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Chapter Nine)

예수님이 좋아하신 설교자(Jesus' Favorite Preacher)

당신은 예수님도 좋아하시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신 설교자는 루터교, 감리교, 오순절 파, 성공회, 또는 장로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침례교였다! 물론, 우리는 그를 세례 요한으로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상).

모든 사람이 다 “여자가 낳은 자”이므로 이 말의 뜻인즉 예수님이 보시기에 세례 요한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생각하셨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한의 영적 자질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높이 생각하셨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러한 영적 자질에 대해 공부하고 본받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나는 세례 요한에게서 적어도 7가지 칭찬할 만한 영적 자질을 발견했다. 비록 요한의 사역이 전도자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지만, 7가지 영적 자질은 복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적용된다. 먼저 첫 번째 영적 자질을 생각해 보자.

요한의 첫 번째 자질(John’s First Quality)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19-23).

요한은 자신의 소명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였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소명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당신이 전도자라면, 목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교사라면, 선지자 노릇 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좌절감만 느낄 것이다.

어떻게 당신의 소명을 알 수 있을까? 먼저, 당신을 부르신 주님께 구하라. 둘째로, 당신의 은사를 점검하라.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전도자로 부르셨다면, 그분은 당신이 그 사명을 감당하게끔 당신을 준비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사를 확실하게 확인한다.

당신이 일단 소명을 확신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전심으로 추구해야 하며, 아무런 장애물도 방애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단지 하나님이 그분께서 그들이 하기를 바라시는 일을 해주시기만 기다리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어주시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은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은 반드시 당신이 소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애쓸 것이지만, 당신은 그를 물리치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요한이 처음으로 요단 지역 주변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 모인 청중이 나중의 청중보다 훨씬 적었고, 그는 사람들의 조롱과 박해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자신의 사역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요한의 첫 번째 영적 자질은 바로 요한은 자신의 소명을 알았고 그것을 추구하였다는 것이다.

요한의 두 번째 자질(John’s Second Quality)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1-2).

예수님은 요한의 단순한 메시지를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흡족히 여기셨는데, 그것은 그 메시지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늘 전파하셨던 메시지와 같았기 때문이다(마 4:17을 보라).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 – 죄의 삶에서 의로운 삶으로 돌이키는 것 – 하라고 전파하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개로 시작하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현대적인 복음 전도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종래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의미 없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느낌의 욕구”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그 기도를 하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단지 행위로써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만 인정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가고 싶을 만큼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는 것처럼 그들을 보았다 —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는 엄숙하게 그들에게 다가올 진노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그들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변경하지 않을 경우 멸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했다.

그러므로 모든 제자 삼는 사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요한의 두 번째 영적 자질은 바로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회개가 첫 번째 단계임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요한의 세 번째 자질(John’s Third Quality)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마 3:4).

요한은 확실히 현대의 “성공적인 설교자”의 그림과는 맞지 않다. 사실, 그들은 절대로 요한과 같은 설교자를 그들의 교회에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땅의 보물을 추구하거나 겉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이심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소박한 삶을 살았고, 그의 생활방식은 누구도 실족하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동기가 돈이 아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이득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전 세계 많은 현대적인 사역자들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예수님을 잘못 전한 탓에 그리스도의 사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설교자가 될 수 있는 요한의 세 번째 자질은 바로 세례 요한은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요한의 네번째 자질(John’s Fourth Quality)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7-8).

요한은 사역이 전개됨에 따라 더욱 많은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의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았다. 세례가 인기를 얻기 시작함으로 인해, 요한은 심지어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동기를 의심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단까지 찾아왔다(마 3:7). 그는 많은 사람이 단지 분위기에 편승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들의 모든 속임수를 까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누구도 단지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거나 회개를 입으로 한다고 하여 지옥으로부터 구해준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회개는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고 경고했다.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인해 구원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요한은 그런 생각의 오류를 폭로하였다.

요한의 네번째 칭찬할만한 자질은 바로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진실을 말할 수 있었으며, 종래로 회개하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에게 천국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한의 다섯 번째 자질(John’s Fifth Quality)

요한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으며 그들의 자기기만을 북돋아 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들의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마 3:6). 그는 그에게 나아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였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0, 12).

요한은 지옥에 관한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혼을 얻는 데 노력하기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더 원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종종 회피된다. 요한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주제를 선포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은 불에 던져질 것이다.

만일 요한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는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어둠과 죽음의 선지자”, “지옥의 유황불 설교자”, “구도자 맞춤형”이 아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율법주의”이거나 “독선적”이라고 비난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신 설교자이었다. 그의 다섯 번째 자질은 바로 요한은 지옥에 대해 설교했으며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지를 명확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요한의 메시지를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다(눅 3:18).

요한의 여섯 번째 자질(John’s Sixth Quality)

비록 요한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그는 예수님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항상 그의 주님을 높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요한의 자기 평가는 오늘날 “사역자들”에 의해 너무 자주 과시되는 교만과는 많은 대조를 이룬다. 그들의 다채로운 사역 잡지는 온통 그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며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공작새처럼 교회 강단에서 으스대며, 회중들 앞에서 스스로를 높인다. 그들은 거만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 일부는 심지어 천사들과 하나님까지 명령한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것은 비천한 노예의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 나아오셨을 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였으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안 즉시로 모든 사람에게 그분을 가리키며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요한의 겸손한 좌우명이 되었다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설교자가 되도록 한 여섯 번째 자질은 바로 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높이려는 욕구가 없었다.

 

요한의 일곱 번째 자질(John’s Seventh Quality)

현대의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종종 모호한 말로 설교한다. 이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하나님은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설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진짜와 가짜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 같은 설교에 “아멘”으로 응답할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또한, 세상의 수치스러운 죄는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면서 교회 내의 유사한 죄에 대한 언급은 피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포르노에 대해서는 호되게 꾸짖지만, 교구민들이 준성인 영화와 부도덕한 비디오를 관람하고 심지어 수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두려워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나 요한은 구체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0-14).

요한의 여섯 가지 특정된 지침 중 다섯 가지는 돈이나 물질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요한은 청지기직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황금률과 두 번째 큰 계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요한은 새로운 “신자”가 이렇게 “어려운”개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몇 년 동안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청지기직은 처음부터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또 다른 요점을 이끌어낸다. 요한은 사소한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지 않고, 의복과 외적인 거룩함에 대한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율법의 더 중한 바”(마 23:23)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았다. 그 의미인즉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기본적인 필수품이 부족한 사람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성실하게 대하고, 자기가 소유한 것에 만족하라는 뜻이다.

요한의 예수님께 사랑받는 일곱 번째 자질은 다음과 같다. 요한은 모호한 일반론식 설교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심지어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초점을 가장 중요한 것에만 두었다.

 

결론(In Conclusion)

물론, 목사나 교사의 사역은 요한의 주제보다 더 광범위한 특징이 있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설교하였다. 목사들과 교사들은 주로 이미 회개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과 신약의 서신서 기록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의 청중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날 목사들은 죄인들을 마치도 성도처럼 여기고 설교한다. 단지 사람들이 교회 건물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구원을 확신시켜주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은 아니다. 특히 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본질적인 구별이 없다면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백만 명의 “세례 요한”같은 설교자가 교회강단에서 설교하기를 절박하게 수요하고 있다. 당신은 이 도전에 응할 것인가? 당신은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설교자 중 한 명이 되고 싶은가?

제 7 장 (Chapter Seven)

성경적 해석(Biblical Interpretation)

바울은 서신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네가 네 자신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강조 추가).

사역자마다 이 권면을 마음속에 새기고, 우선 먼저 자신을 살펴 경건의 좋은 본을 세워야 한다.

둘째, 그는 응당 자신의 가르침에 각별히 주의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위의 인용구절에 쓴 것처럼 대로 그의 구원과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의 구원은 그가 가르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 만일 사역자가 거짓 교리를 포용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그와 타인에게 영원한 불행을 줄 수 있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변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님과 그분의 말씀을 주셔서 그를 진리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잘못된 동기를 가진 사역자들은 종종 앵무새처럼 다른 인기 있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거나, 스스로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가르침에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역자는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의 동기가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2)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부유하고, 힘 있고,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닌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 온전히 설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는 말씀에 대해 철저하고 균형 잡힌 이해를 갖기 위해서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한, 이렇게 썼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은 사역자가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할 학문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그가 말씀을 열심히 연구할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므로 그는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가 어떤 성경 구절이든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뜻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지를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어떤 저자 또는 강사가 의도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상식을 기반으로 한 특정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규칙을 고려할 것이다. 그 세 가지는, (1)지능적으로 읽기, (2)문맥으로 읽기, 그리고 (3)정직하게 읽기이다.

첫 번째 규칙: 지능적으로 읽기. 당신이 읽은 것이 비유나 상징적으로 이해하도록 분명히 의도되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성경은 모든 문학처럼, 비유, 과장법의인법 등 수사법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비유는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비교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비유가 포함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하나의 비유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떡이 문자 그대로 그분의 몸이고, 그들이 마신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그분의 피라고 뜻하셨을까?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명백하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은 떡과 포도주라고 말씀하시며, 어느 시점에도 떡과 포도주가 몸과 피로 변화되었다는 말씀은 없다.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의 서신서에서 그런 변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제자가 이렇게 쉽게 식인종이 되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일부는 “하지만,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는 그분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겠다!”라고 반박한다.

예수님은 그분이 문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10:9을 보라). 그분은 문자 그대로 경첩과 손잡이가 있는 문이 되었는가? 예수님은 그분은 포도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15:5을 보라).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포도 나무가 되셨는가? 우리는 문자 그대로 포도 나무 가지가 되었는가? 예수님은 그분은 세상의 빛이며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요 9:5; 6:41을 보라). 예수님은 또한, 햇빛이고 한 덩어리의 떡이신가?

분명히,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비유라는 수사법을 사용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한 부분을 비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문과 포도나무와 같다.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분명히 비유이다. 포도주는 그분의 피(어떤 면에서)와 같았고, 떡은 그분의 몸(어떤 면에서)과 같았다.

그리스도의 비유(Christ’s Parables)

그리스도의 비유는 모두 직유이다. 직유는 은유와 비슷하지만, 항상 같이, 처럼, 듯이 등 단어들과 함께 쓰인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영적인 교훈을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가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비유의 세세한 부분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은유와 직유는 항상 유사성이 끝나고 차이점의 시작하는 곳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내에게 “당신의 눈은 호수 같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의 눈이 푸르고 깊어 매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곳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들이 앉으며, 그리고 겨울에는 그곳이 얼음으로 꽁꽁 얼어 붙을거라는 뜻이 아니다.

