 없음을 꾸짖으신 후 풍랑을 꾸짖으셔서 잔잔하게 만드셨다. 예수님은 제자가 배를 타기 전에 호수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막 4:35을 보라). 그러나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흔들리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가서는 그들이 다 죽을 거라고 믿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적어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은 그들 절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도록 보내셨다. 그분은 분명히 성령님의 인도 하심대로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도 분명히 그날 저녁 바람이 거스를 것임을 아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작은 도전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그 거스르는 바람 때문에 몇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밤새 갔다. 우리는 제자들의 인내심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이 단지 몇 일 전에 행하신 것을 보고도 바람이 잔잔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지나가려고 하셨다”(막 6:48)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적적으로 바다 위를 걸으시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신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혼자 대면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나는 어려움의 바람이 우리의 삶에 불어닥쳐 우리가 긴장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시는 자가 몇 번이나 우리 곁을 지나가셨는지 궁금하다.

믿음의 원리(Principles of Faith)

예수님은 베드로의 도전에 “오라”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만일 베드로가 이 말씀 전에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다면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의 근거가 되는 어떤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아닌 가정으로 걸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 다른 제자가 물 위를 걷기를 시도했더라도 모두 즉시로 빠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그분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베드로가 아니므로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며, 우리가 그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한 시점에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였다. 비록 몇 초 전에 유령의 공포 때문에 소리 질렀던 그가 첫걸음을 내 디딜 때에 머리로는 의심하였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믿음을 따라 행동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가 배의 돛대에 달라 붙어서 엄지 발가락을 물에 담가 보면서 물이 자신의 체중을 받아주는지를 실험했다면, 그는 절대로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기적을 경험하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간이 항상 있다. 때로는 짧고 때로는 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오감이 주는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시간을 겪게 된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잘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바람과 파도를 의식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걷기를 멈췄고, 다른 발작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적을 경험했던 그는 자신이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일단 시작한 일은 믿음으로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

베드로는 의심 때문에 물에 빠졌다. 사람은 종종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비난하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비난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하지만, 배로 무사히 돌아온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께로 조금 나아가기만 원하셨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베드로는 믿음을 잃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시지 않았지만, 곧 베드로에게 그분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베드로에게 그가 의심한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 베드로에게는 의심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함으로써 두려워하거나 걱정할만한 좋은 이유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인한 승리와 의심으로 인한 실패들로 가득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대부분의 동료들이 의심 때문에 광야에서 죽었지만,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민 14:26-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에도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눅 22:35을 보라).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적은 까닭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하였다(마 17:19-20을 보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고향 나사렛의 대부분 사람은 믿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병에 시달렸다(막 6:5-6을 보라).

그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나도 개인적으로 나의 믿음이나 의심에 따라 승리와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원한을 품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복잡한 신학적 설명을 찾아내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재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을 때, 나는 회개하고 다시 한 번 물 위를 걷기 시작한다. 나는 예수님이 항상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침륜하지 않도록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믿는 자는 축복을 받으나 의심하는 자는 축복을 받지 못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 그분은 믿음으로 충만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신다.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제 13 장 (Chapter Thirteen)

이혼과 재혼(Divorce and Remarriage)

이혼과 재혼의 주제는 종종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쟁 되고 있다.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그 논쟁의 근거가 된다. (1)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다면 언제 하셨는가? (2) 하나님이 재혼을 허락하셨다면 언제 하셨는가? 대부분 교단과 독립적인 교회들은 성경 말씀에 대한 그들의 특정 해석에 근거하여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에 대해 공식적인 교리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신념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의 신념과 그 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100% 성경적인 신념을 갖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난 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종래로 의도하시지 않은 부담을 사람들에게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나는 최선을 다하여 이 논쟁 주제에 관한 성경 말씀을 해석할것이며, 그것에 동의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당신이 결정하게 할 것이다.

먼저오늘날 전 세계에 만연해 있는 이혼에 대해 나도 당신처럼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더욱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역자를 포함한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난의 큰 비극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이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바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서로 결혼한 두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들은 결코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의 본이 되는 삶이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방법임을 알기에, 자신의 결혼을 든든히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25년이 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왔으며 전에 결혼한 적이 없다. 나는 절대 이혼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때문에 나에게는 자신을 위해서 엄격한 이혼 관련 말씀을 약화시키려는 동기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혼한 사람들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하고 있으며, 내가 나이가 어렸다면 나중에 유혹받아 이혼하고 싶은 여자거나 지금의 훌륭한 아내보다 나를 품어줄 수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나쁜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결국 이혼했을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결혼한 사람들이 내가 말한 것에 공감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혼한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이기에 자신의 결혼도 관리하지 못하고 이혼한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을 정죄하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우리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더 빨리 이혼했을 수도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은 아무도 궁극적으로 이혼할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아무도 이혼의 고통을 당해본 사람보다 이혼을 더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한 사람은 결혼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고, 이혼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은혜든지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심정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

나는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을 해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한 말씀들이 종종 다른 말씀들과 모순되게 해석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이 말씀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본 진리(A Foundation)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진리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가장 기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이혼에 대해 매우 반대하신다고 주장한다. 일부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와 이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6).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운 성품을 알거나, 이혼이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을 보라), 그분은 이혼을 미워한다.

일부 바리새인들이 어느 한 번 예수님께 “어떤 경우”에 이혼이 합법적인지에 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분의 응답은 이혼에 대해 반대하는 그분의 기본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분은 누구도 이혼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3-6).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두 가지 학파가 존재했다. 우리는 나중에 이 두 가지 학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지만, 지금은 그 중 하나는 보수파고 하나는 자유파라는 것만 알아두자. 보수파는 오직 매우 심각한 도덕적 이유가 있을 때에만 남자가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믿었다. 자유파는 남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기의 아내와 이혼할 수 있으며 심지어 아내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자를 찾은 것까지 포함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모순되는 신념은 예수님께 질문한 바리새인들이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남자와 여자가 일시적이 아닌 영원히 함께 있는 것임을 호소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두 성을 만드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게 하기 위함이며 결혼은 가장 주요한 관계라고 선언하였다. 결혼의 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 더 우위이다.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결합하게 된다.

또한, 남자와 아내의 성적인 결합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한 뜻에도 부합된다. 분명한 것은, 자손을 번식하는 이런 관계는 하니님께서 일시적으로 뜻하신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것이다. 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어조는 이런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자체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낸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그들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물론, 하나님은 누구도 어떤 방식으로든 죄를 짓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모두는 죄를 짓고 있다. 자비롭게도,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한 에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이혼을 의도하신 적이 없지만, 이혼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하다. 하나님은 첫 번째 이혼이나 그 후의 수백만 차례의 이혼에 놀라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께서 이혼을 미워하심을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이혼한 사람들에게 하실 말씀을 가지고 계신다.

태초에(In the Beginning)

이러한 기초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혼과 재혼에 대해 하신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탐구해 보도록 하자. 이혼과 재혼에 대해 가장 논쟁이 많은 성경 구절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같은 주제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통해 하신 말씀이 모순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변했거나 우리가 모세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혼과 재혼에 관해 하신 말씀부터 알아보자.

나는 예수님께서 이혼과 관련이 있다고 하신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이번에는 창세기의 기록에서 바로 읽어보도록 하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2-24).

이 말씀은 결혼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첫 번째 사람인 남자에게서 첫 번째 여자를 만드셨으며 그녀를 그 남자에게 영구적으로 데려왔다. 예수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짝지어준”(마 19:6, 강조 추가)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첫 번째 결혼은 이후의 모든 결혼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여성을 남성의 수만큼 만드시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에 끌리게 만드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혼인을 안배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비록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보다 더 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부부가 별도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축복을 찾는 것이었다.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는 것은 죄를 구성한다. 따라서, 성경의 두 번째 장부터, 어떠한 결혼에 대해서도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니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God’s Law Written in Hearts)

나는 또한, 창세기의 두 번째 장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본능적으로 이혼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경 지식이 없는 많은 이교도 문화에서도 혼인약속은 평생 지켜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썼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하나님의 윤리강령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졌다. 사실, 아담부터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양심을 통하여 윤리강령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은 모든 율법이다. 누구든지 이혼을 염두에 둔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대면해야 하며, 그가 양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혼하기 위한 정당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만일 그가 정당한 이유가 없이 이혼한다면, 비록 그가 잘 억제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양심은 그를 정죄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기원전 1440년쯤 이스라엘 사람에게 모세의 율법을 주시기 전 아담부터 스물일곱 세대가 내려오기까지, 이혼과 재혼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계시는 양심의 법이 전부였다; 하나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셨다(모세가 출애굽 할 때까지 창세기 2장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모세의 율법 이전의 노아의 홍수시대를 포함한 스물일곱 세대 동안, 수백 년 동안 수백만 개의 혼인 중 일부가 이혼으로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이혼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백하고 회개하면,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신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 같이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사람들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롬 4:1-12을 보라). 만일 아담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혼한 죄까지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제를 탐구하기에 앞서, 이런 의문이 든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이혼의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았지만, 재혼할 때(율법이 없으므로) 양심의 정죄를 받을까? 나는 단지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단지 이기적인 배우자 때문에 이혼 당한 죄 없는 이혼의 피해자들은 어떠할까? 그들의 양심은 그들이 재혼하는 것을 금지할까? 내 생각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만일 한 남자가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버렸다면, 버림받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재혼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The Law of Moses)

성경의 세 번째 책을 읽기까지 우리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모세의 율법에는 제사장과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 금지가 기록되었다.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라(레 21:7).

모세의 율법 중 아무 데도 이스라엘 평민에 대한 이런 금지는 없다. 또한, 그 인용된 구절은 (1) 이혼 당한 이스라엘 여성들이 있다는 것과 (2) 제사장이 아닌 이스라엘 남자가 이혼한 여자와 재혼하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에서 인용된 율법은 단지 제사장들과 제사장과 결혼하려는 이혼한 여자에게만 적용된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혼한 여자가 제사장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제사장이 아닌 남자가 이혼한 여자와 재혼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대제사장(또는 그리스도의 최고 대표로서)은 일반 제사장들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 생활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는 심지어 과부와 결혼할 수도 없다. 우리는 레위기에서 몇 구절 뒤 이런 말씀을 읽게 된다.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레 21:14).

이 구절은 모든 이스라엘 과부들이 재혼하는 것이 죄거나,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과부와 결혼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증명할까? 물론, 아니다. 사실, 이 구절이 어느 과부가 어느 남자와 결혼하든지 그 남자가 대제사장이 아니기만 하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과부가 재혼하는 것의 정당성을 확인해주고 있다(롬 7:2-3, 딤전 5:14을 보라).

이 구절은 또한, 우리가 앞에서 고려했던 구절(레 21:7)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제사장이거나 대제사장을 제외한) 이혼한 여자거나 심지어 처녀가 아닌 “부정한 창녀”와도 결혼할 수 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한 여자거나 “부정한 창녀”도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아닌 모든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비록 간음과 이혼을 매우 반대하시지만, 간음한 자와 이혼한 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은혜를 베푸셨다.

재혼에 대한 두 번째 특정 금지사항(A Second Specific Prohibition Against Remarriage)

하나님은 이혼한 여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두 번째 기회”를 주셨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이혼한 여자에게 단 한 번의 재혼의 기회를 주신다고 결론 내려야 하는가?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모세의 율법에서 이런 말씀을 읽게 된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렵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신 24:1-4).

이 말씀에서 유일하게 금지하는 것은 두 번 이혼한(또는 한 번 이혼하고 한 번 과부가 된) 여자가 그녀의 첫 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녀가 두 번째로 재혼함으로 인해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이혼(또는 두 번째 결혼에서 과부가 되었을 때), 첫 번째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그녀가(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임의의 남자와 재혼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만일 그녀가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분은 단지 “이혼한 사람은 재혼하지 못한다”는 말씀만 하시면 됐을 것이다.

또한, 만일 하나님께서 그녀가 두 번째로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그녀가 첫 이혼 후 결혼할 남자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세 번째로 결혼하는 것이 허락받았다면, 그녀가 두 번째 이혼 후 결혼할 남자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이 아닌 이상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혼은 미워하시지만, 이혼한 사람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자비를 베푸셨다.

요약(A Summary)

나는 지금까지 발견한 사실을 요약해 보겠다. 비록 하나님은 이혼에 대한 증오를 선언하셨지만, 그분은 구약전이나 구약 중에 재혼이 아래의 두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라고 밝히신 적이 없다. (1) 두 번 이혼하거나 한 번 이혼하고 한 번 과부가 된 여자가 첫 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과 (2) 이혼한 여자가 제사장과 결혼하는 경우이다. 또한, 하나님은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죄라고 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혼하는 이혼한 사람들과 이혼한 사람들과 재혼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신 것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간음하였다고 하셨다(마 5:32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혹은 모세의 뜻을 오해했거나, 하나님이 그분의 법을 바꾸셨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율법에 따라 천오백 년 동안 도덕적으로 수용되던 것을 갑자기 도덕적으로 죄가 된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명백한 모순을 더 완전하게 해결하기 전에, 나는 또한, 구약에 따라 재혼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이혼의 이유와 이혼 중에 느끼는 죄책감의 정도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종래로 어떤 이혼한 사람은 이혼 이유가 정당하지 않기에 재혼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종래로 어떤 사람은 이혼을 정당하게 했기에 특별히 재혼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 목사들은 일방적인 증언을 바탕으로 종종 이러한 판단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이혼한 여자가 그녀의 목사에게 자신은 이혼의 피해자이기에 재혼하도록 허락할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녀의 전 남편이 이혼한 것이고 그녀는 이혼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녀의 전 남편의 얘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다면, 그는 그 남편에게 다소 동정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잘못이 작지 않으며 일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혼 소송을 먼저 제기했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서로에게 이혼 소송을 하도록 부추기는 남편과 아내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혼을 한 후에 자기가 아닌 상대방이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함으로 두 번째 결혼을 정당화할 수 있기를 원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남편과 동침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남편이 외도가 나서 결국 이혼을 했다면, 하나님은 그녀를 칭찬하실 수 있을까? 그녀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혼의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신명기 24장에서 읽은 두 번 이혼한 여자의 사례에는 이혼의 정당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그녀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했다. 만일 그 “수치되는 일”이 간음이라면,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대로 그녀는 죽어 마땅하다(레 20:10을 보라). 그러므로 만일 간음이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이유라면,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아마도 이혼할만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그녀는 아마도 간음하였고, 마리아 남편인 요셉처럼 의로운 그는 그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마 1:19)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녀의 둘째 남편은 단지 “그녀를 미워했다”고 기록되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남편의 잘못인지 아내의 잘못인지를 알지 못하며 혹은 둘 다의 잘못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녀가 두 번 이혼한 여자를 받아주려는 남자와 재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다만 그 남자가 첫 번째 남편이어서는 안 된다.