아래에 예수님이 직유로 하신 세 가지 비유를 고려해보겠는데, 먼저 그물의 비유부터 보도록 하자.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7-50).

천국과 그물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매우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 사람들이 그물 안의 물고기를 좋은 것과 못된 것으로 가르는 것처럼 천국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어느 날인가 현재 함께 살고 있던 악인과 의인은 분리될 것이다. 하지만 유사성은 그곳에서 끝난다. 물고기는 헤엄치나 사람은 걸어 다닌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가려내나 천사들은 의인과 악인을 가려낸다. 물고기는 조리 한 후에 맛을 얼마나 잘 내느냐에 의해 판단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판단된다.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지만, 나쁜 물고기는 버려진다.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만, 악인은 지옥에 던져진다.

이 비유는 비교되는 사물들이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은유와 직유가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비교임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 차이점이 실제로 닮은 점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좋은 물고기”는 실제로 불에 구워져 조리되지만, “나쁜 물고기”는 물속으로 돌아가 한동안 더 살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비유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든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 오려는 “그물식 전도”전략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해변이 전도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교회의 휴거가 환란 기간의 끝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선택당한 물고기들은 그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선택받았기에 우리의 구원도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에 부당한 중요성을 강제적으로 부여하지 말라!

항상 준비되어 있으라(Remaining Ready)

예수님의 또 하나의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를 보도록 하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이 비유의 기본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것이 전부다.

내가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 비유를 그 당시 그분께 순종하며 따랐던 가장 가까운 제자 중 일부에게만(마 24:3; 막 13:3을 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도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이 비유는 지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도 그분이 실제로 재림하실 때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열 처녀는 처음에는 모두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중 다서명은 나중에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만일 신랑이 빨리 돌아 왔더라면, 열명 모두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명의 미련한 자와 다섯 명의 슬기 있는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칭 그리스도인 중 절반만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니다.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님을 나타내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가? 아니다.

신랑이 밤중에 돌아왔으므로 예수님도 한밤중에 재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아니다.

왜 신랑은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문에서 그들의 미련한 친구들을 찾아보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만일 신랑이 그렇게 하였다면, 미련한 자들이 궁극적으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므로 이 비유의 전체 중점을 망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미련한 처녀들이 등불이 꺼지므로 잠이 든 것처럼 미련한 신자들도 영적인 어둠 속에서 걷다가 영적으로 잠들게 되면 궁극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비유에 나오는 혼인 잔치가 미래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 혹은 세부적인 내용에 따른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까지이다.

열매를 맺으라(Bearing Fruit)

아마도 내가 들었던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최악의 해석은 한 목사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먼저 이 비유를 읽어 보자.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4-30).

한 목사의 해석을 보도록 하자.

곡식과 가라지가 자랄 때에는 모습이 똑같다. 아무도 어느 것이 곡식이고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 이 세상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누가 불신자인지 알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보다 그리스도께 더 많이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삶만 보아서는 구별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그분은 마지막에 신자들을 구별해 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의 요점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보면, 신자들은 실제로 불신자와 매우 많이 구별됨을 알 수 있다. 종들이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심어졌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라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라지를 선택하여 마지막에 거두어 내어 지옥에 던져질 악인들에 비유하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비유의 중점은 분명하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열매를 맺으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사는 악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의인들 가운데서 거두어 내어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분의 해석 이외의 어떠한 의미도 찾을 필요가 없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 가시니 제자가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6-43).

과장법(Hyperbole)

성경에서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된 수사법은 과장법이다. 과장법은 특정 사물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표현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녀의 아이에게 “나는 너에게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라고 천 번 전화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법이다. 성경에서 과장법의 예로 오른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 수 있다.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만일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우리 중에 오른손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그 손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오른손을 잃어야 할 것이다! 물론, 죄의 문제는 사실 우리 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으며, 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유혹과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의인법(Anthropomorphism)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세 번째 수사법은 의인법이다. 의인법은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 인간의 속성을 부여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5은 이렇게 썼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

이것은 틀림없이 비유이다. 왜냐하면,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하늘나라에서 바벨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무엇을 건설하는지 조사하셨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팔, 손, 코, 눈과 머리카락처럼 하나님의 몸의 부분들을 묘사하는 매 성경 말씀마다 의인법을 사용하였다고 본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처럼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강조 추가).

일부 사람은 우리는 자기 인식, 도덕적 책임, 이성의 능력 등 면에서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1:26과 아주 유사한 말씀을 몇 장 뒤에서 보게 된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강조 추가).

이 말씀은 틀림없이 셋이 그의 아버지와 신체적인 외모가 비슷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것이 창세기 5:3의 의미라면, 창세기 1:26의 같은 표현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상식적이고 온전한 해석은 그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또한, 일부 하나님을 본 성경 저자들의 그분에 관한 묘사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모세는 73명의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보았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만일 당신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손과 발을 가지셨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2]

선지자 다니엘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성부 하나님]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과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성자 하나님]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9-10, 13-14).

만일 당신이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하얀 머리털과 형체가 있어 왕좌에 앉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나는 성부 하나님은 비록 육과 피가 아닌 영이시지만(요 4:24을 보라),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영광스러운 형체를 가지셨다고 확신한다.

성경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부분은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논리적인 사로를 가진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다. 우리는 비유적 또는 상징적으로 쓰인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예언서들과 계시록은 상징으로 가득한데, 어떤 부분은 해석되었고, 어떤 부분은 해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으로 쓰인 부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두 번째 규칙: 문맥으로 읽으라. 모든 단락은 앞뒤 단락과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도 고려되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주요 원인은 앞뒤 문맥과 성경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맥을 떠나서 해석한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이 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시편 14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시 14:1)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강조 추가). 이제 이 구절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나는 어느 한 번 한 목사가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그 목사는 마태복음 3:11의 말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란 세례 요한의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이 구절을 근거로, 그는 설교하였다. 나는 그가 설교 중에 “당신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에게 불로 세례를 베푸시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우리가 “불의 세례를 받기”만 하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하려는 열심으로 가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불의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제단앞으로 불렀다.

불행하게도, 그 목사는 문맥을 떠나 성경을 해석하는 전형적인 실수를 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은 불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모두 해야 할 일은 해당 구절 앞의 두 구절과 뒤의 한 구절을 읽는 것이다. 먼저 앞의 두 구절부터 시작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9-10, 강조 추가).

우선 먼저, 우리는 적어도 요한의 청중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혈통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요한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요한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불 속에 던져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10절에서 말한 “불”은 11절에서 말한 불과 같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가 12절을 읽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강조 추가).

10절과 12절에서 요한이 말한 불은 지옥의 불이었다. 12절에서 그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두 그룹 – “곳간에 모아 들일” 알곡과,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울” 쭉정이로 나눌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였다.

앞뒤 구절에 비추어 보면, 요한은 11절에서 예수님이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세례를, 불신자들에게는 불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구절의 앞뒤 문맥뿐 아니라 신약의 나머지 말씀들도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이 “불의 세례”를 받았었다는 예를 찾을 수 있는가? 없다. 가장 흡사한 사건은 오순절 날 제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의 머리위에 나타났다는 누가의 묘사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종래로 그것이 “불의 세례”라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우리는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나 지시를 찾을 수 있는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 세례를 추구하지 말하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안전하다.

성경에서 나온 거짓 복음(A False Gospel Derived From Scripture)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와 교사들 때문에 종종 복음이 잘못 전파되고 있다.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짓 가르침은 도처에 널려 있다.

예를 들어,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에 의하여 받은 것이라는 에베소서 2:8의 말씀은 거짓 복음을 홍보하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앞뒤 문맥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많은 사람은 바울이 진술한 구원에 관해서 단지 은혜에 의하고, 하나의 선물이며,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경의 수백개의 증언에 반해서 구원과 거룩함 사이에는 아무 연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부는 심지어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 무시됨으로써 성경이 잘못 해석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우선, 이 성경 말씀이 전반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생각해보자.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등식에서 은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고, 죽은 것이며,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약2:14-26을 보라). 따라서 바울은 거룩함이 구원과 관계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오직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에만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구원의 결과는 항상 순종과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다음 구절을 보더라도 이 점을 입증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재창조된 모든 이유는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순종함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바울의 구원 등식은 다음과 같다.

은혜 + 믿음 = 구원 + 순종

즉, 은혜 더하기 믿음은 구원 더하기 순종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에 의해 응답받는 경우, 그 결과는 항상 구원과 선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문맥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은 아래와 같은 등식을 지어낸다.

은혜 + 믿음 – 순종 = 구원

즉, 은혜에 순종이 없는 믿음을 더하면 구원과 같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한 어디까지나 이단이다.

만일 우리가 바울의 말의 맥락을 조금 더 읽는다면, 우리는 곧 에베소의 상황은 바울이 설교했던 모든 곳과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의 새롭게 회심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의 의식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행위”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쓸 때 마음속에 생각했던 것이 바로 할례와 율법적인 의식이었다(엡 2:11-22을 보라).

만일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 쓴 바울의 서신을 좀 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바울이 거룩함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3-6, 강조 추가).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지 않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한다고 믿었다면, 그는 이러한 내용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에베소서 2:8-9에 기록된 말씀 속에 담긴 바울의 의도된 의미는 오직 그가 에베소에 쓴 서신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때에만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갈라디아인의 패배(The Galatian Fiasco)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로 문맥을 떠나 해석되었다. 그 결과 복음이 왜곡되었는데, 이 점은 곧바로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쓴 바울서신의 전반적인 주제는 “율법에 대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거룩함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작정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선, 우리는 바울이 다시 한 번 갈라디아에 와서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반복적으로 할례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이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의 주안점이었기 때문이었다(갈 2:3, 7-9, 12; 5:2-3, 6, 11; 6:12-13,15을 보라).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너무 순종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안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닌 할례를 행하고 자기의 노력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데 의지할까봐 우려했다.

우리가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을 전반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가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8-21, 강조 추가).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들이 거룩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려 했었다면, 그는 그 같은 내용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폐하고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신자를 거룩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구원을 이룬다.