반대 의견(An Objection)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유에 이혼했든지 이혼 후 재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말해 준다면, 그것은 그들이 불법적으로 이혼하는 것을 조장하는 것이 된다”고 사람은 종종 주장한다. 나는 그런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일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해 억제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정 순종하는 사람은 죄를 짓기 위한 방법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런 부류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든든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자유롭게 재혼하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법적인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고 더 죄를 지을까 봐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춰야만 한다. 다시 한 번,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좌우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어떠한 죄를 짓든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미 거듭났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다.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결혼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이혼으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에 하나 더 추가하실 필요가 없음을 아신다.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재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이혼하지 않게 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당신을 믿을지라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독신의 삶은 지속적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에 비하면 천국처럼 들릴 것이다.

재혼에 대한 바울의 입장(Paul on Remarriage)

우리가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모세의 율법을 조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모세에게 동의하는 한 명의 성경 저자가 더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쓰면서, 구약 성경의 말씀에 동의하였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 7:25-28, 강조 추가).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이혼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는 그 시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 결혼한 적이 없는 사람,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에게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혼한 사람이나 처녀가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바울은 이혼한 사람이 재혼하는 것에 대한 합법성을 논의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는 이혼한 사람이 그의 이혼에 대한 책임이 없어야만 재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하나님 외에 누가 이런 일을 판단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는 재혼은 이혼하기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단순히 재혼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혼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너그러운가?(Was Paul Soft on Divorce?)

바울이 재혼에 대해 은혜로운 정책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혼에 대해서도 부드럽다는 뜻일까? 아니, 바울은 이혼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그는 재혼에 대한 율법을 썼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혼에 대한 미움과 조화된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처럼 명하노라(고전 7:10-17).

바울은 먼저 신자와 결혼한 신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들은 당연히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이것은 그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에서 고려했던 모든 것에 동의힌다.

지금부터가 진짜 흥미로운 부분이다. 바울은 분명히 심지어 믿는 자들도 드물지만 이혼할 수 있음을 인식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바울은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은 독신으로 남아 있거나 원래의 배우자와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비록 바울이 아내들에게 이러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줬지만, 나는 이 가르침이 남편에게도 적용된다고 추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쓴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정하였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항상 순종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두 신자 사이에 이혼의 죄가 발생하면, 그는 더 자세한 가르침을 주었다.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한 사람은 독신으로 남아 있거나 원래의 배우자와 화합해야 한다. 신자들 사이에 이혼했을 경우, 이것은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들이 독신 상태를 유지할수록 화합할 수 있는 희망이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물론, 한 사람이 재혼하게 되면, 화합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은 없어지게 된다(그리고 분명한 것은, 만일 그들이 이혼함으로 인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면, 바울이 그들에게 독신으로 있거나 또는 화합하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당신은 바울이 이혼 신자들에게 준 두 번째 가르침이 항상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총명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진정한 신자들이 그의 첫 번째 가르침을 따라 이혼하지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이혼한 신자들에게 더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매우 드문 경우에만 두 번째 가르침이 필요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본 후 이혼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신자는 자신의 수치와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려는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화합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혼에 관한 현대 교회의 진짜 문제는 교회 내에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거짓 신자들의 비율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하나님이 불신자보다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신자들에 대한 기대가 더 높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우리가 읽다시피, 바울은 신자들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있어 그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다시 한 번, 이 가르침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성경에서 읽은 다른 부분과 완벽하기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혼을 반대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하여 믿지 않는 사람이 이혼을 원하면, 신자는 허락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불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불신자가 신자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불신자가 신자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불신자가 복음에 잠재적으로 열려 있는 좋은 표시거나, 또는 그 신자가 타락했거나 거짓 그리스인이라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이제 누가 불신자와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종래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이혼한 두 신자에 대해서도 재혼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불신자와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는 것을 반대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일까? 그러나 신자의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재혼에 대해 하신 말씀에 어긋난다.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 이것은, 다시 한 번, 나로 하여금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문제점(The Problem)

예수님, 모세와 바울은 모두 이혼은 이혼을 제기한 사람 또는 쌍방의 죄의 표심임에 동의한다. 그들 모두는 전반적으로 일관성 있게 이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재혼에 대한 모세와 바울의 주장을 예수님의 말씀과 조화시키겠는가이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므로 조화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정확히 살펴보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혼과 재혼의 주제에 관하여 두 번 말씀하셨는데, 한 번은 산상수훈 중에 하셨고, 한 번은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하셨다. 먼저 바리새인들과 나눈 대화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3-9).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바리새인들은 내가 전에 언급했던 모세의 율법, 신명기 24:1-4의 말씀을 인용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강조 추가).

예수님의 시대에, 무엇이 “수치되는 일”인지에 관해서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힐러라는 랍비가 수치되는 일이란 화해할 수 없는 차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무렵, 예수님께 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드러내듯이 힐러의 해석은 이미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데까지 자유로워졌다. 남편은 아내가 그의 저녁 식사를 태우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거나, 공공장소에서 무릎이 노출되거나, 머리를 깎거나, 다른 남자와 말을 하거나, 시어머니에 대해 나쁜 말을 하거나, 불임이여도 이혼할 수 있다. 심지어 남자는 자기의 아내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도 아내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여 이혼할 수 있다.

힐레 이전에 살았던 다른 한 명의 유명한 랍비는 삼마이다. 그는 “수치되는 일”은 간음과 같이 매우 부도덕한 일만 가리킨다고 가르쳤다. 당신이 의심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시대의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힐레의 자유로운 해석이 삼마이의 해석보다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합법적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살았으므로 그 당시 이혼은 매우 창궐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습관에 따라, 이혼할 때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Don’t Forget that Jesus’ was Speaking to Pharisees)

이런 배경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반대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앞에는 한 무리의 위선적인 종교 교사들이 서 있었으며, 그들 중 전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더 매력적인 이성 때문에 한 번 이상의 이혼을 경험하였다(나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간음의 형태인 음욕을 품는 것에 대해 경고하신 후 바로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켰다며 자신을 정당화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 자체가 그들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할 수 있음을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창세기 2장의 결혼에 대한 모세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어떤 이혼도 원하시지 않았으며 더욱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할 수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청소년들이 “애인”과 헤어지듯이 자기들의 아내와 이혼하고 있다!

나는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그 부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셨고 그들은 거기에 대한 항변거리를 이미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마 19:7).

이 질문은 다시 한 번 그들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모세가 남자들에게 그들의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면 이혼하라고 명령하고, 적절한 이혼 증서를 요구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신명기 24:1-4을 읽고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모세가 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는 단지 한 여자의 세 번째 결혼에 대해 규정하면서 그녀가 첫 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을 금지하였을 뿐이다.

모세가 이혼을 언급한 이상, 이혼은 어떤 이유에서는 허락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응답 중에 사용하신 동사 “허락“과 바리새인들이 질문 중 사용한 동사 “명하였나이까“를 주목하라. 모세는 이혼을 허락하였지 명하지 않았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자비로운 용인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그들이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고 음행을 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마음이 상할 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혼을 허락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원래 의도하신 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심지어 모세가 말한 “수치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인듯 싶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라”(마 19:0, 강조 추가). 하나님의 눈에는, 음행이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해할 것 같다. 한 남자나 여자가 그들의 배우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일이 무엇이겠는가? 한 사람이 간음을 하거나 정사가 있는 것보다 배우자에게 잔인한 것은 없다. 예수님이 “음행”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을 때 단지 간음만 가리키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배우자에게 정열적인 키스와 애무를 하는 것이 모욕적인 음행인 것과 같이, 포르노를 보고, 성적 도착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아내와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하고 재빨리 재혼하지만,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지 않는 이상 영원히 간음을 범했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잊지 말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간음과 다를 바 없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남자가 다른 여자가 결혼하기 위해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적법성의 탈을 쓴 간부의 소행임을 보아낼 수 있다.

해결책(The Solution)

예수님을 모세와 바울과 조화시킬 수 있는 핵심은 예수님은 단순히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재혼을 금지하는 법을 세우신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그분은 모세와 바울을 반대하시고 수많은 이혼한 사람들과 재혼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시는 것이 된다. 만일 예수님이 재혼에 관한 율법을 주셨다면, 예수님이 주신 율법을 듣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간음 관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성경에서 간음하는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한 것을 알면서도(고전 6:9-10을 보라), 그들에게 다시 이혼하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시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간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전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배우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중단하라고 말해줘야 하는가? 하지만, 바울은 결혼한 부부가 성관계를 서로 억제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권고는 성적인 유혹을 부추기고 심지어 전 배우자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조성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어떤 사람들이 제창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원래 배우자와 재혼하라고 말해 주겠는가? 이것은 신명기 24:1-4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혼하지 않은 이혼한 사람은 어떠한가? 만일 그들이 단지 그들의 전 배우자가 음행을 범했을 때에만 재혼하도록 허락받는다면, 누가 상대방이 실제로 음행을 범했는지를 결정하겠는가? 재혼하기 위해, 일부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가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음을 증명해야 하고, 또 그들의 전 배우자의 정사에 대한 증인을 찾아내야 하는가?

내가 전에 질문한 것처럼, 전 배우자가 성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음행을 범한 경우는 어떠할까? 성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은 사람이 재혼하는 것은 허락하고, 음행을 범한 사람의 재혼은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공평할까?

결혼 전에 간통을 저지른 사람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 사람의 간통은 그의 미래의 배우자에 대한 부정한 행위가 아닌가? 그 사람이 간통죄를 짓고 있을 당시 그 사람 또는 그 사람의 성행위 대상자가 이미 결혼한 상태라면, 그 사람의 죄가 간음에 해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결혼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다가 헤어진 경우는 어떠할까? 그들은 왜 헤어진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단지 그들이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들은 이혼한 후 재혼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전 것은 지나갔다”라는 것과 “새 것이 되었다”라는 사실은 어떠한가(고후 5:17을 보라)? 그것은 불법적으로 이혼한 죄를 제외한 모든 죄를 의미할까?

이상의 모든 질문과 그 외 많은 질문들은[1] 예수님께서 재혼에 관해 새로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물론 예수님은 정말로 재혼에 관한 새로운 율법을 주셨다면 그것의 파급 효과를 충분히 인식하셨을 것이다. 그것 자체는 그분이 단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는 음탕하고, 종교적이고,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함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이 그들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어떤 이유든지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이 간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들은 종래로 그런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관심가지신 것이 재혼의 성적 측면이었고, 성적으로 금욕만 할 수 있다면 재혼을 허락하신다고 결론지으려는가? 분명히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종래로 뜻하지 않으신 것을 말씀하셨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심사숙고한 비교(A Thoughtful Comparison)

이런 두 사람을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웃의 젊은 여자에 대해 음욕을 품기 시작한 이미 결혼한 종교인이다. 그는 곧 아내와 이혼하고 환상적인 그녀와 빠르게 결혼한다.

다른 한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다. 그는 종래로 복음을 들어 본 적이 없으며 죄악의 삶을 살다가 결국 결혼을 망쳐버렸다. 몇 년 후, 독신인 그는 복음을 듣고 회개함으로써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3 년 후, 그는 자신의 교회에서 만난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둘 다 열심히 주님의 뜻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면서 결혼을 결정한다. 그들은 결혼하였고,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주님과 서로를 섬기면서 살았다.

이제 우리는 두 사람이 재혼할 때 모두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보자. 둘 중에 누구의 죄가 더 큰가? 분명히,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간음을 범한 것과 같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어떠한가? 그는 정말 죄지은 것으로 보이는가? 그는 첫 번째 남자처럼 간음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에게 예수님이 이혼과 재혼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주며, 하나님은 그와 첫 번째 아내와 여전히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는 지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여자와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그가 간음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간음은 결혼한 사람들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림으로 범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이 더 매력적인 짝을 찾았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은 간음과 같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충성해야 할 배우자가 없기 때문에 간음을 범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이혼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단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과 역사적인 맥락으로 이해한보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모순되는,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덧붙여, 제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하신 응답을 들었을 때,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마 19:10).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영향력 속에서 성장했고 바리새인들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들은 종래로 결혼이 그렇게 영구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혼과 간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재빨리 결론 내렸다.

예수님은 아래와 같이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마 19:11-12).

이것은 사람의 성적 욕구 또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적인 요소임을 뜻한다. 심지어 바울은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라고 말하였다. 고자로 태어난 사람 또는 사람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은(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처첩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남자들을 거세한다) 성적인 욕구가 없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가 된 사람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 19:11)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자제력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던 청중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이고 교사인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영향 아래 자신의 삶을 보낸 사람들도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앞서 산상수훈에 대한 연구에서 배운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 중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정정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심지어 무리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20). 이것은 다시 말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간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실 때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서기관들”처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7:29).

예수님은 설교의 첫 부분에서 간음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음욕을 품거나,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 그분은 간음의 의미를 확대하여 간음이 단지 다른 사람과 결혼한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지은 죄뿐만이 아니라고 하셨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설교하시기까지 무리 중의 대부분 사람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이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했었음을 잊지 말라.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신 것이 훨씬 더 높은 기준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27-32).

우선 전에 내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음욕에 관한 말씀 뒤에 직접 따라옴으로써 어느 정도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놓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 을 간음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더욱 긴밀히 연결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 구절을 관통하는 문맥을 읽게 된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일곱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도록 도와주셨다. 그것은 바로 음욕을 품지 말고 이혼하고 재혼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분의 유대인 청중들은 모두 회당에서(아무도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유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계명을 들어보았을 것이며, 그들의 선생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삶 속에서 그 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도 관찰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고 말씀하셨지만, 그분은 새로운 율법을 추가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단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드러내려 하셨다.

첫째로, 음욕은 십계명에 의해 명확하게 금지되었으며, 십계명이 없다고 할지라도 음욕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것을 하려는 욕망은 잘못된 것임을 인식할 것이다.