할례나 무할례자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이 모든 것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보여준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문맥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뻔뻔스럽게 이런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마음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번은 한 목사가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롬 2:4)고 말씀하시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따라서, 그의 말에 따르면, 복음을 전파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마도 사람들을 회개하게 인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목사가 로마서 2장에서 인용한 구절의 앞뒤 구절을 읽어보면, 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거룩한 진노로 에워 쌌음을 발견하게 된다!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그 목사가 말한 것이 바울의 의도와 같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롬 2:2-9, 강조 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하나님이 진노를 늦추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는 설교자들의 예로 가득한 성경의 큰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역자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성경의 일관성(Scripture’s Consistency)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전후 맥락을 신뢰하여 특정 구절에서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한 구절에서 다른 구절과 충돌되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우리는 두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조화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산상수훈 중 여러 곳에서, 구약 성경의 도덕적 율법에 모순되거나 심지어 그것을 수정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또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 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8-39).

예수님은 이 계명을 모세의 율법에서 직접 인용하신 후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도덕성에 대한 마음을 바꾸셨는가? 복수하는 것이 구약에서는 허용하는 행위였지만, 신약에서는 아닌가? 문맥을 보면 우리한테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마 5:1-2을 보라), 그들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회당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미 문맥을 무시하고 가르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왜곡된 후 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항상 사소한 잘못에 대해 개인적인 복수를 하라는 뜻으로 그 계명이 해석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실, 모세의 율법에서 복수는 그분의 것이고(신 32:35을 보라), 사람은 마땅히 그들의 원수에게 선을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출 23:4-5을 보라). 그러나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계명을 무시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방식대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편리를 주었다.[3] 그들은 문맥을 무시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주신 계명들 가운데서 발견된다(출21:22-24; 신 19:15-21을 보라). 하나님께서 재판제도를 세우신 자체가 개인적인 복수에 대해 기뻐하시지 않음을 보여준다. 증거를 조사하는 공정한 재판장은 피해를 당하거나 편견이 있는 개인들보다 정의를 훨씬 더 잘 행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법정과 재판장들이 공정하게 범죄를 처벌할 것을 기대하신다. 따라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을 받고 있던 그의 청중들에게, 이미 모세의 율법에 있지만, 바리새인들에 의해 왜곡된, 개인 복수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도록 돕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분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어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단지 그것의 원래 의미를 보여주셨을 뿐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법정까지 갈 수 있는 큰 분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료에 의해 받은 어떠한 피해나 고통도 그냥 넘어가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법정을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도 동료 신자(또는 불신자)에 의해 받은 어떠한 피해나 고통도 그냥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신약 성경은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신자의 중재를 도움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6:1-6을 보라). 그리고 큰 침해에 관해서 그리스도인과 불신자가 법정까지 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큰 침해란 당신의 눈 또는 이가 뽑힐 정도로 피해를 입는 것을 말한다! 사소한 침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뺨을 맞거나, 또는 작은 일(옷 같은 것) 때문에 고소당하거나, 또는 1마일을 걷도록 강요당하는 것 같은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본받고 무지한 죄인들과 악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이 같은 사로 대로,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생각으로, 일부 마음 좋은 신자들은 그들에게서 물건을 훔친 사람들에 대해 법적 고소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뺨을 돌려대는” 줄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도둑들이 다시 훔칠 수 있도록 방임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범죄에 대한 결과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도둑에 의해 도난당한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해 사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둑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뺨을 때리는 것 같은 사소한 침해를 주었을 때에는 그를 법정에 고소하거나 다시 때리지 말고 그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라.

 

신약에 근거하여 구약을 해석하라(Interpreting the Old in Light of the New)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할 뿐 아니라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부 신실한 신자들은 모세의 음식 법을 읽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율법에 따라 자신의 식단을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신약 성경의 두 구절만 읽었더라면 모세의 음식 법은 새 언약 아래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 7:18-19).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1-5).

새 언약 아래에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전 9:20-21을 보라). 비록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을 분명히 인정하셨지만(따라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율법안에 통합하셨다), 본인이나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음식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이 모두 회심한 유대인이었으므로 그들의 문화적인 신념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음식 법을 계속하여 지켰음이 분명하다(행 10:9-14).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모세의 음식 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주변의 유대인들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은 것이다(행 15:1-21을 보라). 따라서, 그들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음식 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 중 일부는 또한,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자신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롬 14:1을 보라).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념 때문에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그런 신념이 근거가 없더라도), 그는 오해에 대한 심판보다는 헌신에 대한 칭찬을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신념으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두 부류의 사람은 마땅히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롬 14:1-23을 보라).

성경은 점진적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항상 가장 오래된 계시(구약 성경)는 가장 새로운 계시(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 중에 어느 것도 모순되는 것이 없으며 항상 상호 보완적이다.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배경(Cultural and Historical Context)

 

가능한 한, 우리는 또한,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 구절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 속의 한 상황이 처해 있는 독특한 측면인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요해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놓쳤을 수도 있는 통찰력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이것은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좋은 성경공부는 보통 이 방면의 도움을 포함한다.

다음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적 또는 문화적 정보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지에 대한 몇 가지 예이다.

1.) 우리는 때때로 성경에서 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가거나(행 10:9을 보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막 2:4을 보라). 성경이 씌어질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정집의 지붕은 일반적으로 평평했고, 대부분의 집은 그 평지붕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외부에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한테 도움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어떤 성경 인물이 지붕을 올라타고 굴뚝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2.) 우리가 마가복음 11:12-14에서 예수님이 “무화과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음을 저주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가 제 계절이 아닐지라도 보통 몇 개의 열매는 맺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예수님의 기대가 불합리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3.) 우리는 누가복음7:37-48에서 한 여자가 예수님이 식사하고 계시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갔음을 읽게 된다. 성경은 그녀가 예수님의 뒤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식탁 위에 앉아서 식사하시는 중에 어떻게 이런 일이 진행될 수 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녀가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 갔을까? 그녀는 어떻게 식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빠져나갔을까?

그 답은 “식탁에 기대어 앉으셨다”(눅 7:37, ESV)는 누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사람은 식사할 때 낮은 식탁을 에워싸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한쪽 팔로 몸을 받쳐 세우고 다른 팔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예수님은 이 자세로 그 여자에게 향유를 부음 받았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하려고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요한은 예수님께 등을 돌린 상태로 그분의 옆에 누워 있다가 예수님의 품에 허리를 기대고 직접 질문하였을 것이다(요 13:23-25을 보라).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식탁의 양쪽에 제자가 여섯 명씩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화가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의복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A Common Question About Clothes)

나는 종종 전 세계의 목사들로부터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 “성경에서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 여자는 바지를 입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일부 해석규칙들과 약간의 문화적 배경을 적용하여 대답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다.

우선, 성경에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지 못한다)고한 말씀을 보도록 하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우리는 먼저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부터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을 금하는 것이 그분의 목표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의도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스라엘에는 바지를 입는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지는 남성의 옷이나 사람의 옷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사실, 사람들이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 남자들이 입은 의복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에게 있어서 더 많이는 여자 의복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문화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사람이 이성의 옷을 입는 것은 주님에 가증한 것임을 읽었다. 그것은 꽤 심각한 일이다. 만일 한 남자가 여자의 수건을 3초 동안 머리에 쓰고 있는다면, 그것만으로 그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존재가 될까? 아주 의심스럽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성으로 보이려고 입는 것을 반대하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려고 할까? 그것은 사람들이 동성을 유혹하고 싶어하기 때문인데 이런 증상을 일명 복장도착증이라고 하는 데 성도착의 일종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이 왜 하나님께 가증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여자가 복장도착자가 아닌 이상, 신명기 22:5을 근거로 그녀가 바지를 입는 것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녀가 여자로 보이는 이상, 그녀가 바지를 입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은 여자들은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딤전 2:9을 보라), 몸에 꼭 맞고 노출이 심한 바지는(몸에 꼭 맞는 옷과 치마도 마찬가지다) 부적절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들을 정욕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 국가들의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착용하는 옷들은 완전히 부적절하며, 이런 옷들은 개발 도상국에서 매춘부들만 착용한다. 어떤 여성 그리스도인도 “섹시” 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

몇 가지 그밖의 생각들(A Few Other Thoughts)

흥미로운 것은, 내가 종래로 중국의 목회자들로부터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 여성들이 오랫동안 바지를 입어왔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단지 대부분 여성들이 바지를 입지 않는 나라의 목회자들로부터 여성과 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었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적 편견을 보여준다.

또한, 나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남자들이 전통적으로 롱기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치마처럼 보이는 의복을 입는 미얀마에서는 여성 사역자들이 종래로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여성과 남성의 의류구성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문화적인 이해를 강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수많은 남자들이 신명기 22장5절 말씀에 따라 여자들이 바지를 착용하지 않기를 기대하면서도 왜 레위기 19장27절 말씀은 자신한테 적용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은 손상하지 말며(레 19:27).

어떻게 남자들이 자기들은, 레위기 19:27의 말씀을 거역하여, 그들을 여자들로부터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하나님이 주신 수염을 모두 깎으면서,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바지를 착용하는 여자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조금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부수적으로, 약간의 역사적인 자료는 우리가 레위기 19:27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얼굴 주위의 수염을 깎는 것은 이교도의 우상 숭배 의식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이방 우상에 헌신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Who is Speaking?)

우리는 항상 주어진 성경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유의해야 하는 데 그런 문맥에 관한 정보는 우리가 정확하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록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성경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은 아니다. 무슨 뜻일까?

성경의 많은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속의 사람들이 한 말들이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욥과 그의 친구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인용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이 오류라고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욥과 그의 친구들은 서른네 장에 걸쳐 변론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 말들을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만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 그분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분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옳지 못한 말을 한 것에 대해 질책하셨다(욥38-42을 보라).

신약 성경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똑같이 주의하여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 중, 몇 곳에서 어떤 부분은 자기만의 견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고전 7:12,25-26,40).

누구에게 한 말인가?(Who is Being Addressed?)

우리는 주어진 성경 구절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뿐 아니라, 또한,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을 적용해야 한다고 잘못 해석할 수 있거나, 또는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을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는 시편 37:4의 약속이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지만, 그 약속은 그것을 읽거나 알고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까? 아니다. 우리가 문맥을 읽어보면, 겨우 다섯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3-4).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 말한 것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8-30).

일부 교회권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물질로 지원하는 사람은 “백배를 돌려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약속이 그런 사람들에게 적용될까? 아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 그와 다른 제자가 받을 상이 무엇인가 하고 여쭸던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제로 가족, 전토, 집을 떠난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항상 백배를 돌려받는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초점을 주로 집과 전토에 두지, 자식이나 박해에 두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은 집을 떠난 사람은 대가로 백 개의 주택을 보상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이 그들의 가족과 집을 떠나면, 그들의 새로운 영적인 가족들은 그들의 집을 개방하여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것이라는 뜻이다. 진정한 제자들은 소유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마지막 예(A Final Example)

 

사람들이 예수님의 “감람산 강론”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4-25장의 말씀을 읽을 때, 일부는 그분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 말씀들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적용거리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악한 종의 비유와 열 처녀의 비유를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생각하며 읽는다. 하지만, 내가 이미 말했듯이, 두 비유는 모두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의 일부에게 하신 것이다(마 24:3; 막 13:3을 보라). 그러므로 만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준비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경고받을 필요성이 있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감람산 강론에서의 예수님의 경고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며, 또한,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세 번째 규칙: 정직하게 읽기. 당신의 신학을 말씀에 강제적으로 주입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믿는 것과 모순되는 말씀을 읽었다면, 그 말씀을 바꾸려 하지 말고, 당신이 믿고 있던 것을 바꾸라.

우리는 모두 사전에 형성된 편견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종종 성경을 정직하게 읽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학을 다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성경 말씀에 강요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때론 심지어 우리의 교리를 뒷받침해줄 말씀을 성경에서 사냥하며 우리의 믿음과 위배되는 것은 무시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proof-texting)라고 한다.

아래의 것은 내가 최근에 부딪힌 신학을 말씀에 강요한 사례이다. 한 교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11:28-29을 읽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그리고는 교사는 계속하여 예수님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쉼을 주신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쉼(아마도)은 11장 28절의 구원을 받음으로 얻는 쉼이고, 두 번째 쉼은 11장 29절의 제자가 받는 쉼이라고 했다. 첫 번째 쉼은 예수님 나아 감으로 받고, 두 번째 쉼은 그분을 주님으로 삼거나, 그분의 멍에를 짐으로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의미하는 바일까? 아니, 말씀을 보면 그런 의미가 명시되지도 않았고 암시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두 가지 쉼을 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에게 한 가지 쉼을 주시며, 그 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명백한 의미이다.

왜 그 교사는 그러한 해석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말씀의 명백한 의미가 천국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자와 제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자신의 믿음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말씀 구절을 정직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전에 이 책에서 인용한 많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 교사의 신학을 고려해보면 그의 해석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머지 부분과 맥락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 아무 데도 천국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자와 제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는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제자다. 제자가 아닌 사람은 신자도 아니다. 제자가 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열매이다.

우리 모두 순결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성경을 읽기 위해 노력하자.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 결과 그리스도께 더 큰 헌신과 순종을 하게 될 것이다.

 


[1]분명한 것은, 바울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구원받은 디모데가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2]모세도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그분의 등을 본 적이 한 번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손으로 모세를 덮었다가 손을 거둠으로써 모세가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출 33:18-23을 보라.

[3]또한,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그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좀전의 설교 중에 말씀하셨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마 5:20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구체적인 부족점을 드러내셨다.

제 6 장 (Chapter Six)

가르침의 사역(The Ministry of Teaching)

이 장에서 우리는 가르침의 사역의 여러 측면을 고려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고 가르치기 위해서는[1]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2] 목사/장로/감독, 교사(물론), 그리고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모두 가르침의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이전에 강조한 바와 같이, 제자 삼는 목사거나 사역자는 가르칠 때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준 후 말로 가르쳐야 한다. 그는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매우 성공적인 제자 삼는 사역자인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가 되라(고전 11:1).

이것은 모든 사역자의 목표여야 한다 — 자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정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본받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어떠한 인생을 사는지 알고 싶다면, 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대조적으로, 나는 전에 목회했던 교회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를 따라 하지 마십시오…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비록 그 당시 사람들이 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따라야 할 좋은 본이 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사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인정하였고,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했던 말과는 너무 달랐다.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우리를 본받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역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의 사역자들을 그들의 본보기로 삼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연합의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라(Teaching Unity by Example)

본을 보여주며 가르치라는 개념을 하나의 특정 주제인 연합의 주제에 적용해보자. 모든 목사/장로/감독들은 그들이 인도하는 양들이 연합할 것을 원한다. 그들은 그들의 지역 내 지체들 사이의 분열을 싫어한다. 그들은 당을 짓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13:34-35을 보라).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지도자는 그들의 양 떼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자신이 본을 보여줌으로써 가르쳐야 할 사역자인 우리는 자주 삶 속에서 사랑과 연합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목회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을 보여줄 때, 우리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회중들에게 그들이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하기를 기대한다.

사실, 예수님의 연합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지도자들에게 하신 것으로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예수님이 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목사들은 종종 이 성경 구절을 사용하여 자신의 회중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데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이 구절의 말씀은 지도자들인 12명의 사도를 향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미래 교회들이 분열되거나 서로 경쟁하는 경우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지도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그 시대 문화적인 맥락에서, 예수님은 가정 하인들의 가장 낮은 작업 중의 하나인,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써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 만일 그분이 역사의 다른 시간에 다른 문화를 방문했었다면, 그분은 화장실을 파거나 제자들의 쓰레기통을 청소했을 수도 있다. 그분의 현대 지도자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러한 사랑과 겸손함을 보여주기를 원할까?

예수님은 한 시간도 흐르기 전 그곳에서 이 중요한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몇 분 후, 예수님은 그분의 미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 말씀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원래는 다른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관해서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이었다.

다시 한 번, 단 몇 분 후,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2-13).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지도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몇초 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그 뒤로 몇 분이 지난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 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강조 추가).

마지막으로, 불과 몇 초 후에,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기도하시는 중에 제자들은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강조 추가).

따라서 같은 공간에서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예수님은 여섯 번이나 그분의 미래 지도자들에게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서로 겸손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통하여 연합을 이루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 매우 중요했다. 그들의 연합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는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How Well Are We Doing?)

불행하게도, 우리가 우리의 양들이 사랑으로 연합되기를 바랄 때,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서로 경쟁하고 다른 교회의 대가로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교리가 다른 목회자들과의 교제를 피한다. 우리는 심지어 교회 건물 앞에 표어를 써 붙여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합되지 않음을 광고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른 교회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우리가 연합되지 않음을 잘 교육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매우 분열된 기관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모습은 우리의 설교보다 회중들에게 연합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 지도자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보통 그리스도인이 연합하고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 또는 방법은 회개이다. 우리는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본을 보여준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분열하는 장벽들을 제거하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교리적으로 서로 다른 목회자들을 포함한 다른 목회자들과 사역자들과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거듭나지 않았거나, 예수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개인 이익을 위해 사역하는 목회자들과 교제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며,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지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그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로 알아낼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목사들과 사역자들,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자매들을 가리킨다. 만일 당신이 목사라면, 당신은 다른 목사들을 사랑하고, 당신의 양들 앞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을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주위의 다른 목회자들한테 가서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로막힌 벽들을 부숴야 한다. 그런 다음 정기적으로 함께 만나서 식사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하고, 기도하는 위한 모임들을 가지도록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궁극적으로 분열의 경향이 있는 교리들에 대해 논의하기를 즐기게 되고, 논의하는 것들에 대해 동의 여부를 떠나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내가 결과적으로 교리가 부동한 사역자들의 말들을 기꺼이 듣기 시작하였을 때, 나의 삶과 사역은 크게 풍성하게 되었다. 나는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 인해 수년 동안 많은 축복을 놏쳤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교회거나 가정교회 모임에 다른 목회자들을 초대하여 설교하게 하거나, 당신의 교회에서 다른 교회거나 가정교회 모임들과 합동예배를 드림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연합을 보여줄 수 있다.

당신은 당신 교회의 이름을 변경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머지 지체들과의 불통일을 세상에 광고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소속된 교단이거나 특정한 단체에서 퇴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알고, 당신은 예수님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많은 다른 교회들이 아닌,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이것이 급진적으로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종래로 분명하게 의도하신 적이 없는 것들을 지켜야만 하는가? 왜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가? 성경에는 교단 또는 특별한 단체에 관한 언급이 없다. 고린도교회가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들에 따라 분열되었을 때, 바울은 그들의 분열은 그들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어린아이임을 드러냈다고 단호하게 질책하였다(고전 3:1-7). 우리의 분열도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모든 것은 피해야 한다. 가정교회는 교회이름을 짓거나 어떠한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피면 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개별적인 교회들은 오직 그들이 만나는 집에 의해 식별되었다. 교회 안의 그룹들은 오직 그들이 위치한 도시들에 의해 식별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교회의 지체로 여겼다.

우리한테는 오직 한 왕과 한 나라가 있다. 누구든지 신자들이거나 교회들이 그를 알아주도록 스스로 높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 영광은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라고 말씀하신 왕앞에 설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시금 사역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 응당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의 본을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앞에 보여준 그들의 본은 가장 영향력 있는 가르침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신자들에게 썼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강조 추가).

가르침의 내용(What to Teach)

바울처럼, 제자 삼는 사역자는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골 1:28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바울처럼,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칠“(골 1:28 상,강조 추가) 것이다. 바울이 단지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대접만 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울과 함께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딤전 1:5)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그가 섬기는 사람들의 삶 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형상과 거룩함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데 그것이 바로 그가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신자들을 가르치는 이유이다. 그는 진리를 가르치고, 청중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라고 권면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게끔 가르쳐야 한다고 명령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마 28:19-20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것은 아무것도 홀시하지 않고 가르쳤다고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정기적으로 예수님의 계명이 기록되고 재강조된 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구절마다 가르친다.

이런 강해식 가르침은 그의 가르침을 균형 잡아준다. 우리가 주제별 메시지만 가르친다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에만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주제는 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해식 교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분의 훈계와 진노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축복뿐 아니라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가 사소한 주제를 크게 다루고,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할 가능성이 작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잘못이었다; 마 23:23-24.)

강해식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말라(Overcoming Fears of Expository Teaching)

많은 목사는 강해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 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그들의 회중들이 그들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잘난 척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누구도 성경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심지어 베드로도 바울이 쓴 몇 가지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벧후 3:16을 보라).