둘째로, 창세기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은 결혼은 한 평생의 약속임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또한,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은 이혼과 재혼은 간음과도 같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특히 재혼하려는 의도로 이혼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 설교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이 음욕을 품는 것의 진실과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의 진실을 알도록 도와주신 것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적이 없는 재혼에 관한 새로운 율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극소수의 교회에서만이 눈을 빼어 내버리거나 손을 찍어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위배되며 단지 성적 유혹을 받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많은 사람은 재혼한 사람이 간음을 범한 것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많이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 예수님의 목표는 그분의 청중들이 진리를 직시하고 이혼을 줄이는 것이었다. 만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이 음욕에 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들은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음란한 행위가 없다면, 이혼을 위한 합법적인 근거가 없을 것이며, 하나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신 것처럼 사람은 더는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내로 간음하게 하는 것인가?(How Does a Man Make His Wife Commit Adultery?)

예수님이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라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서 재혼에 관한 새로운 율법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정당한 이유가 없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죄라는 진실을 밝히시는 것이다. 그는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였다.” 따라서 일부 사람은 예수님이 그녀의 재혼을 금지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된다. 강조점은 이혼하는 남자의 죄에 있다. 그가 한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는 재혼하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그녀는 남편의 이기심의 피해자로서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남자가 아내를 버림으로 하여 그녀는 재혼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그 남자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에 들게끔 강박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간음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기의 아내의 이중적인 간음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피해받은 아내를 간음죄로 정죄하셨다고 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피해받은 아내가 재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 그녀가 재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녀가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남자에게 그의 간음 그리고 그의 아내의 “간음”에 대한 죄를 물으실 것이다. 그 아내에게는 아무런 간음죄도 없으며 그녀의 재혼은 합법적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는 예수님의 그다음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예수님은 간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세 번째 간음죄를 추가하셨거나(비슷한 이유 때문에 그분은 두 번째 죄를 추가하셨다), 다른 한 가지는 한 남자가 “간음을 범하지 않고” 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가 자기의 남편과 이혼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간음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수 백 년 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간음을 범한 것이 된다. 사실, 그날 예수님의 청중들 중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남자들은 갑자기 조금 전만 해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던 일로 인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며, 예수님은 그 순간 하나님의 율법을 변경했음이 틀림없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앞으로 그런 결혼을 하는 것은 실제로 간음죄를 짓는 것이 된다.

성경의 일관적인 정신에 따라, 나는 이혼한 적이 있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존경한다. 만일 그녀가 죄 없는, 전 남편의 이기심의 피해자였다면, 나는 그녀와 결혼한 남자를 과부와 결혼하고 보살펴주는 남자를 존경하는 만큼 존경할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혼에 대한 질책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그녀와 결혼한 남자가 그녀의 가장 좋은 면을 믿어주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어 과거를 잊어주고 위험을 감수하려는 모습을 존경한다. 왜 성경을 읽은 적이 있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이혼한 적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신다는 결론을 내릴까? 이러한 관점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공의로운 하나님은 이 경우처럼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혼 당한 것이 아닌 여자와 같은 피해자를 벌하시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이 어떻게 회개한 죄인들에게 용서와 기회를 주는 복음에 부합되겠는가?

요약(In Summary)

성경은 이혼은 항상 일방 또는 쌍방의 죄를 포함한다고 일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무도 이혼하는 것을 의도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음란한 행위가 발생했을 때, 다행히도 이혼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드셨다. 그분은 또한, 이혼한 사람들이 재혼할 수 있는 규정도 만드셨다.

만일 재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성경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재혼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구약시대의 두 가지 극히 드문 경우와 신약시대의 한 가지 극히 드문 경우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과 이혼한 후 재혼하는 경우를 제외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조화시킬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예수님은 더 엄격한 율법으로 하나님의 재혼에 관한 율법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이 그런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그것은 엎어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격이다). 또한, 그것은 무제한 혼란을 빚어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른 율법을 어기게 한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분은 자신들은 절대로 간음을 범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간음을 범하고 있음을 보게 하셨다. 바로 그들의 음욕과 이혼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를 보게 하셨다.

전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용서는 죄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회개한 죄인에게 주어지며, 이혼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에게 두 번째, 세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 재혼은 신약에서 다른 신자와 이혼한 신자가 재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 경우 진정한 신자는 음행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에 이혼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으며, 이런 이혼은 절대로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극히 드문 경우에는 두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든지 다시 화합해야 할 것이다.

 


[1]예를 들어, 한 이혼 한 목사가 재혼할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단절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나는 아내와 이혼하기보다 차라리 그녀를 죽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살해했더라면, 나는 회개 할 수 있고, 용서를 받아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으며 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 12 장 (Chapter Twelve)

사역 속의 여성(Women in Ministry)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절반 이상이 여성 신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체 속에서 가진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교회와 사역 속에서, 여성들이 종종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에 귀한 일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여성의 역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교회에서 말씀과 예배 인도와 같은 특정 영역에서는 종종 제한을 받는다. 일부 교회는 여성 목사를 허용하지만, 많은 교회는 허용하지 않는다. 일부 교회는 여성이 가르칠 수 있게 하지만, 많은 다른 교회는 못하게 한다. 일부 교회는 여성이 예배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한한다.

대부분의 이러한 불일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4-35과 디모데 전서 2:11-3:7에 기록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말씀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이 말씀들은 우리의 연구 초점이 될 것이며 특히 이 장의 끝 부분에서 논의될 것이다.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

우리가 시작할 때, 성경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여자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자도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딤전 2:3). 우리는 나중에 바울이 설명한 창조순서의 중요성을 고려할 것이지며, 지금은 그것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 이전에 동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24-28을 보라), 아무도 동물이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1]

여자는 남편의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다(창 2:18을 보라). 이 점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열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그녀의 역할을 보여준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도록 주셨지만, 분명히 그분은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성령님은 우리보다 뛰어나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자를 그녀의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신 것은 남자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 시다(창 2:18을 보라). 이 진리는 역사 속에서 남자가 그를 돕는 아내를 잃고 혼자 남았을 때 셀 수 없이 많이 입증되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창세기에서 첫 시작부터 첫 번째 여자는 첫 번째 남자의 육체로부터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취한 것이며, 이것은 남자가 여자 없이는 무언가를 잃은 것이 되며, 그 둘은 원래 한 몸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 분리된 그들은 성적 결합을 통하여 다시 한몸이 되도록 의도되었으며, 이 성적 결합은 후대를 번식할 뿐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필요로 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서로 즐거워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창조에 관한 이런 교훈은 한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뛰어나다거나, 또는 한 성별이 다른 성별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혼과 사역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역할을 주셨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평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구약 사역 속의 여성들(Women in Ministry in the Old Testament)

이런 전제하에,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일부 여성들을 보도록 하자. 물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 그러셨던 것처럼 구약시대에도 주요하게 남성들을 사역 속에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 성경은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 요셉, 사무엘과 다윗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많은 여성들이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부르시고 사용하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런 여성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모든 위대한 남자들은 다 여자가 낳고 키웠음을 주목해야 한다. 요게벳이란 여자가 없었다면 모세가 있을 수 없다(출 6:20을 보라). 하나님의 다른 위대한 남자들도 모두 그들을 낳은 어머니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가 없다. 여성들은 하나님에 의해 중요한 책임과 칭찬받을만한 사역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의 자녀 양육이다(딤후 1:5).

요게벳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와 아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들의 누이인 선지자이자 예배 인도자인 미리암의 어머니이기도 하다(출 15:20을 보라). 미가서 6:4에서, 하나님은 미리암을 모세와 아론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구분하셨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강조 추가).

물론, 이스라엘에서의 미리암의 지도력이 모세처럼 지배적인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여선지자로서 미리암은 하나님을 대변하였으므로, 나는 그녀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단지 여성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성들에게도 향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여성 사사(A Female Judge Over Israel)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또 다른 여성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에 살았던 드보라였다. 그녀도 역시 여선지자이었고, 기드온, 입다, 삼손처럼, 그의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삿 4:5). 따라서 그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재판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한 여자가 남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명하였으며, 하나님은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기름을 부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부르신 대부분의 여성처럼, 드보라는 여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데 어려움을 가진 남성을 적어도 한 명은 분명히 직면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바락이었다. 그는 그더러 가나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 전쟁하러 가라는 드보라의 지시를 의심하였으므로, 드보라는 시스라를 죽이는 영광은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으며, 성경은 야엘이라는 여인이 장막 말뚝을 잠자는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았다고 쓰고 있다(삿 4장을 보라). 이 이야기는 바락이 드보라와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끝난다! 가사 중 일부는 드보라와 야엘에 대한 찬송으로 가득한데(삿 5장을 보라), 아마도 바락은 결국 “여성의 사역”을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 여선지자(A Third Prophetess)

구약 성경에서 존경받는 여선지자로 언급된 세 번째 여인은 훌다이다. 하나님은 한 남자 곧 곤경에 빠진 유다 왕 요시아에게 신뢰할 수 있는 예언적 통찰력과 가르침을 주시기 위하여 그녀를 사용하셨다(왕하 22장을 보라).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여자를 사용하신 예를 보게 된다. 훌다는 이런 사역에 자주 하나님께 쓰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요시아가 그녀가 한 말을 그토록 믿었을리가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미리암, 드보라와 훌다를 여선지자로 부르셨을까? 그분은 그들 대신 남자들을 부르실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은 남자를 부르셔서 그 세 여자가 했던 일을 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누구도 그 이유를 모른다. 우리가 이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역에 부르신 사람에 따라 임의로 그분을 틀안에 가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남성을 지도자로 선택하시지만, 때로는 여성을 선택하시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에 나온 이 세 명의 걸출한 여성 사역자들은 모두 여선지자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일부 구약 성경의 사역에서는 여성들이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여성은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남성만을 위한 일부 사역들을 떼어두셨을 수 있다.

 

신약 사역 속의 여성들(Women in Ministry in the New Testament)

흥미롭게도, 우리는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여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여인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며칠이 안 되어, 안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이 메시아심을 선포하였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6-38, 강조 추가).

안나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했음을 주목하라. 거기에는 물론 남성도 포함한다. 따라서 안나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남자들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께 예언의 은사로 쓰임 받은 다른 여성들이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 부류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눅 1:46-55을 보라). 교회 예배에서 마리아의 예언적인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한 여인이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많은 다른 방법을 통하여 하실 수 있었지만, 여자를 통하여 그분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여성에 대한 그분의 존중을 의심할 바 없이 드러내셨다.)

이런 여성들의 목록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줄 때 이스라엘의 아들과 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욜 2:28을 보라).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신약 시대에도 확실히 적용됨을 확인하였다(행 2:17을 보라).

우리는 사도행전 21:8-9에서 빌립 전도자가 여선지자인 딸이 네 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 모임에서 예언함을 썼다(고전 11:5을 보라). 문맥으로 보아 그 가운데 남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여선지자 또는 예언하도록 쓰임 받은 모든 여자들을 보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역에 여성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반대할만한 좋은 이유가 확실히 없다! 또한, 우리에게는 여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에게 예언할 수 없다고 생각할만한 이유도 없다.

여성 목사?(Women as Pastors?)

여성이 목사로 섬기는 것은 어떨까? 하나님께서 남성이 목사/장로/감독의 직분을 맡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한 듯 하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 3:1-2 강조 추가).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딛 1:5-6, 강조 추가).

바울은 여성이 직분을 갖는 것으로부터 금지되었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일괄론적으로 결론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특히 개발 도상국에 수많은 효과적인 여성 목사/장로/감독들이 있는 것 같다. 비록 그들은 여전히 압도적인 소수이지만 말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거나 또는 자격을 갖춘 남성 지도력의 부족할 경우 이 역할에 여성을 때때로 부르시는 것 같다. 오늘날 그리스도 몸 안의 많은 여성 목사가 실제로 여선지자와 같은 성경적으로 정당한 다른 사역직분에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 구조는 그들에게 단지 목회적인 역할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왜 목사/장로/감독의 직분은 남성에게만 주어졌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직분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목사/장로/감독에 대한 성경의 요구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4-5).

우리가 신약의 장로가 작은 가정교회를 감독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요구조건이 매우 합리적임을 보아낼 수 있다. 그의 역할은 가족을 감독하는 아버지의 역할과 비슷하다. 이것은 우리가 왜 목사 직분을 남자가 맡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가정교회는 가정의 구조와 매우 비슷하며,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하신 바라면, 아내가 아닌 남편이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나중에 더 설명할 것이다.

여성 사도?(Women as Apostles?)

우리는 결론적으로 여성이 여선지자로 섬길 수 있다고 확증하였다(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다른 유형의 사역들은 어떠할까?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역에서 섬긴 많은 여성들을 칭찬한 인사말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사도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아래의 세 개의 연속된 인용에서, 나는 여성의 이름들을 강조표기 하였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 16:1-2, 강조 추가).

얼마나 큰 보증인가! 우리는 뵈뵈가 어떠한 사역을 이루었는지를 정확히 모르지만, 바울은 그녀가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며 “여러 사람의 보호자”라고 하였다. 그녀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든지, 그것은 분명히 바울이 그녀를 로마의 전체 교회에 추천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다음 우리는 남편인 아굴라와 함께 중요한 사역을 함으로써 모든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브리스가(브리스길라)에 대해 읽을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라(롬 16:3-7, 강조 추가).

유니아는 “사도들 중 뛰어난 자”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도 사도였을 것이다. 만일 올바른 번역이 율리아라면, 그녀는 여성 사도이다. 브리스가마리아는 주님의 일꾼이었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롬 16:8-15, 강조 추가).

분명히, 여성도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여성 교사?(Women as Teachers?)

여성 교사는 어떨까? 신약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성경에는 남성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언급도 없다. 아굴라의 아내인 브리스길라(위에서 브리스가로 언급됨)는 적어도 작은 규모의 가르침 사역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그녀와 아굴라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완전하지 못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행 18:26). 아무도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을 도와 남자인 아볼로를 가르쳤다는 것에 반박할 수 없다. 또한, 바울은 성경에서 두 번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 대해 쓰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둘 다 언급하였으며(롬 16:3-5, 고전 16:19을 보라), 로마서 16:3에서 그들 둘을 “그리스도 안의 동역자”라고 불렀다.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을 따라 사역에서 일부 적극적인 역할을 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남자를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경우(When Jesus Commanded Women to Teach Men)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여야 하고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바울의 말을 보기에 앞서 먼저 성경의 다른 한 말씀을 읽어 보는 것이 우리가 그 부분을 균형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한 천사가 적어도 세 명의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남성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위임하였다. 그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도록 지시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가 갈릴리로 가도록 지시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10; 막 16:1-7).