강해식으로 가르치는 목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에 부딪쳤을 때, 그는 단순히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의 회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다음 구절로 이동하여야 한다. 그는 또한, 그의 회중들이 성령님께 그의 이해를 도와주시도록 기도드리도록 부탁할 수 있다. 그의 겸손은 회중들에게 좋은 본이 되며 그 자체가 설교가 된다.

가정교회의 목사/장로/감독은 비공식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그룹을 가르칠 때 추가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가르침 중에 질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님이 연구되고 있는 말씀에 대해 그룹의 다른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 결과 모두가 더 효과적인 학습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칠 때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예수님은 많은 계명을 주셨고, 그분은 유대인 추종자들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잠시 후 이 책에서, 나는 산상수훈을 어떻게 강해식으로 가르칠지를 보여줄 것이다.

설교준비(Sermon Preparation)

신약 성경 어디에도 목사/장로/감독들이 많은 현대 사역자들의 관행대로, 개요 양식에 조리 정연한 중점과 실례를 적은 주간 연설/설교를 준비했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 가르치는 방식은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채택된 전통적인 그리스와 로마의 강론식보다는 유대인 방식을 따라 더 자연스럽고 상호 작용적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법정에 호출되었을 때 어떻게 변호할지 준비하지 말라고 하시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반박할 말씀들을 주실 거라고 약속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의 모임에서 목회자들을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이것은 목사가 기도하고 공부하면서 자신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골 3:16)려는 사역자들은 그들안에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목사여, 중요한 문제는 당신 자신이 성경에 빠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이 당신의 설교주제에 대해 지식과 열정으로 넘쳐 있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 더 준비해야 할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또한, 당신이 강해식 설교를 한다면, 연속적인 구절을 개요로 삼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당신이 해야 할 준비는 가르칠 구절들을 기도하면서 묵상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가정교회 목사라면, 상호작용적인 분위기 때문에 설교개요에 대한 필요성을 줄일 수 있다.

하나님이 그가 가르칠 때 도와주시라는 것을 믿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보상받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 자기만의 준비, 자신의 노트를 적게 의지하고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한다. 점차 당신은 믿음과 신심을 갖게 되며, 설교 노트를 적게 준비하게 되며, 개요만 준비하거나 개요를 준비하지 않아도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공공 실수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설교 할 때 준비된 노트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은 자존심에 뿌리내린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덜 근심하고 그와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 더 관심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준비된 설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가르침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준비된 노트대로만 대화한다면 얼마나 많은 교통이 저애받을지 생각해보라! 대화는 죽을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대화형 방식은 준비된 연설보다 더 진실해 보인다. 가르치는 것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연설을 듣고만 있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밖의 네 가지 생각들(Four More Thoughts)

(1) 일부 사역자들은 앵무새같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들에서 모든 설교 자료를 뽑아낸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놏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베낀 작가들의 오류를 전파할 가능성이 크다.

(2) 많은 목사는 종종 전통적인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의 방식을 모방한다. 예를 들어, 설교는 높고 빠르게 진행할 때 기름 부음 받는다고 일부 교회권에서는 주장한다. 그래서 교회 참석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치는 설교를 들어야만 한다. 현실은, 사람들이 단조로운 연설처럼, 과도한 고함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훨씬 더 매혹적이다. 또한, 설교는 훈계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큰소리로 하지만 가르침은 교육이기 때문에 보통 대화방식으로 한다.

(3) 수백 차례의 교회예배에서 설교 청취자들을 관찰한 결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너무 많은 설교자와 교사들은 사람들이 지루해하거나 또는 청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목사여, 지루해 보이는 사람은 정말로 지루해하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동안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사람은 듣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교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다. 만일 신실한 사람들이 사람들마저 지루해하거나 말씀을 듣고 있지 않다면, 당신의 설교는 개선되어야 한다. 더 많은 실례를 들어보라. 관련 예화를 들려주라. 비유를 들어보라. 단순하게 하라. 당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가르치라. 진심으로 하라. 자기 자신이 되라. 다양한 목소리로 진행하라. 가능한 한 많은 청취자와 시선을 맞추라. 얼굴 표정을 사용하라. 두손을 사용하라. 주변을 이동하면서 진행하라. 너무 길게 말하지 말라. 그룹이 작으면 적절한 시간에 사람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라.

(4) 모든 설교는 세 가지 중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적인 발상이다. 목표는 현대 설교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지, “내 양을 감동시키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가르침의 대상(Whom to Teach)

예수님의 모식에 따르면,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가 가르치는 대상을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사실이다. 예수님은 종종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보면 이점은 분명하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0-13).

그리스도의 비유를 깨달을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들한테만 있다. 회개할 기회를 거절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자들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거절 받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벧전 5:5을 보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물론,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뜻은 “값진 것을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주지 말라는 것이다”이다. 돼지는 진주의 귀중함을 모르며 마찬가지로 영적인 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이 값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실제로 듣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그 말씀을 최고로 생각하고 순종하려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영적인 돼지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가는 길에 진주 하나를 던져보고 그가 그 진주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된다. 만일 그가 그것을 무시한다면, 이 사람이 영적인 돼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돼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목사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항 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고 진작 떠났어야 했다.

, 염소, 돼지(The Sheep, Goats and Pigs)

사실, 당신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제자로 훈련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제자로 삼을 수가 없다. 많은 교회는 이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단지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이며,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이나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신학적 사실에 정신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돼지나 염소이지, 양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는 그들이 영적으로 돕고 섬겨야 할 진정한 양들은 정작 무시하면서, 이러한 돼지와 염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시간의 90%를 사용하고 있다! 목사여, 예수님은 당신이 염소나 돼지가 아닌 그분의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요 21:17을 보라)!

하지만 당신은 누가 양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은 교회에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늦게 떠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배우기에 갈급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일 뿐 아니라 언제든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온다. 그들은 소그룹에 소속되어 있다. 그들은 종종 질문한다. 그들은 주님을 기뻐한다. 그들은 섬길 기회를 찾고 있다.

목사여, 당신의 대부분 시간과 관심을 그 사람들에게 쏟아부으라. 그들은 제자이다. 당신의 교회에 참석하는 염소와 돼지들에게는 그들이 참을 수 있는 한 계속하여 복음을 전파하라. 만일 당신이 진정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들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그들이 힘이 있다면 당신을 교회에서 제거해버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공하면 당신이 떠날 때에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가정교회 모식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특별히 당신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서는!).

마찬가지로,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다(눅 9:60 을 보라). 당신은 왕들의 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당신의 위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매우 높으며 당신의 책임은 위대하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한 번씩 듣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복음을 두 번씩 말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제자 삼는 사역자가 되려면, 당신은 누구한테 가르쳐야 할지 선택해야 하며,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예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강조 추가).

목표에 도달하다(Reaching the Goal)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지만, 현대 교회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를 잠깐 상상해보라. 예수님이 부활 후 이 땅에 머물면서 현대 제도적 교회 같은 교회를 시작하고 그곳에서 30년간 목회했다고 상상해보라. 그분이 같은 회중들에게 주일마다 설교하신다고 상상해보라.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20년 동안 매주 주일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베드로가 요한한테 기대어 “우리가 똑같은 설교를 이미 열 번은 들었다”라고 귀에 속삭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리는 그런 장면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절대로 그분 자신이거나 사도들을 그런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특정한 시간 내에 특정한 방식으로 몇 명의 제자들을 삼으셨다. 약 3년의 기간 동안, 그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몇 명의 다른 제자들을 삼으셨다. 그분은 교회 건물에서 매주 주일마다 한 번씩 그들에게 설교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에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제자를 삼으셨다. 그분은 그분의 사명을 다하셨다.

그럼 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지 않을 일을 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시도하는가? 언제면 우리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을까? 왜 몇 년이 지나도, 우리의 제자들은 그들만의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가?

나의 요점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제자들은 정말로 더는 우리의 사역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질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자를 삼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설정한 목표를 달성할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할지를 보여 주셨다. 덧붙여,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는 지속적으로 제자를 삼고 지도자들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건강한 가정교회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설교자가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끝없는 순환에 빠지지 않는다.

정확한 동기(Right Motives)

제자를 삼도록 가르치는 데 성공하려면, 정확한 동기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누군가가 그릇된 동기로 사역하고 있을 때, 그는 그릇된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수많은 거짓과 편면적인 가르침으로 가득 찬 이유이다. 사역자의 동기가 인기를 얻어 다른 사람들 보기에 성공적이 되는 것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가장 슬픈 것은 그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여 인기를 누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동기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는 날이 올 때에,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아무런 상급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면,[3] 모두가 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그는 상을 받지 못했고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계급차이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물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약속하셨다(마 5:10-12; 요 16:33을 보라). 그들은 세상적인 성공, 인기와 부를 얻을 가능성이 작다. 그들이 얻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칭찬이다. 어떤 것을 얻기를 더 원하는가?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는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5-15).

바울은 자신을 터를 닦은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유했다. 아볼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후 그곳에 온 교사이고, 바울은 그를 이미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는 자에 비유했다.

바울과 아볼로는 모두 궁극적으로 자신의 공적의 이 아닌 에 따라 보상될 것이라고 한 것을 주목하라(3:13을 보라).

비유적으로 말할 때, 바울과 아볼로는 여섯 가지 부동한 재료로 하나님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데, 그중 세 가지 재료는 일반적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불에 타기 쉬우나, 나머지 세 가지는 흔치 않으며, 매우 비싸고 및 불에 타지 않는다. 어느 날, 각각의 건축 재료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받을 것이며, 나무, 풀과 짚은 불에 타 없어질 것이며 그들의 가치 없음과 현세적인 품질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중하고 영원한 공적을 대표하는 금, 은, 보석은 심판의 불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불에 타서 재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육체의 능력, 방법, 또는 지혜로 한 모든 일과 잘못된 동기로 한 모든 일도 같은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욕구에 의해 하는 모든 일은 보상되지 않는다고 경고하셨다(마 6:1-6,16-18을 보라). 이런 쓸모없는 일이 지금은 인간의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이 경고했다. 개인적으로, 만일 나의 공적이 나무, 풀 및 짚과 같은 종류에 속한다면, 나는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발견하고 싶다. 지금은 회개할 시간이 있다; 그때가 되면 너무 늦을 것이다.

우리의 동기를 점검하라(Checking Our Motives)

우리 동기에 대해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나도 분명히 그랬었다. 우리는 자신의 동기가 순수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는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점검해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과 은밀한 중에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선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바라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볼 때만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또는, 만일 우리가 사람들한테 잡히면 명성을 흐리는 수치스러운 죄들은 피하려 하지만, 아무도 알아낼 수 없는 죄들은 방종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각, 말과 행동을 아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려 한다면, 우리는 매 순간 일이 크든지 작든지 다른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분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동기가 올바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모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을 희생시키면서 교회출석만을 향상 시키기 위한 교회성장 유행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가르칠 것이며, 단지 세상적이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끌기 위한 인기주제에만 초점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또는 성경을 가르칠 때 전반 성경내에서의 문맥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한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명성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않을 것이며 단순하게 살고 우리의 양 떼들에게 좋은 청지기의 본을 수립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에 더 치중할 것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제자 삼는 것을 타격하는 하나의 교리(A Doctrine that Defeats Disciple-Making)

제자 삼는 사역자는 결코 제자를 삼는 목표를 위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결코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짓고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회개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보았다. 성경은, 우리가 알다시피, 오직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고 선언한다(계 2:11;3:5;21:7을 보라).

일부 현대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제자를 삼는 목표에 큰 피해를 주는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붙잡고 있다. 이런 교리들 중 미국에서 매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하나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 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거듭난 사람은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구원은 절대로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에, 구원을 받기 위해 기도했던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똑같은 은혜는 그들의 구원을 유지해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기타 관점들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거룩함에 대한 큰 손해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면 예수님께 순종할만한 동기는 없게 되는데 특히 순종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혜는 그분께 순종해야 할 책임은 면해주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단지 은혜에 의해서만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하였다(엡 2:8을 보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은혜와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며, 진정한 믿음은 항상 회개와 순종을 낳는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약 2:14-26을 보라).

그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지속적인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에 의존한다고 선언한 이유이다. 이 점을 증거하는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골로새 신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1-23, 강조 추가).

그것보다 더 명확할 수 없다. 오직 신학자만이 바울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하여 믿음안에 거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흠 없음을 확인해 주실 것이다. 이 같은 진리는 로마서 11:13-24, 고린도전서 15:1-2과 히브리서3:12-14, 10:38-39에서도 쓰여 있는데 그것은 최종적인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에 달려 있음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말씀들은 모두 만일이라는 조건적인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거룩함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Holiness)

신자가 죄를 범함으로 영생을 잃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많은 성경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아래와 같은 말씀들은 모두 각종 죄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지 못함을 확인하고 있다. 만일 한 신자가 다음의 바울이 나열한 죄들을 다시금 짓는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아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강조 추가).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수로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강조 추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5-6, 강조 추가).

모든 경우마다, 바울은 서신으로 신자들을 경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두 번씩 그들에게 미혹받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는 그가 어떤 신자들은 그가 나열한 죄들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만일 그들이 그분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지옥에 던져질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불신자들의 무리가 아닌 제자들에게(막 13:1-4을 보라) 했던 다음의 말씀들을 확인해보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2-51, 강조 추가).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야, 이 비유에서 나오는 믿음이 없는 종처럼 되지 말라.”[4]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츰 열 처녀의 비유를 계속했다. 열 명의 처녀들은 처음에는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중 다섯 명은 준비하지 않으므로 결혼잔치에서 제외되었다.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 너희[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는 말씀으로 이 비유를 마치셨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야, 다섯 명의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되지 말라”는 뜻이다. 만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경고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예수님은 인츰 그들에게 달란트 비유를 하셨다. 그것 또한, 같은 메시지였다. “주인한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그의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주인이 그에게 위탁한 것을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 모습이 되지 말라”는 내용이다. 비유의 끝에서, 주인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5:30)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메시지를 더는 명확하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신학자만이 그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도 예수님이 재림했을 때 순종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모두 지옥에 던져질 수 있는 위험에 놓여 있다. 만일 그런 가능성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 7:21을 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5]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의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사탄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려는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천국으로 향하는 좁은 길을 차단하고, 지옥으로 통하는 넓은 고속도로를 확대해가고 있다.[6]

제자 삼는 것을 방애하는 또 하나의 현대 교리(Another Modern Doctrine that Defeats Disciple-Making)

 

거룩함이 궁극적인 구원에 중요하지 않다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단지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을 가르치는 것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종 제자 삼는 것을 저애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설교자들이 종종 회중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은 그 말을 “하나님은 나의 순종 여부를 떠나서 나를 받아주고 열납하신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그 같은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보낸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확실히 정확하다. 그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분명히, 하나님은 그분이 지옥으로 보낸 사람은 열납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그분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옥으로 던져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맞는가? 그들이 당신한테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것 같은가? 당연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분께 혐오스러운 존재들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된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열납하거나 사랑하시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이 세상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잠시적인 자비로운 사랑이지 열납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분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심판을 늦추었으며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에게 용서받는 방법을 제공하셨다. 이로부터 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그들을 열납 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자식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은 느끼신 적은 없다. 오히려, 성경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시 103:13, 강조 추가)고 선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 자한테는 같은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법관이 살인범에게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하는 자비에 더 가깝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전파했던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 청중한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성경적인 설교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그들의 청중들을 경고하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열납하시지 않으며 그들은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그들의 생명은 극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알려주었다. 만일 그들이 청중들에게 단지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말만 했다면(수많은 현대 사역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의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으며 위험에 놓여 있지 않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God’s Hatred of Sinners)

 

오늘날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주 선언되는 반면, 성경은 종종 하나님이 죄인들을 미워함을 말씀한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5-6, 강조 추가).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시 11:5, 강조 추가).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라(렘 12:7-8, 강조 추가).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호 9:15).

위의 모든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함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미워한다고 하셨음을 주목하라.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사람을 그의 행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의 행위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죄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원하는 것이 맞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이 미워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열납하신다면, 그분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법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죄행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되며, 그들은 응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 우리는 죄행은 미워하면서, 범죄자를 열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람들(People Whom God Abhors)

성경은 하나님이 특정 개인들을 미워하신다고 단언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몇 종류의 죄인들을 싫어하시며, 그들은 그분께 가증스럽다고 선언한다. 다음의 인용된 성경 말씀들이 사람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하나님께 가증스럽다고 했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그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싫어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싫어하신다고 하였다.[7]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신 22:5, 강조 추가).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신 25:16, 강조 추가).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레 26:29-30, 강조 추가).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5-6, 강조 추가).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강조 추가).

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1:20, 강조 추가).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강조 추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 강조 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말씀들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죄인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면서 또한, 동시에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반드시 모든 사랑이 다 같은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일부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것을 “자비로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랑은 “…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람들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사랑하는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이 하나님이 죄인을 향한 사랑이다.

자비로운 사랑과 대조적인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열납하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얻거나 받은 것이다. 조건적인 사랑은 “나는…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일부 사람은 사랑이 조건적이 되면 더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을 하찮게 생각하는 데 그것은 순전히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곧 성경에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도 조건적인 사랑을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납하는 사랑은 멸시되지 말아야 한다. 열납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정한 자녀를 향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사랑이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보다 열납하는 사랑을 더 소망해야 할 것이다.

열납하는 사랑은 열등한 사랑인가? (Is Approving Love an Inferior Love?)

 

잠깐 멈추고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라: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사랑을 하기를 더 원하는가? – 자비로운 사랑인가 아니면 열납하는 사랑인가?”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기를 더 원함을 확신한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으며, 당신에게는 내가 당신을 좋아할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가? 아니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당신에게는 내가 존경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가 열납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할 것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연인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유지해주는 기본적인 사랑이다. 한 사람이 그의 배우자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 모든 열납하는 사랑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에, 그 혼인은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 혼인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자비로운 사랑의 덕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납하는 또는 조건적인 사랑은 열등한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비로운 사랑줄 수 있는 가장 칭찬할만한 사랑이라면, 받을 수 있는 가장 칭찬할만한 사랑은 열납하는 사랑이다. 또한, 열납하는 사랑이 하나님이 예수님께 가졌던 유일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정당한 존경을 받게끔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종래로 예수님께 한 방울의 자비로운 사랑도 품으신 적이 없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사랑받지 못할 만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증언하셨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납하는 사랑은 아무 잘못된 점이 없으며 모든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었으며 또한, 받기에 합당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강조 추가).

이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본을 따르고,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 그분은 이 구절에서 열납하는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능히 그리고 응당 그분의 사랑을 얻어야 하며,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 밖으로 나올 수도 있음을 알려주셨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것들은 거의 가르쳐지지 않고 있으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응당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강조 추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1,23, 강조 추가).

두 번째 인용구절에서, 예수님은 헌신하지 않은 신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이 그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가까이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실 것이고,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 사람안에 들어와서 함께 사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거듭남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 함께 거하신다(롬 8:9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께 순종하기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열납하는 사랑을 얻은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물론,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을 여전히 보유하고 계신다. 그들이 불순종할 때, 그분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그들을 용서할 준비되어 계신다.

결론(The Conclusion)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순종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이 그분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과 다름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죄인들을 단지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일시적이며 그들이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만 지속된다. 비록 그분이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 동시에, 그분은 그들의 성품을 열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그분의 거듭난 자녀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하신다. 그분은 그들이 회개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열납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거룩하게 성장해갈 때, 그분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실 이유가 점점 적어지고, 갈수록 열납하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바로 그들이 원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또한, 많은 현대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류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잠깐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다음의 익숙한 표현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보기 바란다.

1.)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지금보다 더 많거나 적게 사랑하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2.)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사랑을 멈추시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5.) 하나님은 죄인은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신다.

6.)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거나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위의 표현들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수 있거나 완전히 거짓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완전히 부정하고 많은 부분에서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을 잘못 표현했기 때문이다.

(1)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납하는 사랑을 더 많이 하시게 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들은 더 많이 순종하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납하는 사랑을 더 적게 하시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불순종하면 된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회개이다. 회개 후 그들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덜 사랑하시게 하는 것은 죽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유일한 사랑인 자비로운 사랑을 잃게 된다.

(2)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옛 죄로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잃게 되고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만 받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유일한 사랑인 자비로운 사랑은 중지된다.

(3)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은 당연히 조걱적인다. 심지어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도 조건적으로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한테만 적용된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끝나므로 그 사랑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다.