우선, 나는 예수님이 먼저 여자에게 나타나시고 다음 남자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는 것이 근본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면, 사람은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 여자가 남자에게 가르치라고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일은 절대 하찮은 일이 아니며, 그분께서 직접 전달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그리고 실제로 나중에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아무도 아래와 같은 사실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일부 여자들이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일부 남자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도록 지시하셨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The Problem Passages)

 

이제 우리는 많은 성경 구절이 말씀하는 사역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였으므로 바울이 쓴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을 더 잘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그의 말을 생각해 보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 14:34-35).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 사람은 이 말씀이 바울의 실제 가르침인지 아니면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쓴 내용을 그가 인용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서신의 후반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기한 질문에 응답한 것이 분명하다(고전 7:1, 25; 8:1; 12:1; 16:1, 12을 보라).

또한, 바로 그다음 구절에 쓴 내용은 바울이 교회의 여성은 잠잠해야 한다는 고린도 교회의 정책에 대한 그의 반응으로 간주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6).

제임스 성경은 아래와 같이 번역함으로써 바울이 고린도인들의 태도에 더 놀라있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나왔느냐 아니면 너희에게만 이르렀느냐(고전 14:36).

어느 경우에나, 바울은 분명히 두 개의 수사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그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아니“이다. 고린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창시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그들에게만 주신 것도 아니다. 바울의 질문은 그들의 자부심을 겨냥한 질책임이 분명하다. 만일 앞의 두 구절에 대한 반응이 아래와 같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누구를 통하여 말씀하실지를 언제부터 규정하기 시작하였는가?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신다면 여성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당신이 그들을 잠잠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 같은 해석은 우리가 바울이 이미 같은 서신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잠잠할 수 없게 하는 것인 예언함에 대해 쓴 것(고전 11:5을 보라)을 고려해보면 논리적이 돼 보인다. 또한, 그 후로 몇 구절 뒤에서, 바울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고린도인들이[2] “예언하기를 사모하기”를 촉구하였다(고전 14:39).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14:34-35에서처럼 실제로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기를 주장했다면, 그는 자아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가능성(Other Possibilities)

하지만, 우리가 잠시 동안 고린도전서 14:34-35이 확실히 바울이 한 말이 맞고, 그는 여자들이 잠잠하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한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시 한 번, 우리는 바울이 같은 서신에서 여자들이 분명히 교회의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왜 그들에게 교회 모임에서 완전히 잠잠하라는 일괄적인 명령을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많은 성경적인 사례에서 보아왔듯이 하나님은 여성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심지어 남성에게 선포하심을 이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왜 하나님께서 종종 기름 부으셔서 말하게 했던 자들을 완전히 잠잠하게 했겠는가?

상식적으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모임 때마다 완전히 잠잠하라고 했을 리가 없다. 초대 교회는 가정집에서 모였고 함께 식사를 나눴음을 명심하라. 우리는 여자들이 모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들이 음식을 준비하거나 식사하는 동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다.

만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이 그들 중에 계신다면(마 18:20), 그들은 확실히 교회 모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두 여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을 때 서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 만일 고린도전서 14:34-35 말씀이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이라면, 그는 단순히 교회의 질서에 관한 작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질문함에 있어서 질서가 없었다. 바울은 여성들이 전체 모임 중에 완전히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몇 구절 이전에 선지자들에게 유사한 지침을 줄 때에도 그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30, 강조 추가).

이 경우 “잠잠하라”는 단어는 “일시적으로 말하기 삼가라”는 뜻이다.

바울은 또한, 사람들에게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삼가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강조 추가).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전체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완전히 잠잠하라고 지시하였는가? 아니, 그는 그들이 통역이 없을 때 방언을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여자들에게 준 가르침과 같다. 그럼 왜 우리는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을 “전체 모임 중에 잠잠해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바울이 교회에서 질서없이 방언을 하는 자들에게 한 말을 “모임의 특정 순간에 말하기를 삼가라”는 뜻으로 해석하는가?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구절에서 모든 여성을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의 말은 오직 결혼한 여성에게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질문이 있을 경우 “자기 남편에게 물어보라”라고 지시받았기 때문이다.[3] 아마도 질문의 일부 또는 전부는 기혼 여성들이 자기들의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들의 남편에 대한 불경과 불순종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바울이 제기한 문제라면, 그것은 곧 바울이 왜 자신의 주장을 창세기부터 다방면으로 계시된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여자들은(분명히 그들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이유이다(고전 14:34을 보라).

요약하면, 만일 바울이 실제로 고린도전서 14:34-35에서, 여자들이 잠잠할 것에 관하여 지시하였다면, 그는 단지 기혼 여성들이 부적절한 때에 또는 그들의 남편을 불경하는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예언하고, 기도하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The Other Problem Passage)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 쓴 첫 번째 서신에 기록된 두 번째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을 보도록 하자.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1-14).

바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와 여자에게 그분의 뜻을 효과적으로 가르친 네 명의 여선지자 미리암, 드보라, 훌다와 안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인 드보라가 남자와 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오순절 날 자기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심으로써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여성들이 남성 사도들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위임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쓴 서신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에 대해 찬성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들 중 누구라도 다른 지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을 성령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말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고전 14:26을 보라). 그렇다면 그가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쓸 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근거로 창세기에서 두 개의 관련된 사실을 인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1) 아담은 하와 이전에 지음을 받았고 (2) 아담이 아닌 하와가 속은 것이며, 그녀는 죄에 빠졌다. 첫 번째 사실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세워준다. 창조의 순서에 따라,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듯이 남편은 머리가 된다(고전 11:3; 엡 5:23-24을 보라).

바울이 언급한 두 번째 사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쉽게 속는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도 쉽게 속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지체 중에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는 사실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속임당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오히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에 세운 하나님의 의도된 질서가 무시 될 때, 사탄이 틈을 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전체 문제는 에덴동산에서 한 남자와 그의 아내 사이의 관계가 질서를 잃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의 아내는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아담은 그의 아내에게 금지된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알려주었음이 틀림없다(창 2:16-17; 3:2-3). 하지만, 그녀는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가 아담에게 금지된 열매를 주어서 먹게 했을 때, 그녀는 모종 의미에서 아담의 권한을 넘어섰다(창 3:6을 보라). 그 경우 아담이 하와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와가 아담을 인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교회 – 한 가정의 모델(The Church–A Model of the Family)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된 질서는 마땅히 교회에 의해 보여져야 한다.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 역사상 첫 300년 동안, 교회의 회중 수가 적었다는 점을 유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집에서 만났다. 목사/장로/감독은 가정의 아버지와 같았다. 이런 하나님이 의도한 교회 구조는 가정 구조와 매우 닮았으며, 사실상 영적인 대가정이었으며, 만일 여성이 주도한다면 가정의 내부 및 교회의 외부에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여성 목사/장로/감독이 정기적으로 가정교회에서 가르치고, 그녀의 남편은 순종적으로 그곳에 앉아 그녀의 가르침을 듣고 그녀의 권위에 복종한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며 잘못된 본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바울의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 말들이 장로에 대한 그의 요구 조건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음을 주목하라. 그 중 한 요구조건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1-7을 보라). 또한, 장로들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쳐야 함을 주목해야 한다(딤전 5:17을 보라).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며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 바울의 말은 분명히 교회에서의 올바른 질서와 관련이 있다. 그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여자가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장로/목사/감독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 또는 아내가 자기의 남편에게 순종하면, 기도하고, 예언하고, 간단한 가르침을 받고 지체들과 나누거나 교회 모임 중에 일반적인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여자가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듯이 교회에서도 할 수 있다. 여자가 교회에서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은 그녀가 집에서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과 다를 바 없다 – 바로 그녀의 남편을 주관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의 성경 구절에서 여자들도 남자처럼 집사의 직분으로 섬길 수 있음을 알게 된다(딤전 3:12을 보라). 교회에서 집사, 또는 단어의 실제 의미인 일꾼으로 섬기려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세운 하나님의 신성한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가 디모데 전서 2:11-14의 바울의 말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아왔던 하나님께 쓰임 받은 여성들은 아무도 가정과 교회에서 모델 역할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하나님의 의도하신 질서를 위반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정에서 남편을 주관한 아내의 잘못된 모델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여러 가정이 모인 가정교회 모임에서 아내는 가르치고 감독하는 것을 책임진 한편, 남편은 수동적으로 앉아 그녀의 지도력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정을 향한 그분의 질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것이나, 안나가 그리스도에 대해 남자들에게 말한 것이나, 마리아와 그의 친구들이 사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한 것 중 아무것도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거나 부적절한 방식으로 가정에 세우신 하나님 질서를 위반한 적이 없다. 정기적인 교회 모임 중에 만일 여성 또는 아내가 권한을 행사하고 정기적으로 남성 또는 남편을 가르칠 경우 잘못된 메시지를 전파할 위험이 존재한다.

결론(In Conclusion)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여성들이 열심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잘못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도덕적 또는 윤리적 원칙을 위반하였는가?”라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곧 유일하게 가능한 경우가 여성의 사역으로 인해 왠지 모르지만,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 한 경우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들” 모두에서 바울은 결혼의 신성한 질서를 우려의 근거로 호소했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들이 사역함에 있어서 매우 작은 의미에서만 제한받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여성을 사용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은 이미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해오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여성의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말씀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중 일부를 이미 알아보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일부는 여자였고(요 11:5를 보라),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눅 8:1-3 을 보라). 성경에는 남자가 이런 일을 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사마리아의 우물곁에 있던 여자는 그녀의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함으로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 4:28-30, 39을 보라).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그분께 향유를 부은 것도 여자였으며 어느 남자가 그녀에 대해 불평할 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해 주셨다(막 14:3-9을 보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의 거리를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예수님을 위해 울었던 것도 어느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과 그와 비슷한 사례들은 마땅히 많은 여성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명하신 사역을 성취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여성이 필요하다!

 


[1]우리는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아담 이후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가 낳았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1-1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담 이후의 모든 남자들은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이 신성한 질서가 남자가 그들의 어머니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2]바울의 권면은 “형제들”에게 한 것인데, 그는 “형제”란 용어를 고린도전서에서 27번 사용하였다. 때문에 “형제”란 이 용어는 분명 남자뿐만이 아닌,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3]헬라어 원문으로 여자아내, 또는 남자남편은 같은 단어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문맥으로부터 저자가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남편과 아내를 말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고려한 구절은 바울은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만이 집에서 남편에게 아무것이나 물을수 있기 때문이다.

제 11 장 (Chapter Eleven)

성령세례(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초대교회에서의 성령님의 역사가 기록되었다. 만일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제거한다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천하를 어지럽게”할 권능을 주셨다(행 17:6을 보라).

오늘날 전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빠르게 확장되는 지역을 보면, 그곳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성령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능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다. 성령님은 십 초 동안에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만 년 동안에 이룬 일보다 더 많이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가 성경이 신자의 삶과 사역에서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사역할 수 있는 힘을 받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가능하다면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그들이 체험한 것을 우리도 체험하고, 그들이 즐겼던 성령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우리도 즐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비록 일부 사람은 이러한 기적적인 성령님의 역사는 초대 사도시기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어떠한 성서적, 역사적 또는 논리적인 근거도 찾지 못했다. 그것은 불신 때문에 생긴 이론이다.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신자들에 속한다.

성령님의 두 역사(Two Works by the Holy Spirit)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의 속사람, 또는 영은 성령님에 의해 거듭났으며(딛 3:5을 보라), 성령님은 지금 그의 안에 거하신다(롬8:9, 고전 6:19을 보라). 그는 “성령으로 난”(요 3:5) 사람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해야만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오류임이 분명하다. 많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가 아닌 신자들에게는 일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 신자들보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관한 증거가 더 많다! 그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없이는 맺을 수 없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열거한 성령의 열매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여 그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으로 난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별개의 경험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구원받지 못한 여자에게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 13-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주하시는 생수가 믿는 자들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나중에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생수”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셨는데 그분께서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강조 추가).

이 경우에 예수님은 생수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생수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면에서 흐르는 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이 두 유사한 구절은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은 주요하게 거듭난 사람에게 혜택을 주며,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의 안에는 그에게 영생을 주는 성령님이 거하시게 된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할 수 있게끔 장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생수의 강”은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며,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준다.

왜 성령세례가 필요할까?(Why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Needed)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역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가 바로 전 세계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 강조 추가).

누가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강조 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은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본질적으로 무력해지고 그분이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할 줄을 아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 초자연적으로 쓰임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특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경험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때로는 자기들도 모르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사람은 자기가 복음 전도와 같은 특정 사역에 부르심을 받고 구체적인 은사를 가졌음을 발견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셔서 성령님의 다양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경험은 철저하게 성경적이다. 그들의 경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그분께서 성령님에 대한 경험을 본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분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을 때 성령으로 낳으셨다(마 1:20을 보라). 성령으로 낳으신 그분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으셨다(마3:16을 보라). 만일 예수님도 사역을 위해 성령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장비하셔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필요할까?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The Initial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Spirit)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은 후 경험하게 되는 초기 증거는 그가 성경에서 “새 방언” 또는 “다른 언어”로 불리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아래에 그것들을 살펴보자.

먼저, 예수님은 승천하기 전 마지막 순간에, 믿는 자들을 따르는 표적 중 하나가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5-17, 강조 추가).

일부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어떤 신약 성경의 고대 사본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성경 속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 고대 사본은 그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내가 읽어본 어떤 영어 번역본도 그것을 생략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이 구절들 속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경험과 완벽하게 관련된다.

사도행전에는 신자들이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받은 다섯 가지 사례가 있다. 이 다섯 가지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지속적으로 물어볼 것이다. (1)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후에 경험하는 것인가? (2)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 방언을 말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신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Jerusalem)

첫 번째 예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120명의 제자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은 사건이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강조 추가).

이 120명의 신자들이 그 시간 전에 이미 구원받고 거듭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 성령세례를 경험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시간 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날까지 교회에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함께 따라온 표적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마리아(Samaria)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두 번째 예는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된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파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행 8:12-16).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은 후 성령세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차적 경험이었다. 성경은 명백하게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복음을 믿고 물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내려왔을 때, 성경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하였는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시몬이라 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을 안수했을 때 일어난 일을 보고, 그는 그들에게서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돈 주고 사려고 하였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 8:17-19).

시몬이 그토록 인상 깊게 본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낫는 등 많은 다른 표적들을 보아왔다(행 8:6-7을 보라). 그 자신도 이전에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행 8:9-10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할 때 그가 본 것은 굉장히 놀라운 광경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틀림없이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행전에서 매번 그리스도인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 나타나는 현상인 – 방언을 말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메섹에서의 사울(Saul in Damascus)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언급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나중에 사도 바울로 알려진 다소 사람 사울이다. 그는 자기가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구원받았다. 그가 회심한 후 사흘 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를 찾아간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7-18).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기 전에 사울이 이미 거듭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 예수님을 믿었으며, 즉각적으로 새로운 주님의 지시를 따랐다. 또한, 아나니아 사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불렀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그가 온 것은 사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음을 유의하라. 따라서 사울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 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구원받은지 사흘 후에 발생했다.

성경은 사울이 성령세례를 받은 실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이 있던 집에 도착한 직후에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사울이 어느 시점에 다른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나중에 고린도전서 14:18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가이사랴(Caesarea)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네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발견된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전파하자, 그의 모든 이방인 청중들은 바로 믿음으로 응답하였으며, 성령님이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행 10:44-48상).

이 경우에, 예수님을 믿은 첫 이방인들인 고넬료의 가족들이 동시에 거듭나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의 상하문을 검토하고 역사적 맥락을 연구해 보면, 왜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안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했으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고넬료 가족이 성령세례를 받도록 기도해 준적도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주권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이 고넬료 가족들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을 무엇으로 확신 했을까? 누가는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임이러라”(행 10:46)고 썼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120명 같이 성령을 받았다고 선언했다(10:47을 보라).

에베소(Ephesus)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다섯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9장에서 발견된다. 에베소에 와서 사도 바울은 일부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신약 서신서의 대부분을 쓴 사람으로서 바울은 분명히 모종 의미에서 성령을 받지 않고도 예수님를 믿는 것이 가능함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그런 질문을 할 리가 없다.

그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이 계심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을 통해 단지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만 들어봤다.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물 세례를 다시 베풀었으며, 이번에 그들은 진정한 기독교의 세례를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게끔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5-7).

이 열두 사람이 바울을 만나기 전에 거듭났는지 여부를 떠나서, 성령세례는 구원을 받은 후에 받는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다시 한 번, 그들의 성령세례를 따랐던 표적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이 경우에는 예언도 하였다).

평결(The Verdict)

이 다섯 가지의 실례를 검토해 보자. 그 중 최소한 네 가지 중 성령세례는 구원 이후에 발생한 경험이었다.

그 중 세 가지에서, 성경은 명백하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 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아나니아와 바울의 만남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바울의 경험은 실제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결과적으로 방언을 말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네 번째 실례이다.

나머지 사례에서,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성령을 받을 때 뭔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왜냐하면, 시몬이 성령을 줄 수 있는 권능을 갖기 위해 돈 주고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거는 매우 분명하다. 초대 교회에서, 거듭난 신자들은 성령님에 관한 두 번째 경험을 하였고,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이 새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모든 거듭난 사람은 또한, 성령님의 또 다른 역사인 성령세례를 받게 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또한, 모든 신자는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다른 방언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How to Receive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모든 하나님의 선물처럼, 성령도 믿음으로 받는다(갈 3:5을 보라). 성령세례를 받을 믿음을 갖기 위해서, 신자는 반드시 먼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해야 한다. 만일 그가 의심하거나 믿지 못한다면, 그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다(약 1:6-7을 보라).

어떤 신자도 성령을 받는 것이 그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할 좋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예수님의 이 약속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또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구원 이후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오직 하나님을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여기는 사람들) 성령을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만일 신자가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이 구원 받는 순간 거듭날 때가 전부라면, 예수님의 이 약속은 무의미 하게 된다. 현대 신학자들과는 달리, 이미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믿으셨다.

예수님에 따르면, 한 사람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의 아버지여야 한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면 하나님은 곧 당신의 아버지이다. 둘째,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께 성령을 구해야 한다.

비록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성경적이지만(행 8:17; 19:6을 보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기도하던 자리에서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단순히 구하고, 믿음으로 받으면, 성령님이 그에게 주시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반적인 두려움(Common Fears)

어떤 사람은 그들이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 악령에 노출될까 봐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거는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 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 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1-13).

우리가 성령을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무엇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사람은 그들이 다른 방언을 말할 때, 성령님이 주신 초자연적인 언어보다는 단지 무의미한 언어를 만들어 낼까 봐 우려한다. 그러나 당신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확실한 언어를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에, 당신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당신의 입술, 혀와 성대를 사용해야한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성령님은 당신을 대신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 그분은 단지 당신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지 일꾼이 아니다. 당신은 반드시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강조 추가).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강조 추가).

신자가 성령의 선물을 구한 후, 그는 방언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며 또한, 기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믿음으로 받기에, 받는 사람은 특정 감정이나 신체적 감각을 체험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그의 입을 열고 성령님이 그에게 말하게 하신 언어로 새로운 소리와 음절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 신자가 믿음으로 말하지 않는 한, 어떤 말도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다. 그는 반드시 말해야 하며, 성령님은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다.

말씀의 원천(The Source of the Utterance)

바울에 따르면, 신자가 방언기도를 할 때, 그의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기도한다고 한다.

내가 만일 방언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바울은 자신이 방언기도를 하면 그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뜻인즉 그의 마음은 방언기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는 방언기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줄곧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언어로,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에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방언으로 찬송했을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도 찬송하였다. 이 두 가지 기도와 찬송은 각기 적합한 상황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바울의 균형 잡힌 모범을 따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제어하듯이 방언도 자기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었음을 유의하라. 그는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종종 현대적인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님의 선물이라면, 사람은 방언 말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지배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근거가 없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처럼 현대와 고대의 방언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비평가들은 또한, 사람의 두 손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기에 사람은 그것에 대한 제어권이 없으며, 사람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시도와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 일단 성령세례를 받고 나면, 방언이 마음이 아닌 영에서 나옴을 자신한테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을 읽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를 시도해보라. 당신은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면서 방언도 계속적으로 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마음으로 방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방언은 당신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당신은 영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마음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Now That You Are Baptized in the Holy Spirit)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신 주요 이유를 명심하라 – 당신으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나타내는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권능을 주시기 위함이다(고전 12:4-11; 갈5:22-23을 보라). 하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그분의 사랑, 희락, 그리고 화평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그분께로 인도하실 것이다. 방언할 수 있는 능력은 내면으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의 일종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임을 기억하라(행 1:8을 보라). 우리는 다른 방언으로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언어가 멀리 떨어진 부족 또는 외국 국가의 모국어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매번 방언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어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될수록 방언을 많이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적 거장인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썼다. 그는 이 말을 방언을 많이 하는(비록 늘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하는) 교회에 썼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하였음이 틀림없다.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감찰하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 5:17에서 가르친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바울은 또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가르쳤다(고전 14:4을 보라). 그것은 방언이 우리를 영적으로 세워간다는 의미이다. 방언기도를 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영적인 삶을 풍성하게 해야 하며, 단지 처음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의 일회적인 경험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일단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나는 당신이 날마다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당신의 새로운 언어로 기도하기를 권장한다. 그것은 당신의 영적인 삶과 성장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몇 가지 일반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s to a Few Common Questions)

우리는 방언을 말한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나는 내가 사람들이 성령세례 받기를 위해 기도할 때 항상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를 기대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중 아마 95%는 내가 기도한지 몇 초 내에 방언을 받게 된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인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세례 받기를 기도한 그리스도인이 방언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믿음으로 받으며 방언은 자원적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성령세례 받기를 기도했으나 방언으로 말한 적이 없는 신자와 교제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먼저 그에게 이 주제에 관한 사도행전의 모든 말씀을 보여줄 것이다. 그다음에 나는 또한, 그에게 바울이 방언을 말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썼음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바울처럼, 내가 원할 때 수시로 방언으로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내가 원한다면 영원히 방언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령세례를 받고도 성령님과 동역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방언을 말할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나는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했지만, 방언을 말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과 교제할 때마다, 나는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또한, 그렇다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그에게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서 하는 일이 아님을 설명해 준다. 나는 성령님이 말씀을 주시지만, 우리가 자기의 언어로 말을 할 때와 같이 우리도 반드시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다음에 나는 그 사람이 성령님과 동역하여 방언을 말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게 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Didn’t Paul Write that Not All Speak with Tongues?)

바울의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는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아니”이며, 그것은 반드시 신약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어야 한다. 그의 질문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나타나는 영적 은사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전 12:11을 보라). 바울은 특별히 “각종 방언 말함”(고전 12:10)은 반드시 항상 방언을 통역하는 영적 은사와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고 썼다. 이 특별한 은사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서 아무런 통역도 없이 공개적으로 했던 방언의 은사가 아니다. 우리는 왜 성령님이 공중 집회에서 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주시면서 다른 한 사람에게 통역의 은사는 주시지 않는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답은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무언가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 된다.

고린도 신자들은 예배시간에 통역이 없이 방언기도를 큰소리로 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두 가지 용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그런 방언기도의 용도는 통역이 동반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가 한 방언의 내용을 항상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통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대중 집회를 위한 방언의 용도도 있는데, 그것은 항상 통역의 은사를 동반한다. 그것은 성령님이 그분의 뜻을 따라 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줄 때 발생한다. 그 사람은 대중적으로 방언하게 되며, 그다음에 통역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셔서 사용하시지 않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갑지가 방언을 받고 사용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가르침과 바울의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을 조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바울처럼,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이나 나 자신이나 누구도 우리가 방언을 말할 때마다, 그것이 “오직 성령님의 뜻”대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뜻대로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하는 방언은 오직 “성령님의 뜻”에 따라 하는 방언의 은사일 수 없다. 또한, 바울은, 나처럼, 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였으므로, 그것은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쓴 항상 통역의 은사를 동반한 방언의 은사일 수 없다.

내가 대중 집회에서 방언을 말한 적은 매우 드물다. 비록 내가(고린도 신자들이 했던 것처럼) 원할 때마다 교회에서 어떤 통역도 없이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할 수 있지만, 나는 성령님의 감동이 있을 때에만 그렇게 하였다. 내가 성령님의 감동을 감지했을 때마다, 항상 통역이 있음으로 하여 지체를 세워갔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때문에 고린도전서 12:30에 기록된 바울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인하여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사람은 그들의 해석과 조화되지 않는 다른 많은 성경 말씀들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의 오류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놓치고 있다.

제 10 장 (Chapter Ten)

새 생명(The New Birth)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들이 “거듭났다”고 한다. 거듭났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이 장에서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거듭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된다. 성경은 우리가 단지 육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라고 말씀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이렇게 썼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희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강조 추가).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영, 혼, 몸 세 부분으로 구성된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성경에는 이 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에 근거하여 그들 사이를 구분 지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을 우리의 육적인 존재 – 육체, 뼈, 혈액 등으로 보고, 우리의 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적인 존재 – 우리의 마음으로 본다. 우리의 은 분명히 우리의 영적인 존재 또는 사도 베드로가 묘사한 것처럼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으로 볼 수 있다.

육적인 눈으로는 영을 볼 수 없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존재의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모두 영적인 존재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죽으면 몸은 기능을 중단하나 영과 혼은 계속하여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몸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며(히 9:27을 보라), 심판 후에는,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결국, 모든 사람의 영과 혼은 부활 시에 자신의 몸과 다시 재결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에 대한 더 자세한 정의(The Human Spirit More Defined)

베드로 전서 3:4에서, 베드로는 영을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영도 사람임을 나타냈다. 바울 역시 영을 “속사람”으로 표현하며, 인간의 영은 단지 개념이나 힘이 아닌 한 사람임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강조 추가).

“겉사람”은 분명히 육적인 몸을 설명한 반면, “속사람”은 영에 대한 정의이다. 몸은 날로 낡아지지만, 영은 날로 새로워진다.

바울이 몸과 영을 모두 사람이라고 한 점을 다시 유의하라. 따라서 당신이 자신의 영을 상상할 때 영적인 구름 따위는 상상하지 말라. 당신과 같은 형상을 가진 사람을 상상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몸이 늙었다고 해서 당신의 영도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말라. 자신이 가장 혈기왕성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라, 왜냐하면, 당신의 영은 영원히 늙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면 당신의 영도 거듭나게 된다. 당신의 영은 하나님의 성령님과 합하여 지며(고전 6:17을 보라), 성령님은 당신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해준다(롬 10:14을 보라).

성경은 하나님이 영이시라고(요 4:24을 보라) 가르치며, 천사와 마귀도 영이다. 그들은 모든 형태가 있으며 모두 영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영적 세계를 감지하려는 것은 손으로 라디오 신호를 느끼려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육체적 감각으로 객실 안의 라디오 전파를 감지할 수는 없다고 해서 라디오 전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라디오를 켜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영적인 영역에도 해당된다. 육체적인 감각으로 영적인 영역을 감지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영역은 분명히 존재하며,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그들도 영적인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 사탄과 관련되어 있거나(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경우), 또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그들이 거듭난 경우). 일부 심령술사들은 자신의 영을 통해 어떻게 영적인 세계와 접촉하는지를 배웠다. 하지만, 그들은 사탄의 지배 영역인 어둠의 나라와 연락하고 있다.

영원한 몸(Eternal Bodies)

이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우리의 몸에 대한 언급을 잠깐 하도록 하겠다. 비록 우리의 몸은 죽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육체적 죽음은 영구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모든 죽은 사람의 몸을 부활시키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의인의 몸이 부활한 뒤 적어도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불의한 자들의 몸이 부활할 것이라고 썼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 번째 부활이라[1]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4 중-6).

성경은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교회를 데려가실 때, 모든 의인의 몸이 부활하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내려온 그들의 과 결합할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처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4-17).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최초의 사람을 지으셨으므로, 그분께서 모든 사람의 몸의 요소를 재결성하여 같은 물질로 구성된 새로운 몸을 만드시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몸의 부활에 관해 바울은 이렇게 썼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42-44상, 50-53).