(4)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왜냐하면, 모든 죄인이나 성도들에 대해서 그분은 부동한 정도의 반대와 열납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죄인들과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죄인들 그들의 죄를 미워하신다. 그분이 죄인들을 자비로운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는 미워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분의 열납하는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분은 그들을 미워하신다.

(6)에 관해서는, 누구든지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을 쟁취해야 한다. 물론 아무도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쟁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7)에 관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열납하는 사랑은 확실히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은 제자 삼는 사역자는 응당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묘사한 것처럼 정확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누구도 속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 열납하는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거듭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 열납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사람들이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목표와 같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1]모든 신자는 대중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책임은 없으나, 그들이 제자를 삼을 때에는 일대일로 가르칠 책임은 있다(마 5:19; 28:19-20; 골 3:16; 히 5:12을 보라).

[2]복음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가르침의 한 형태로 간주되며 복음 전도자는 반드시 성경적으로 정확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3]내가 “만일”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사역하는 사람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며 그들은 분명히 지옥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잘못된 동기를 가진 진정한 사역자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의 정도라고 생각한다.

[4]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경고했으며 믿음이 없는 종은 신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일부 교사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장소가 천국의 외각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믿음이 없는 신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천국으로 그들을 환영 할 때까지 상급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일시적으로 슬퍼할 것이라는 것이다!

[5]물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작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구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은 용서받는다(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훈계받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훈계에도 마음이 강퍅해진다면, 그들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6]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신약 성경의 말씀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 18:21-35; 24:4-5, 11-13, 23-26, 42-51, 25:1-30; 눅 8:11-15; 11:24-28; 12:42-46; 요 6:66-71; 8:31, 51; 15:1-6; 행 11:21-23; 14:21-22; 롬 6:11-23; 8:12-14, 17, 11:20-22; 고전 9:23-27; 10:1-21; 11:29-32; 15:1-2; 고후 1:24; 11:2-4; 12:21-13:5; 갈 5:1-4, 6:7-9; 빌 2:12-16; 3:17-4:1; 골 1:21-23; 2:4-8, 18-19; 살전 3:1-8; 딤전 1:3-7, 18-20; 4:1-16; 5:5-6, 11-15, 6:9-12, 17-19, 20-21; 딤후 2:11-18; 3:13-15; 히 2:1-3; 3:6-19; 4:1-16; 5:8-9, 6:4-9, 10-20; 10:19-39; 12:1-17, 25-29; 약 1:12-16; 4:4-10; 5:19-20; 벧후 1:5-11; 2:1-22; 3:16-17; 요일 2:15-28; 5:16; 요이 6-9; 유 20-21; 계 2:7, 10-11, 17-26; 3:4-5, 8-12, 14-22; 21:7-8; 22:18-19. 무조건적인 영생보장의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증거로 제출하는 말씀들을 보면 단순히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그런 말씀들은 내가 나열한 말씀들과 조화를 이루게끔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들의 신실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나의 아내에게 나는 영원히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7]어떤 사람들은 죄인에 향한 하나님의 미움과 혐오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모두 구약에 있다고 주장할 수있다. 그러나 구약부터 신약까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마태복음 15:22-28에 기록된 예수님과 가나안 여자와의 만남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신약의 한 예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그녀의 간구에 대답조차 하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그녀를 개라고 부르기까지 하셨다. 그녀의 지속적인 믿음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시게 하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를 열납하는 사랑의 일종이라고 간주 할 수 없다(마태복음 23장을 보라).

제 5 장 (Chapter Five)

교회성장 (Church Growth)

당신이 목사라면 당연히 자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매우 일반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당신은 왜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마음속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교회가 성장함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존경받고 싶고 영향력 있다고 느끼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돈을 벌고 싶어서인가? 그것들은 모두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잘못된 동기들이다.

만일 당신은 교회가 성장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에 의해 변화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성장을 바라는 올바른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기가 실제로는 이기적이나, 순수한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진정한 동기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왕국을 지으려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다른 목회자들의 성공에 대한 우리 내면의 반응을 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분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원하는데도 다른 교회의 성장을 들었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기나 질투를 발견한다면,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면 왜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동기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기적이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지역에서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을 때 우리 내면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리 자신의 왕국에 대해 더 관심이 있다는 표시이다.

대형 교회거나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도 이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또한 자신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는 나의 교회가 작아질지라도 회중들 가운데서 주요 지도자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교회를 구축할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대형 교회의 목사도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는지 자랑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자신한테 할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은 “나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가?” 또는 “나는 불과12~20명밖에 안 모이는 가정교회에서 목회할 의향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내 자존심을 너무 상하게 하는 것인가?”[1]

교회성장 운동(The Church Growth Movement)

미국과 캐나다 전역 기독교 서점에는, 교회성장에 관한 책들이 전반 선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진열되어 있다. 이런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은 전 세계에 퍼져가고 있다. 목사들은 교회의 출석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갈급해 있으며, 그들은 종종 교회건물의 크기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기에 성공적이라고 간주되는 미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의 조언을 채택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좀 더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출석인수와 건물 크기는 제자 삼는 사역의 질을 나타내는데 필수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일부 미국 교회들은 성경적인 진리를 왜곡하는 매력적인 교회로 말미암아 성장해 왔다. 나는 전 세계 많은 목사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들이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다고 선언하는 수많은 미국 목회자들에 의해 충격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 목회자들은 저렴한 은혜의 복음을 주장하며 사람들이 거룩함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꽤 많은 목사들은 번영신학을 주장하여 신앙을 이 땅에 더 많은 재물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탐욕만 부추긴다. 그런 목사들의 교회성장 기술은 절대로 모방애서는 안될 것이다.

나도 교회성장의 주제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들에 대한 내 느낌은 혼잡스럽다. 많은 책의 전략들과 조언들은 어느 정도, 그리고 성경적이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들은, 성경적인 교회모식이 아닌, 1,700년의 역사를 가진 제도적 교회 모식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제자와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이 아닌, 항상 큰 건물, 더욱 전문적인 교회의 직원들과 프로그램을 수요하는 개별적인 제도적 교회를 세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구조는 가족보다는 기업에 더 가깝다.

일부 현대적인 교회성장 전략은 숫자상으로 커지기 위해서는 교회 활동은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설교는 짧고, 긍정적이어야만 하고, 예배는 유형무실해야 하며, 많은 사회 활동을 벌리고, 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하고 있다. 이런것을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을수가 없다. 그것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지옥으로 향한 넓은 길에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들만 만들어 낸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려는 하나님의 전략 아니라 교회를 이기려는 사탄의 전략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이 아닌 더욱 “세속화” 되는 것이다.

구도자 맞춤형 모식(The Seeker-Sensitive Model)

가장 인기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전략은 종종 “구도자 맞춤형” 모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략에 의하면 주일 아침 예배는 (1)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을 편하게 느낄 수 있게끔 설계되어야 하고, 그리고 (2) 복음을 전할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또 관계있다고 느끼게끔 해야 한다. 주중 예배와 소그룹 모임들은 신자들을 제자훈련 시키기 위해 마련되어야 한다.

이 방법으로, 일부 개별 교회들은 매우 큰 성장을 이루었다. 미국의 제도적 교회들 중에서, 이런 교회들은 모든 사람이 소그룹모임에 소속되어 있고(종종 그렇지 않다) 제자훈련을 받는다면, 그리고 복음이 타협되지 않는다면(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 목표가 될 때에는 항상 복음과 타협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음은 인간의 자부심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전도하고 제자를 삼음에 있어서 가장 큰 잠재력이 있다. 적어도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은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들에서 갖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가기 위한 전략들을 실천해가고 있다.

하지만 교회성장에 있어서 미국의 구도자 맞춤형 교회모식은 성경적인 모식과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른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표적과 이적이 함께 있었는데 이것은 불신자들의 주의를 끌었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고, 정기적으로 집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영적인 은사들을 행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하고, 함께 기도하였는데 모두 장로/목사/감독들의 인도하에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사들과 선지자들은 교회들을 돌아다녔었고, 모든 사람들은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나눴다. 교회의 성장을 늦추고,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쓰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빼앗는 건물은 어디에서도 짓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신학원에 보내지지 않아도 재직 중에 훈련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빠른시간내에 해당 지역의 모든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파되기까지 급속한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비교해보면,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일반적으로 표적과 이적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적인 전파방식, 흡인력과 확신이 결여되었다. 그것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물에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자연적인 방식인 홍보 및 광고에 크게 의존한다. 설교자의 웅변 기술과 설득력은 사람들이 결단할 수 있는 관건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바울의 방법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자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더 많은 차이점들 (More Differences)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일반적으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없는데 그것은 목사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복음전파의 역할에서 제거하고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교회성장을 이루는데 있어서 과연 더 좋은 방식일까?”[2]

구도자 맞춤형 목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격려하는 교회에서 매주 한 번씩 설교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아서는, 교회 속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복음을 한 번밖에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를 원해야 하고 또한 그들은 그들을 교회로 초대할 의향이 있는 교인들에 의해 초대받아야 한다. 성경적인 모식에서는,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공중장소에 및 개인적인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과 복음에 대해 나눈다. 이 두 가지 모식중, 어느 모식을 통하면 더 많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을까?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초대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방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수락할만한 교회건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항상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필요로 한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수락할만한 건물을 반드시 취득하거나 또는 건설해야 한다. 미국에서 그 건물은 반드시 부유한 교외의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 대조적으로, 성경적인 모식은 특별한 건물, 특수 지역이나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복음 전파는 주일날 특별한 건물이 용납할 수 있는 사람 인수에 제한되지 않는다.

아직도 더 많은 차이점들(Still More Differences)

일부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을 성경적인 모식들과 비교해보면, 심지어 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즉시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들은 회심과 함께 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33과 요한복음 8:31-32에서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을 예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굉장히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였고, 그들의 십자가를 졌으며, 그들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였으며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청지기가 되었다.

구도자 맞춤형 교회에서 자주 선포되는 복음은 다르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이 어떻게 그들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임므로써”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 듣게 된다. 그들이 짧게 “영접기도”를 한 후에는,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며,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수 있는 단계를 밟았다고 확신한다. 만일 그들이 진짜 이런 단계에 가입한다면(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더 순종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종종 교회의 특정 교리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에 초점을 두고 체계적인 학습 과정을 밟는다. 이런 “제자훈련”프로그램의 절정은 신자가 결과적으로 교회에 자신의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바치기 시작할 때이며(헌금은 주요하게 은행 대부금 및 비 성경적인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고,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지원하고, 하나님이 정작 지원하시고자 하는 일들은 박탈하면서 청지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가 제도적 교회에서 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한적이 없는 일부 지원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자신의 사역을 발견”했다고 믿게 될 때이다.