우리의 새로운 몸은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뛰어난 특성들을 갖고 있음을 유의하라. 새로운 몸은 결코 늙거나, 병 들거나, 죽지 않는다! 우리의 새로운 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받은 새로운 몸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게 하시리라(빌 3:20-21, 강조 추가).

사도 요한도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단언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강조 추가).

비록 우리의 생각으로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고 앞에 일어날 일에 대해 기뻐할 수 있다![2]

예수님께서 중생을 논하시다 (Jesus on the New Birth)

어느 한 번, 예수님은 니고데모란 유대인 지도자에게 인간의 영은 반드시 성령님에 의하여 거듭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3-7).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니고데모가 처음 들었을 때에, 그는 육체적인 중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거듭남을 말씀하셨음을 명확히 하셨다. 바로 사람의 영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적인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영이 죄악에 물든 본성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본성은 성경에서 종종 죽음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죄의 본성을 영적 죽음으로 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육체적인 몸이 기능을 멈출 때)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영적 죽음의 정의(Spiritual Death Defined)

바울은 에베소서 2:1-3에서 영적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강조 추가).

바울은 분명히 육체적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했다. 그 죄가 바로 영적 죽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롬 5:12을 보라).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영에 죄의 본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그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한 점을 유의하라.

또한,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영이 사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영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역사한다고 말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마귀이며(엡 6:12을 보라), 그 악의 영들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역사한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영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사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적 아버지가 바로 사탄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마귀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살인자들이며 거짓말쟁이들이다.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살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살인자와 같은 증오를 품고 있으며, 살인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그들도 살인할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낙태의 합법화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태아조차 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영적인 거듭납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적으로 거듭나면 죄의, 사탄의 본성은 그의 영에서 제거되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대체된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그의 영에 오셔서 그와 함께 거하신다. 그는 더는 “영적으로 죽은”자가 아니며, “영적으로 살아 있는”자로 거듭났다. 그의 영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는 죽은 것이 아닌 산 것이 되었다. 그는 사탄의 영적 자녀 대신,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되었다.

변화는 거듭남의 대체물이 아니다(Reformation is No Substitute for Regeneration)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있기에, 그들이 자기변화를 어떻게 열심히 하든 상관없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단지 외적인 행위변화가 아닌 새로운 본성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돼지를 아무리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향수를 뿌려주고, 목에 분홍색 리본을 달아준다 해도 돼지는 돼지일 뿐이다! 돼지의 본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더러운 냄새를 맡게 되며 돼지가 다시 진흙위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좀 깨끗해 보일 수 있지만, 속은 여전히 더러운 모습 그대로이다. 예수님은 일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교적이지만 성령님에 의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새롭게 거듭나면 겉사람뿐 아니라 속사람도 깨끗하게 해준다.

영이 거듭나면 혼은 어떻게 될까?(What Happens to the Soul When the Spirit is Reborn?)

사람의 영이 거듭나면, 그의 혼은 처음에는 본질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그가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이미 내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단 그분의 자녀가 되면, 우리가 우리의 혼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의 혼(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 지속적인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우리는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 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강조 추가).

야고보도 신자의 삶 속에 일어나게 되는 똑같은 과정을 썼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하).

야고보가 영이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썼음을 유의하라. 그들의 혼도 구원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오직 그들이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새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이유이다.

남아 있는 옛 본성(The Residue of the Old Nature)

새롭게 태어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두 본성을 가진 사람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곧 바울이 말한 “성령과 육체”사이의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갈 5:17).

바울이 “육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옛 죄의 본성을 말한다. 우리안에 있는 이 두 가지 본성은 부동한 소욕을 산생하며, 각각 다른 행동과 생활방식을 낳게 된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바울의 대조적인 비유를 유의하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9-23).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그들이 육체의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두 본성에 대해 썼으며, 육신대로 살면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하였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라…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0, 12-14, 강조 추가).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고이다. 육신대로 살면(이것은 상습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죽음의 결과를 낳게 된다. 바울은 영적 죽음에 대해 경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결국 육체적으로 죽기 마련이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시적으로 바울이 언급한 죄 중의 하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신자는 죄를 지었을 때에 죄책감을 느끼며 회개하기를 원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는 당연히 깨끗하게 될 것이다(요일 1:9을 보라).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와 하나님사이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와 하나님사이의 교제를 파괴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나 불순종하는 자녀이다. 만일 신자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의 징계를 받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쟁(The War)

만일 당신이 잘못된 일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육체의 소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 육신의 유혹을 받아 잘못을 저지르려고 할 때, 당신안에 그 유혹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이다. 그리고 당신이 유혹을 받을 때 내면으로부터 오는 정죄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당신의 영의 음성을 들은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의 유혹을 받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육체의 소욕에 굴복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변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순종과 거룩함으로 행동하고 육체의 본성을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기 위한 마법의 공식 같은 것은 없다. 바울은 그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그리스도인에 비해 우세가 없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반드시 내려야 할 결정이며, 주님에 대한 우리의 헌신 정도는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는 정도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바울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썼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발생하였다. 우리는 죄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죄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문제가 아니라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도록 유지하는 문제이다.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도록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속사람의 인도를 따라 행하고 육체의 충동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게 되며 그분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재창조된 영의 본성(The Nature of our Recreated Spirits)

우리의 재창조된 영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시다.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성령님을 통해, 사실 예수님의 본성은 우리안에 거하신다.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말했다.

우리가 그분의 능력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실제로 더 많은 사랑, 인내, 또는 자제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안에는 가장 많은 사랑과 인내와 자제력을 가지신 분이 살아계신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다만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본성과 맞서 싸우며, 예수님의 본성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지 못하도록 방애하고 있는 하나의 큰 적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이다. 우리가 반드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바울이 말할 만도 하다. 육체를 다루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께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바울도 역시 그의 육체적 본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극복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당신도 주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려면 역시 당신의 몸을 영의 노예로 삼아야만 한다. 당신은 할 수 있다!

 


[1]요한이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는 말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부활 전에 다른 대규모의 부활이 없었음을 믿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세계적인 환란의 끝에 일어나기 때문에, 환란전 휴거와 모순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전서 4:13-17의 기록에 따라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휴거할 때 대량의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휴거와 마지막 때에 관한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2]부활의 주제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단 12:1-2; 요 11:23-26; 행 24:14-15; 고전 15:1-57을 보라.

제 8 장 (Chapter Eight)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제자를 삼고, 그들을 그리스도 모든 계명에 순종하게끔 가르치려는 소망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매우 깊은 관심을 둘 것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이며, 그분의 계명으로 가득 찼다. 제자 삼는 사역자라면 예수님이 설교 중 명령하신 모든 것을 자신이 순종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그 설교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나눌 것이다. 나는 사역자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강해식으로 가르치기를 권장한다. 바라건대, 내가 쓴 것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의 것은 산상수훈의 윤곽인데, 우리에게 전반적인 개관을 보여주고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I.)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5:1-2)

II.) 서론(5:3-20)

A.)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과 축복(5:3-12)

B.) 계속해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훈계(5:13-16)

C.)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5:17-20)

III) 설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라(5:21-7:12)

A.)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 사랑하라(5:21-26)

B.)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5:27-32)

C.)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5:33-37)

D.)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5:38-42)

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5:43-48)

F.)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6:1-18)

1.) 올바른 동기로 구제하라(6:2-4)

2.)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라(6:5-6)

3.)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6:7-15)

a.) 기도에 관한 지침(6:7-13)

b.) 용서의 필요성(6:8-15)

4.) 올바른 동기로 금식하라(6:16-18)

G.)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재물을 섬기지 말라(6:19-34)

H.) 형제의 작은 결함을 비판하지 말라(7:1-5)

I.) 감상할줄 모르는 자들과 진리를 담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7:6)

J.) 기도에 대한 격려(7:7-11)

IV) 결론: 설교의 요약

A.) 요약 문(7:12)

B.) 순종에 대한 훈계(7:13-14)

C.)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자를 알아내는 방법(7:15-23)

D.) 불순종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요약(7:24-27)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Jesus Gathers His Audience)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가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2).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와 산에 올라가심으로 그분의 청중들의 크기를 줄인 것 같다. 우리는 “제자가 나아왔다”는 것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도 그분의 말씀을 듣기에 굶주린 사람들만이 그분을 따라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7장 28절을 보면 그들을 “무리”라고 표현했다.

그 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셨는데, 처음부터 우리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어떤 특징을 소유하면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셨다. 왜냐하면, 그런 특징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한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것이 곧 그분 설교의 전반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5:3-12의 말씀을 팔복이라 하는 데 모두 이 주제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들의 부동한 특성들을 열거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구체적인 축복들을 약속하셨다. 무심한 독자들은 종종 각 그리스도인은 팔복중의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세심한 독자들은 예수님이 서로 다른 축복을 받게 될 부동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열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진정한 신자들이하나의 포괄적인 미래의 축복인 천국을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심을 인식한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다른 방법의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3-12).

축복과 성격특성(The Blessings and Character Traits)

먼저, 약속받은 모든 축복을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은 (1)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고, (2) 위로를 받을 것이고, (3)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고, (4) 배부를 것이고, (5)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고, (6) 하나님을 볼 것이고, (7)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8)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다(첫 번째 약속을 반복함).

예수님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셨을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지만, 둘 다 하나님이 나라는 상속받지 못할까? 화평케 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할까? 이것들은 분명히 잘못된 결론일 것이다. 따라서 오직 약속받은 많은 축복은 하나의 큰 축복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 안의 다양한 축복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이 안전하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묘사한 서로 다른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1) 심령이 가난하고, (2) 애통하고, (3) 온유하고, (4)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5) 긍휼히 여기고, (6) 마음이 청결하고, (7) 화평하며, (8)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한 사람이 마음은 청결하지만, 무자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실까? 한 사람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 없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들은 모든 복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분명히, 팔복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의 성격특성을 묘사한다. 그런 성격특성을 제자들에게 열거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은 구원받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복이 있는 사람들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현재, 그들은 받고 있는 고통 때문에 스스로 축복받았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은 그들에게 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묘사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천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제자 삼는 목사들은 그들이 목회하고 있는 무리 내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점을 알게 할 의무를 느껴야 한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The Character Traits of the Blessed)

복이 있는 사람의 8가지 성격특성은 해석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도덕적 미덕을 드러내는가? 나는 예수님이 구원받는 사람이 소유해야 할 첫 번째 필요한 특성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그는 반드시 자신의 영적 빈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구원받기 전에 반드시 구주에 대한 그의 필요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청중들 사이에는 바로 그런 자신의 불쌍함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의 교만한 자들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복된 가!

첫 번째 특성은 모든 구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하나님께 드릴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기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누구도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아니, 만일 사람들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천국의 축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이룩하신 일 때문이다. 매번 내 삶 속에 있는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볼 때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이룬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내안에서 이루신 일을 생각나게 한다.

애통하는 자(The Mournful)

만일 첫 번째 특성이 제일 먼저 나열된 이유가 그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제일 필요한 특성이라면, 아마도 두 번째 특성도 의미 있게 나열된 것 같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예수님께서 진심의 회개와 양심의 가책을 묘사하고 계셨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7:10을 보라).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말씀하신 슬픔에 잠긴 세리가 바로 이런 종류의 복이 있는 사람의 예이다. 그는 성전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울부짖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하나님께 자랑하스럽게 기도하던 인근의 바리새인과는 달리, 그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야기에서 세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바리새인은 아니었다(눅 18:9-14을 보라). 나는 예수님의 청중들가운데 성령님의 질책을 받고 애통하는 자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곧 성령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분께 나아오는 회개 한 사람들이 처음 느끼게 되는 애통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분은 진정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지속적으로 대면하면서 느끼는 슬픔을 설명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2)고 표현하였다.

온유한 자(The Gentle)

세 번째 특성인, 온유함은 성경에서 또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었다(갈 5:22-23을 보라). 온유함은 자체생성 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온유하게 변화 받도록 축복받았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의인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새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고, 폭력적인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 중 속하지 않는다.

의에 주린 자(Hungering for Righteousness)

네 번째 특성인,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것은 모든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이 소유한 하나님이 주신 내적 갈망이다. 의에 주린 자는 이 세상과 자신한테 남아 있는 모든 불의를 슬퍼한다. 그는 악을 미워하고(시 97:10; 119:128,163) 의를 사랑한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정의란 단어를 읽을 때마다, 자주 즉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한 법적인 입장”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게 살아가려는 소질”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분명히 그러한 의도로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굶주려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를” 확신이 있는데(마 5:6), 그것은 그들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빌1:6).

여기서 예수님은 “의가 있는 곳인”(벧후 3:13) 새 땅의 시간을 예견하셨다. 그때가 되면 죄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 우리는 배부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진심으로 된 기도는 모두 응답받을 것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마 6:10).

긍휼히 여기는 자(The Merciful)

다섯 번째 특성인 긍휼도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그들안에 살아계시는 자비의 하나님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유하고 있는 미덕이다. 긍휼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했고,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사도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라고 말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면, 당신은 그가 가야 할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가?[1] 답은 분명하다.

어느 한 번, 예수님은 주인에게 큰 긍휼을 받은 하인이 그의 동료 하인한테는 긍휼을 베풀지 않은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주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모든 이전에 탕감받은 빚은 다시 계산되었다. 그 후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처럼 하시리라”(마18:35)고 그분의 제자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용서받은 죄를 다시금 계산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을 때까지 고문당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The Pure in Heart)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의 여섯 번째 특성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단지 겉으로만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은 청결해졌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은 자신의 묵상과 동기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을 약속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하고도 천국에 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실까? 아니, 분명히 모든 진정으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이라면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s)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모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갈 3:26),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다.

첫째로, 전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을 보라).

둘째로, 그들은 될수록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그들에게는 분쟁과 싸움이 적다. 바울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갈 5:19-21을 보라). 진정한 신자들은 싸움을 피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십 리를 더 걸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형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마 5:23-24; 요일 4:20을 보라).

셋째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화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마도 산상수훈의 이 말씀 때문에 야고보가 이렇게 썼을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박해를 받은 자(The Persecuted)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은 자들을 축복하셨다. 물론, 그분은 단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들에게 전가 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불신자들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박해를 말씀하셨을까? 고문? 순교? 아니, 그분은 특별히 그분의 연고로 모욕당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시 한 번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신자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그들을 향해 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소위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하나도 구별되지 않음으로 하여 한 명의 불신자도 그들을 대적하여 말하지 않을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처럼 하였느니라”(눅 6:2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가짜 신자임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요 15:18-21; 갈 4:29; 딤후 3:12; 요일 3:13-14).

소금과 빛(Salt and Light)

일단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확실히 천국을 상속받을, 변화 받고 축복받은 사람들에 속한다고 보증하셨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 대한 경고이다. 영적 염소들에게 그들은 영원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보증하는 수많은 현대적인 설교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복이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자신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의 제자들을 충분히 사랑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소금이 되거나 빛이 되라고 훈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소금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맛을 잃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빛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빛을 숨기지 말고, 계속하여 비추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했던 수많은 설교와 다르다. 만일 한 사람이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시대에, 소금은 고기의 방부제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을 완전히 썩어가고 부패해지는 데로부터 보존해 준다. 하지만, 우리의 행함이 이 세상과 같아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 쓸데없어”(13절)질 것이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자들에게 맛을 잃지 말고 자신의 유일한 특성을 보존하기를 경고하셨다. 그들은 반드시 주위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맛을 잃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들이 뒤로 후퇴하지 말라는 신약 성경의 여러 분명한 경고 중의 하나이다. 만일 소금이 진짜라면, 짠맛을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답게 행동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도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는 또한, 세상의 빛이다. 빛은 항상 빛난다. 만일 빛을 낼 수가 없다면 빛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빛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상징한다(마 5:16). 예수님은 착한 행실이 없는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억지로 짜내라는 뜻이 아니라, 착한 행실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들안에서 행하셨기에 그들이 착한 행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하심과 우리의 그분과의 동역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구든지 거룩하여지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The Law’s Relationship to Christ’s Followers)

이제 우리는 새로운 단락을 보도록 하겠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의 대부분의 나머지 설교말씀에 대한 서론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는 그분의 청중들을 경고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분의 청중 중 일부가 확실히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왜 이러한 가정을 했는지를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일부 사람들을 미혹하여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게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격한 질책일 것이다.

어쨌든지,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이러한 가정의 오류를 인식하기를 명확하게 원하셨다. 그분께서 전체 구약 성경을 묵시하셨기에, 그분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절대로 폐할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까? 일부는 예수님께서 단지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성취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확실히 모든 메시아의 예언을 성취하셨지만(또는 하실 것이지만), 그분께서 뜻하신 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맥을 보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모든 율법과 선지서에 의해 쓰인 “일점 일획”(18절)과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19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

기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적인 삶과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다고 추측한다(롬 8:4을 보라).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참조점으로써 그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그분은 율법은 적어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우리와 관련이 있으며, “다 이루어 질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참조 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에 비해 훨씬 후의 일이다. 그 후 그분은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심지어 그들의 천국에서의 위치에도 영향을 미친며(19절),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20절).

물론, 메시아 예언, 유형, 율법의 그림자,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성취하는 것 외에도,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들이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선지자의 말씀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고 원래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완전하게 하고, 율법을 완전하게 긍정하고 해석하며, 율법에 대한 청중의 부족한 이해를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2] 17절에서 완전하게 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온전하다, 이루다, 충만하다, 다 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시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네 구절 뒤부터 실현하시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충만할 때까지 완전하게 하셨다.” 내가 산상수훈의 이 부분을 가르칠 때, 종종 사람들에게 물이 절반 담긴 컵을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의 예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이 말을 할 때, 나는 물이 절반 담긴 컵의 물을 쏟아 버릴 것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그분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위해 오셨다(이때 나는 물 한 병을 가져다가 그 컵이 찰 때까지 물을 붇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뜻하셨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Keeping the Law)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더는 강하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가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셨다. 그것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사실, 사람들이 계명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천국에서의 그들의 상태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19).

그리고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이전 구절과 연결된 결론적인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할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견지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다면 그의 구원을 보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의를 말씀하셨을까?(Of What Kind of Righteousness Was Jesus Speaking?)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는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법적인 의를 말씀하셨을까? 아니,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키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이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이 말씀의 전후 구절(그리고 전체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의롭게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기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죄하시면서 같은 죄를 지은 그분의 제자들은 정죄하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구원받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3]

우리의 문제는 율법주의자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의 명백한 의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가한 의와 우리의 행위상의 의가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해했으며 이렇게 썼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요일 3:7). 또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과 의롭게 사는 사람의 상호관계를 몰랐지만, 요한은 알고 있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예수님은 5장 20절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추가하실 수 있었다, “만일 너희가 회개하고,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산 믿음으로 내가 주는 의를 받게 되며, 네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역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거룩해질까?(How to be Holier than the Scribes and Pharisees)

5장 20절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확히 어느 정도로 의로운가? 그 대답은, 별로이다.

다른 한 번, 예수님은 그들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하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잘 지키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종종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말씀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고치기까지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본질적인 결함은 실제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남은 부분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잘 알려진 계명들을 많이 인용하셨고, 인용하신 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영적으로 순종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반복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가르침과 위선을 폭로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향한 진실한 기대를 밝히셨다.

예수님은 매번 예를 드시기 전마다 “너희가 들었으나”란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구약성경을 가능하게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단지 회당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듣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분의 청중들이 모든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만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만 들어왔고, 그들의 거짓된 삶만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를 사랑하라(Love Each Other,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의 여섯 번째 계명을 시점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와 동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먼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경고하신 점을 유의하라. 그것은 그분의 주제인데 바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섯 번째 계명을 인용하며 살인을 반대하였는데, 살인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함을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식하지 못한듯한 “작은” 위반도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게 하고 싶으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두 번째 큰 계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화를 낼 때에는 우리 자신이 벌써 하나님의 법정에서 정죄당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형제에게 악한 말을 하여 분노를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죄는 더욱 심각해지며, 하나님의 최고 법정에서 봤을 때 자신은 이미 유죄 선언을 받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보다 더하여, 재차 악한 말로 형제에게 증오를 뿜어 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지옥에 던져질만큼 충분히 죄를 지은 것이다.[4]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우리와 형제와의 관계에 의해 보아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요한은 이렇게 썼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자와 화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마 18:15-17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 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것은 우리가 형제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3-2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것은 사소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서로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의 중요성은 무시한다. 예수님의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을 경고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 심판의 엄중성을 말씀하셨다.

너는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하나님의 법정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형제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우리에게 화를 냈을 때, 우리가 “법정으로 가는 길” 곧 하나님의 앞에 설 때까지, 삶 속에서 그들과 화해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23-35에서 나오는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종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용서받았지만, 용서하기를 거부한 그 종은 빚을 다시 갚도록 되었으며, 그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겨졌다(마 18:34). 여기서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서운 영원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Be Sexually Pure,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일곱째 계명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예의 주제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성적으로 더 순결하기를 바라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7-30).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유의하라. 그분은 지옥과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해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곱 번째 계명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겉으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한 척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한다. 그들은 시장에서 여자들을 보면 옷을 벗은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간음했으며, 따라서 일곱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어겼다. 오늘날 교회 안의 상황은 얼마나 다를까?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완전히 순결하기를 바라신다. 분명한 것은, 만일 이웃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의해 요구된 것에 더 엄격한 법을 추가하지 않으셨다. 열 번째 계명은 명확하게 정욕에 대한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예수님의 청중 중에 정죄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아마 있었을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했야 했는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그들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정욕에 빠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음행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음욕을 품은 사람들의 눈을 뽑아 내버리거나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음욕을 품어 한눈을 뽑힌다 해도 그는 애꾸눈인 호색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극적이고 엄숙하게 일곱 번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셨다. 영생은 그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찍어 내버리라고 훈계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케이블 TV라면, 케이블 연결을 끊어야 하고, 그것이 일반TV라면, 텔레비전을 제거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구독하고 있는 잡지라면, 구독을 취소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인터넷이라면, 인터넷 접속을 끊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열려 있는 창문이라면, 닫아야 한다. 그런 일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야 할 가치가 없으며,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양 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경고할 것이다.

간음의 또 다른 방식(Another Way to Commit Adultery)

예수님의 다음 예는 우리가 금방 고려했던 내용과 많이 관련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다음 순서에 언급했을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주제보다 오히려 앞의 주제에 대한 진일보 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방식의 간음”이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

다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하여 자기들의 죄로 물든 삶의 방식에 부응시킨 예이다.

예수님 시절의 바리새인을 상상해보자. 길 건너편에 그가 음욕을 품은 매력적인 여자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 그녀를 볼 적마다 그녀와 새롱거린다. 그녀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고, 그녀를 향한 그의 정욕은 날로 불타오른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어하고, 정기적으로 그녀에 대한 성적환상을 한다. 오, 그가 그녀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는 결혼했고, 그의 종교는 간음을 금지한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고 싶지 않다(비록 그가 매번 음욕을 품을 적마다 이미 계명을 어겼지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만일 그가 현재의 배우자와 이혼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연인과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을 하는 것이 합법적일까? 동료 바리새인은 그에게 “합법적이다“고 말해준다. 그것에 대한 성경 말씀도 있다! 신명기 24:1을 보면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혼은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은 무엇인가? 그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본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아! 그는 아내에게서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그녀는 길 건너편의 여자만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억지스러운 예가 아니다. 예수님 시절 이혼에 대해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을 주었던 랍비 힐레에 따르면, 한 남자는 자기의 아내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합법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다른 매력적인 여자가 현재 아내로 하여금 그의 눈에 “수치스럽게” 보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랍비 힐레는 또한, 만일 아내가 그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거나,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면, 그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음욕을 품은 바리새인은 아내에게 필요한 증서를 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으며 환상 속의 여인과 빨리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한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부동한 관점(A Different View)

물론, 하나님은 사물을 부동한 관점으로 보실 수 있다. 그분은 결코 신명기 24:1-4에 언급된 “수치되는”일이 실제로 무엇이며, 심지어 그것이 이혼을 위한 정당한 이유인지 여부를 규정하신 적이 없다. 사실, 그 단락은 이혼이 합법적인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 단락에는 두 번 이혼하거나 한 번 이혼한 과부가 그녀의 첫 남편과 재혼하는 것에 대한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단락의 말씀만 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되는”일은 이혼을 합법화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강제적으로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가 금방 묘사한 가상의 사람은 간부와 차별이 없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었다. 사실, 그는 일반적인 간부보다 더 간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중간음”을 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먼저, 그는 자신한테 간음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나중에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라”(마 19:9)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의 이혼당한 아내는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남편을 찾아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께는 바리새인이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게끔 강요한 것으로 보이신다. 따라서, 그는 그녀가 “간음”[5]하게 한 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마5:32,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그의 전 부인의 새 남편이 범한 “간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6]예수님은 그 음탕한 바리새인을 “삼중 간음”으로 고소하실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시절에 이것이 뜨거운 논쟁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혼에 대한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 반드시 더 말해야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직 거듭나기 전에 이혼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훌륭한 짝을 찾아 결혼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간음에 해당되 않는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면, 죄인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더는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지금부터 우리는 이렇게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혼 했다면, 당신은 재혼하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간음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간음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만일 당신이 이혼한 재혼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한 번 더 죄를 범하고 현재 배우자와 이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하여 간음하며 살게 되고 간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7]이것이 복음이란 말인가?[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Be Honest,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세 번째 예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의한 행위 및 성경 말씀에 대한 오용은 진실을 말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마태복음 23:16-22에서 보다시피 그들은 성전으로, 제단으로, 하늘로 맹세하면 자신의 맹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전의 이나, 제단 위의 예물이나 하늘 위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그들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들같이 손가락을 끼고 뒷짐을 지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신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33:37).

맹세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 계명을 보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라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항상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셨기에, 따라서 맹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맹세는 서약이나 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맹세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맹세는 아주 좋다. 구원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맹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그들이 거짓말한다는 간접적인 시인이다.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거짓말쟁이로 가득하며, 사역자들은 종종 거짓과 기만의 선두 주자들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정직한 모범을 보이고, 그의 제자들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는 요한의 경고를 알고 있다(계 21:8을 보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Don’t Take Revenge,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불만목록 중의 다음 항목은 구약 성경의 매우 잘 알려진 구절에 대한 바리새인의 남용이다. 우리는 이미 이 구절을 성경적 해석에 관한 장에서 살펴보았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모세의 율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면, 그는 그 피해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숴버렸다면, 공정성과 정의에 의해, 그의 이도 부서져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법정에서 주요 범죄에 대한 정의를 확보하기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라 법정과 재판관의 제도를 만드셔서 범죄를 억제하고, 정의를 확보하고, 원수를 갚는 것을 막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재판관은 공정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계명을 따르지만, 그 문구와 계명은 항상 법정에서 정의에 관한 구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한 번 계명을 왜곡하여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만들어 버렸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관용이라곤 전혀 없이,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원수를 갚으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항상 더 많은 걸 기대하신다. 원수를 갚는 것은 그분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신 것이다(신 32:35을 보라).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원수에게 자비를 보여줘야 한다고 가르친다(출 23:4-5; 잠 25:21-22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인을 상대할 때에는 한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대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갚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고, 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도록 허용하기를 기대하실까? 우리가 불신자들을 법정에 고소하고 우리에게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예수님은 법정에서 큰 범죄에 대한 정당한 정의를 취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침해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등을 찌른 사람에게 목을 졸라매도록 우리의 목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동차를 요구하면, 그 사람에게 집까지 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사소한 침해와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높은 수준의 관용과 자비를 보여줘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기를 원하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왜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쉽게 침해를 받는가? 왜 그들은 뺨을 맞는 것보다는 열 배나 더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이들은 과연 구원받았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다른 뺨을 돌려대는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Don’t Hate Your Enemies,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증오의 마음을 수용하기 위해 고쳐버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나열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고 말씀하셨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편리하게 이웃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은 다 원수라고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에 따르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응당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해야 함을 가르치셨다.[9]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위한 기준이며, 그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다. 그분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우리는 응당 그분을 본받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그같이 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마 5:45)임을 보여준다. 정통적인 거듭난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사랑은 감정이거나, 그들의 불의에 대한 승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대항하는 이들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배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정말 멋진 사람들이라고 거짓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고, 적어도 그들에게 문안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등 자원적인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를 강조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들이 모든 유대인의 보기에 지옥으로 갈 것 같은 두 부류의 사람인 이교도 이방인과 세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Do Good for the Right Motives,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거룩하기를 기대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거룩해지기를 기대하셨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도 만일 그의 순종이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면 여전히 그분을 매우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였기 때문이다(마 23:5을 보라).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은 다르기를 기대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기대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것을 명령하셨고(출 23:11; 레 19:10; 23:22; 25:35; 신 15:7-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팔을 불며 표면적인 구제를 하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모아 공개적인 배급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지 모른다. 그들은 구제해본 적이 없기에 그 동기를 점검해볼 필요조차 없다. 만일 이기심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제를 광고하게 했다면,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무시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3:10-15에서 되풀이한 것처럼, 우리는 잘못된 동기로 선행을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의 선행은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혔다(빌1:15-17을 보라).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처럼, 우리가 구제하는 동기가 순전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구제할 때에 될수록 은밀하게 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그들이 할 수 있다면) 가르치며, 그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조용하게 실천한다.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고 금식하라(Prayer and Fasting for the Right Reasons)

예수님은 또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기를 기대하시고, 그들이 그것을 하는 이유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기를 바라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지옥에 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유일한 이유는 매우 일시적인 보상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16-18).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금식해본 적이 없는지 모른다.[10]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잘못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기도와 용서의 주제로 돌아오다(A Digression Regarding Prayer and Forgiveness)

기도의 주제를 말씀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본제를 조금 벗어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한 것을 우리가 부정함으로 그분의 아버지를 모욕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간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의미한 반복을 할 이유가 없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진실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분이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함으로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거룩하여져서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범적인 기도에서 반영되는데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헌신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드러낸다.[1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9-11).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존경받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거룩해 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위선적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원을 반영한다.

모범기도의 두 번째 간구도 비슷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에 대한 생각은 그 나라를 지배하는 한 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제자는 그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땅을 지배하시는 그의 왕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 모든 사람이 순종의 믿음으로 왕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간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간구의 되풀이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진심으로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용 할 양식”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 이 네 번째 간구가 네 번째에 배치된 것은 그럴만 한 이유가 있다. 이 간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정확한 우선순위를 반영하며 탐욕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초점을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 네 번째 간구는 모범기도는 우리가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해야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모범기도는 계속하다(The Model Prayer Continues)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래로 죄를 짓지 않을까? 그들도 분명히 때로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2-15).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그들이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얼룩을 제거하려 하고, 고맙게도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용서를 구해야 하는 데 그것은 곧 주님의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이다.

그러나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조건으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용서받았기에 그들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해줄 의무가 있다(그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한다). 만일 그들이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인 간구도 분명히 진정한 제자가 거룩해지려는 소원을 반영하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거룩함을 추구하기에 하나님께 그가 유혹될 수 있거나 실족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빠질 수 있는 모든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악하고 유혹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왜 이 기도의 여섯 가지 간구가 적절한지를 이해한다. 그 이유는 기도의 마지막 줄에 공개되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왕이며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그분은 전능하시며 아무도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모든 영광은 영원히 그분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받을만한 분이시다.

주님의 기도의 지배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거룩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세워짐으로 하여 그분의 뜻이 모든 곳에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중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용서를 구한다.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른 사람도 용서해준다. 그들은 완벽하게 거룩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유혹을 피하기를 소원하는 데, 그것은 유혹은 그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커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자와 그의 물질적 소유(The Disciple and His Material Possessions)

산상수훈의 다음 주제는 물질의 축적을 삶의 주요동력으로 삼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보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보물은 보물 상자에 넣어서 어딘가에 보관되며 실제로 어떤 곳에도 사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것들은 좀벌레와 동록과 도둑을 끌어온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좀벌레는 우리가 자주 입는 옷이 아닌 옷장의 맨 끝 부분을 해한다. 동록도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해한다. 많은 선진국에서, 도둑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품, 보석, 비싼 장치, 그리고 저당 잡힐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들을 훔친다.

진정한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눅 14:33을 보라).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할 청지기이기 때문에 재물을 지출하는 모든 결정은 영적인 결정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면 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지를 보아낼 수 있다. 우리가 “보물”을 쌓아두며, 재물을 저축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주관하고 계시지 않음을 드러내는데, 만일 그분이 주관하셨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재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은 일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명령하셨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분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치를 잃고 쓸모없어지기 마련인 것들을 영원히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들에 투자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며, 그분 역시 제자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쁜 눈(The Bad Eye)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분의 말씀은 꼭 돈과 물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 후 구절에서 모두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장 23절에서 “나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악하게(부러워하는)”로 번역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한 주인이 한 품꾼에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또는 내가 후하니까 네 눈이 부러워하느냐)”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분명히 눈은 문자 그대로 부러워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러워 하는(또는 나쁜) 눈”이란 표현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6:22-23에서 의미하신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게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를 섬기며, 땅이 아닌 그의 마음이 있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닫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어둠으로 가득하며 거짓말을 믿는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있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며, 그의 삶의 목적은 자기만족이라고 믿는다. 돈이 그의 신이다. 그는 천국을 상속받지 못한다.

돈을 자신의 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할 자리에 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돈이 당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돈은 당신의 에너지, 생각과 시간을 소모한다. 돈만이 당신의 기쁨의 주요 원천이다. 당신은 돈을 사랑한다.[12]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은 탐하는 자와 우상 숭배자를 동일시하였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엡 5:5; 골 3:5-6을 보라).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라는 그분의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어둠으로 가득한 사람은, 돈을 신으로 삼고, 땅에 마음을 두고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고 있으며, 생명으로 통하는 좁은길로 가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탐욕스러운 가난한 자(The Covetous Poor)

사치품을 탐내는 것만이 사람들을 물질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기본 필수품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25-34).

이 책의 많은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당신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 마지막으로 염려해본 것은 언제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확실히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생활 필수품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쓰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필수품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은 얼마나 더 잘못된 것일까?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두 가지 일을 추구하는 데에 집중하기를 바라셨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자칭 그리스도인이 십일조(구약의 계명임)는 낼 수 없지만, 많은 필요하지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살수 있다면, 그는 과연 그리스도의 기준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계명대로 살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흠잡는 사람이 되지 말라 (Don’t be a Fault-Finder)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다음 계명은 비판과 흠 잡는 죄에 관한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록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은 확실히 그런 죄를 짓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 하였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경고는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그분의 뜻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자. 그분은 우리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을 하고 분별하지 말아야함을 의미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지시하셨다(7:6을 보라). 그분은 분명히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돼지와 개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들이 받은 “진주”와 같은 거룩한 것들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함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려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돼지나 개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거짓 교사(7:15을 보라)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검토하고 우리의 관찰을 근거로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누가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했는지가 분명하다(요일 3:10을 보라).

이 모든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니면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고 분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비판하는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형제의 작은 결함, 얼룩을 찾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예수님은 이 단락에서 형제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는다는 점을 유의하라).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명백한 결함을 관찰함으로 그들이 불신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지 않았다(왜나하면 그분은 그 부분에 대해 바로 이 설교에서 우리에게 곧 지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들은 서로의 흠을 잡으려 해서는 안되는데, 특별히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위선적이 된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위선적인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사도 야고보의 서신서는 산상수훈과 아주 유사한데, 그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아마도 이것 또한, 우리가 신자끼리 서로 흠을 잡고, 그것에 대해 서로 원망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것은 교회 속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죄 중 하나이며,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판단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동료 신자들을 비판하며,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한다면, 우리는 황금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없을 때 우리의 나쁜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료 신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데, 오직 우리가 위선이 없고, 우리가 대면하는 사람과 같은 죄(또는 더 심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와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마찬가지로, 잠언을 보면,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한다. 예수님은 딴 때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가 일단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개”들임을 분별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도 아직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분의 종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기도에 대한 격려(Encouragement to Pray)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데 그것은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으로 시작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 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 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아!” 어떤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산상수훈 중 이 부분의 말씀은 거룩함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중에 무엇을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지에 달려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기를 원하며, 그 갈망은 우리의 기도에도 확실히 반영된다. 사실 예수님께서 전에 이 설교에서 하신 모범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처럼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약속 하실 때 고급스러운 것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마음속으로 성령이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해 지게 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도와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

다른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의 뜻과 그분의 나라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쓰임받기 위해 하는 기도는 항상 응답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맺음말(A Summarizing Statement)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시점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요약하는 구절에 도착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놓치지만,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분명히 맺음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전의 가르침과 연결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들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얼마만큼 요약하고 있는가? 한 번 읽어보고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구절은 단지 그 전의 기도에 관한 몇 구절의 말씀에 대한 요약이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다.

예수님께서 설교 초기에 그분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기억하라(마 5:17을 보라). 그 시점부터 지금 도착한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약 성경의 계명들을 긍정하고 해석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지금 자신의 모든 명령을 요약하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란 문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7부터 7:12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연결시켜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설교를 마무리 짓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되풀이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분명히 찾는 자가 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구원의 상징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찾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은 지옥의 상징이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 전에 한 모든 말씀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고, 이 설교가 논리적으로 전개되었고, 예수님이 이성적으로 의사전달을 했다면, 좁은 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길을 의미할 것이다. 넓은 길은 정 반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 설교에서 묘사한 좁은 길에 서 있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당연히 좁은 길에 서 있으며, 그는 자기의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설교가 자칭 그리스도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구원과 멸망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믿음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설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믿음을 보여준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변화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인즉 그분의 거룩함이다.

거짓 종교 지도자를 분별하는 방법(How to Recognize False Religious Leaders)

예수님은 그분의 결론 발언을 계속하시면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이 분별없는 자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여 멸망에 이르게 함을 경고하셨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그런 것처럼 위장하지만 말이다. 모든 거짓 교사들과 지도자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5-23).

분명히 예수님은 거짓 교사가 매우 기만적임을 지적하셨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진실해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부르고, 선자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권능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탐욕스러운 이리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양이 아니다.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의 진정한 신분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권능의 열매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열매이다. 진정한 양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것이다. 가짜는 “불법을 행한다”(7:3).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그들의 삶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명령하신 것에 비교해 보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오늘날 교회 속에 편만해 있으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놀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가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이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해야 함을 미리 경고하셨다(마 24:11; 딤후 4:3-4을 보라). 우리 시대의 가장 널리 알려진 거짓 선지자는 천국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명이 영원한 지옥살이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존 웨슬리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하나님의 대사가 마귀의 대리인이 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만약 누군가 나에게 “왜,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수만 명의 현명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들은 교파를 불문하고 교만한 자, 빈들거리는 자, 정욕에 빠진 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의하거나 박정한 자, 안일하고, 부주의하고, 악의 없고, 쓸모없는 존재,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한, 사람을 배신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어두움의 세계로 끌어간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간 자들은 불쌍한 영혼마저 파멸된다. “지옥이 땅 밑에서 올라와 이들을 삼켜 버렸으면 좋겠다!”[13]

흥미롭게도, 웨슬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마태복음 7:15-23에서 경고하신 거짓 교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거짓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7:19을 보라). 또한, 이 말씀은 교사와 선지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제이다–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유의하라.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열매의 원천은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본성을 변화시켰다.[14]

마지막 경고 및 요약(A Final Warning and Summary)

예수님은 마지막에 하나의 경고 및 요약의 예로 그분의 설교를 결론 지었다. 당신이 예상한 것처럼, 그것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에 대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예수님의 마지막 예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에 대한 공식이 아니다. 문맥을 보면 그분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시기에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물질적인 번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행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살후1:9).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 to an Question)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그분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전에 살았던 그분의 추종자들에게만 적용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들은 율법아래 있음으로 임시적으로 구원 받았다가,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은 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설교의 주제를 폐하여도 되지 않을까?

이런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행위로써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구약 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항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구약 전)과 다윗(구약시대)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로써 의롭게 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청중들 중 아무도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 3:23).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계명을 단지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만으로 여김으로써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지금 우리가 “복음을 들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는 그분의 대부분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다시 꺼내서 사람이 얼마나 죄악스러운지를 보여주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 세계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고 일단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면, 내 계명은 그들의 삶에서의 목적을 다 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강조 추가).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로 그 일을 행한다.

 


[1]흥미롭게도, 야고보서의 그 다음 구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이다.

[2]비록 예수님이 의식법을 이루신 것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사람들이 “율법의 도덕적 측면”과 “율법의 의식적 측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약에서 왜 동물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선언 하셨기에 구약의 음식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막 7:19을 보라). 우리는 지상의 대제사장의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대제상장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의식법과는 달리, 도덕법의 어떠한 부분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전후에 예수님에 의해 변경된 것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덕법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또 긍정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행하였다.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은 모두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5:17-20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된 그분의 지속적인 계시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3]또한, 만일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선물로 전가 받게 되는 율법적인 의를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왜 그것에 대해 암시조차 하시지 않았을까? 그분은 왜 교육받지 못한 청중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들은 그분께서 전가한 의에 대해 말씀하실 줄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4]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예수님은 성경이 보편적으로 말씀하듯이(잠 1:7; 13:20을 보라)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다(마 23:17을 보라).

[5]물론, 하나님은 그녀가 재혼 할 때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지 않으셨다. 그녀는 단지 남편의 죄로 인한 피해자였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재혼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6]다시 한 번, 하나님은 그녀의 새로운 남편이 간음을 범했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이혼 당한 여자와 재혼하고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가 자기와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남편과 이혼하도록 부추긴다면, 그는 간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도 그런 죄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7]물론, 다른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원받지 못한 남편에게서 이혼 당한 그리스도인 여자가 그리스도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을 범한 것이 아니다.

[8]이혼과 재혼에 관한 장에서,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철저하게 다룰 것이다.

[9]어떤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물었다. 당신은 그가 이미 정답을 아는 줄로 생각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미움 받는 종족인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유대인에게 자신이 이웃임을 증명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에게 답하셨다(눅 10:25-37을 보라).

[10]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는 금식의 주제에 관해 전체 장을 통하여 다루었다.

[11]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적용하면,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기록 된 사도들의 많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12]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해 같은 말씀을 하셨으며 누가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눅 16:14)고 썼다.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바리새인들의 행함과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하게 폭로하셨다.

[13] The Works of John Wesley (Baker: Grand Rapids, 1996), by John Wesley, reprinted from the 1872 edition issued by the Wesleyan Methodist Book Room, London, pp. 441, 416.

[14]나는 이 기회에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변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과는 상반되게, 예수님은 여기에서 외적으로 들어나는 것이 내면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곳에서, 그분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 12:34)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미워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또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막 7:21-22)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한 사람이 간음을 범했을 때 우리는 그가 마음속으로도 간음을 범했음을 분명히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