만일 당신의 나라에서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려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구도자 맞춤형”방식으로 대처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정부가 만약 누구든지 참군 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고 상상해보라 – 그들의 봉급은 공짜 선물이고, 노력 없이 받은 것이고, 공이 없이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 자신이 원할 때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군사훈련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원한다면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도 있다. 만일 전쟁이 발발하면, 그 전투에 참여하거나, 원한다면 해변에 갈 수도 있다. 이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의심의 여지가 없이 군대의 인수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며, 그 사명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이 맞이할 결과이다. 기준을 낮추면 주일 출석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제자도와 순종은 좀 먹을 것이다.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은 주일에는 “복음을 전파”하고 주중에는 “제자훈련”을 시키려고 시도하지만, 주중 모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들은 한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사람들은 주일 오전 예배에서 기편 당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들은 주중 모임의 사람들도 반드시 속여야 하는데, 바로 제자도와 순종은 천국에 가는 요구조건보다는 선택사항일 뿐이라고 말이다.[3]

나는 일부 제도적 교회에서 다른 제도적 교회와 달리 성경적인 모식의 측면을 통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관계없이, 성경적인 모식은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왜 오늘날에는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지 않을까? 그에 대한 변명은 끝이 없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전통, 불신앙, 그리고 불순종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모식이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교회성장은 신자들이 성경적인 모식을 단순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하나님이 다른 곳에서는 다를까?

이 모든 것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방법에 대해 미국 외의 목회자들이 조심해야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성경적인 모식을 추구했었다면 제자를 삼는 그리스도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여파 (The Aftermath)

나의 관찰에 의하면, 현대적인 교회성장 기법의 지지자들은 전 세계 일반적인 목회자들과 이탈되어 있다. 대다수 목사들이 목회하고 있는 회중 수는 백 명 미만이다. 그리고 이런 목사들은 그 교회성장 기법을 시도해보지만 효과 없거나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닌 역효과를 경험하면서 마음이 식어가고 있다. 아무도 목회자의 통제를 벗어난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요인들의 일부를 지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교회성장은 지역 인구의 크기에 제한 받는다. 가장 큰 제도적 교회들이 대도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종종 교회 회원으로 모을 수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숫자로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면, 교회의 크기가 아닌, 그 교회 회중들이 지역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판단해야할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열 사람을 가진 일부 교회는 만 명을 가진 교회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다. 오십 명이 사는 마을에는 열 명의 교인을 둔 교회는 오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에 있는 십만 명의 교인을 둔 교회보다 더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 열 명의 교인을 둔 목회자는 교회성장 대회에서 연설하도록 종래로 요청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두 번째 요인(A Second Limiting Factor to Church Growth)

 

둘째, 교회성장은 특정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 속의 구도자들의 포화 정도에 의해 제한받는다. 어떤 특정 시간에, 한 지역에서 복음에 마음을 연 사람들의 인수는 어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그 구도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른 교회로 옮기지 않는 이상(이것이 바로 많은 대형교회들이 그 지역 내의 다른 교회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성장하는 방식이다), 어떠한 교회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때는 복음을 거부했었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받아 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들이 받아들일 때면, 교회가 커질 수 있다. 복음을 거부하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여도 똑같이 부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작은 규모일 뿐이다. 모든 큰 부흥은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자게 시작하는 그날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한 성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실 때 그곳에서는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을 줄을 이미 아셨다(눅 9:5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셨다. 그렇다면 그 제자들은 실패한 것일까? 아니, 비록 회심자가 없었지만(그리고 교회성장도 없었고), 그들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전히 마을, 도시, 그리고 교외로 목회자들을 보내시는데 그분은 그곳에서 작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작은 교회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목회자들은 일부 교회성장 전문가들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공적이다.

모든 지역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그리고 그분의 사람들의 중보에 대한 응답으로, 그분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하신다는 사실에 의해 격려 받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들의 양심, 그분의 창조, 주위 환경, 그분의 일시적인 심판, 교회의 생명력 있는 증언,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질책을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심지를 굳건히 하여야 한다. 계속하여 순종하고 기도하며 설교하여야 한다. 모든 대규모 부흥이 있기 전에는 먼저 부흥에 대한 큰 수요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부흥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계속하여 꿈을 꾸라!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세 번째 요인(A Third Limiting Factor to Church Growth)

개별적인 교회의 성장을 제약하는 세 번째 요인은 목회자의 능력이다. 대다수 목회자들은 대형교회를 감독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대형교회가 필요로 하는 조직력, 행정력, 설교기술과 교육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분명, 이러한 목회자들은 대형 교회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며, 그들은 평균 크기의 제도적 교회거나 가정교회 외의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나는 최근에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를 목회하고 있는 담임목사가 쓴 지도력 주제에 관한 인기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현대 목회자들에 대한 조언들을 읽었을 때, 나의 머리를 제일 먼저 스쳐 지나간 생각은 “그는 우리에게 목사가 되는 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대형 제도적 교회 담임목사들에게는 다른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량의 동역자가 필요하며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모든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대형 세속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되기에 충분히 숙련되어 있다(실제로, 그의 책에서 그는 종종 유명한 대형 기업관리 고문들을 조언을 인용하여 목회자독자들에게 적용하였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만일 대부분이 아니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리더십과 관리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큰 교회를 세우면서 그의 가족과 사역의 미래를 망칠 뻔 했던 치명적인 실수들을 여러 번 저질렀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똑같은 종류의 성공을 위해 애쓰다가 비슷한 오류를 범함으로 파선을 맞은 많은 다른 제도적 교회 목사들이 생각나게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교회에 자신을 헌신하였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잃었거나 결혼을 망쳤다. 일부는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사역에 있어서 심각한 저조기를 맞았다. 기타는 환멸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역을 포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그들의 초인간적인 희생에 의문을 품고 조용히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책을 읽을수록, 나의 마음속에는 현대적인 제도적 교회와 달리 한 목회자가 25명 이상의 양 떼를 담당하지 않는 초대교회의 지혜가 점점 강화되었다. 내가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교회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역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만일 회중 수가 50명이 되면, 그들의 교회는 실제로 너무 커져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들 중에 가능한 지도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제자를 삼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 건물을 팔고 교회를 세 개의 가정교회로 나누는 것을 기도하면서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면, 그들은 적어도 미래의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제자를 삼고, 소그룹을 시작할 수 있다. 만일 이미 소그룹들을 갖고 있다면, 그들 중 일부를 자율적인 가정교회로 풀어놓아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기타 현대적인 교회성장 기술(Other Modern Church-Growth Techniques)

구도자 맞춤형 교회모식외에 오늘날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홍보되고 있는 다른 기술들이 있다. 다른 기술의 대부분은 이 비 성경적이며 “영적 전쟁”에 분류된다. 그들은 “요새를 무너뜨리고”, “전쟁의 기도”, 그리고 “영적 지도”와 같은 이름들을 사용하여 선전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 중 일부를 영적 전쟁에 대해 이후 장에서 파헤쳐볼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했던 이러한 활동들이 왜서 오늘날에는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고 간주되는지에 대해 궁금할 수 있다.

많은 새로운 교회성장 방법들은 “내가 이렇게 해보니까 내 교회가 성장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당신의 교회도 꼭 성장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몇 명의 목회자들의 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부인하겠지만, 교회의 성장과 그들이 했던 특정 일들 사이에는 실제 연결이 없었다. 이 점은 다른 목회자들이 그 독특한 가르침을 따르고, 똑같은 일을 한다 해도 그들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교회성장을 이룬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우리가 도시 안의 귀신들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기 시작했을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큰 소리로 귀신을 향해 꾸짖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왜서 도시 속의 귀신들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은 적이 없는데도 교회 역사를 보면 과거 이천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놀라운 부흥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목사가 부흥은 귀신을 큰 소리로 꾸짖어서 일어났다고 생각할지라도,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그보다도 교회가 연합하여 기도한 결과로 그 도시의 사람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마침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성장은 교회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만일 도시 안의 귀신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 특정 목사의 교회에 부흥을 갖다 준다면, 왜서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부흥은 느려지다가 중단되는가? 귀신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 관건이라면, 우리가 그냥 귀신을 향하여 꾸짖기만 하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올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리를 명확해진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유일한 성경적인 방법은 기도, 설교, 가르침, 제자 삼기, 성령님의 도우심 등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성경적인 방법도 교회가 꼭 성장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회개하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도 어떤 때에는 방문한 도시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직 성경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함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시간 낭비이며 그런 공적들은 나무, 풀, 짚으로 만든 것이기에 마지막 날에 불에 타버릴 것이고 아무 상도 받지 못할 것이다(고전 3:12-15을 보라).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표를 단지 숫자적인 성장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제자를 삼음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면 곧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1]가정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교회의 크기가 집의 크기에 의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목사들은 잘못된 동기로 큰 교회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이것은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복음 전도자, 교사, 선지자, 심지어 사도들이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사역들이 제도적 교회의 구조 내에서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비 목회 사역자들이 교회를 목회함으로 인해 성경적인 교회구조내에서 더 많은 지체들이 받을 수 있는 큰 축복을 빼앗아 간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소명과는 관계없이, 제도적 교회의 모식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목사들은 “그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내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십일조는 건물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비목회사역자들은 자신이 실제로 부르심을 받은 사역을 위한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교회를 목회하는데 의존한다.

[3]누가복음 14:26-33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한 요구조건을 열거하신 것은 이미 신자가 된 사람에게 영적 성장의 두 번째 단계를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오히려, 그분은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제시한 유일한 단계이며 그것은 구원을 받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부분의 구도자 민감형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현저히 다르다.

제4장 (Chapter Four)

가정교회(House Churches)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정교회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은 종종 가정교회와 제도적인 교회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크기와 “사역”을 제공하는 상대적인 능력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가끔 가정교회는 건물 교회에서 제공하는, 질 높은 사역을 제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역”의 정의가 제자가 되도록 돕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도적 교회는 이점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이전 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런 교회의 조건은 더 나쁠 수 있다. 물론 가정교회가 다원적인 측면의 활동을 제도적 교회만큼의 수량은 제공할 수 없지만, 진정한 사역은 뛰어나게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정교회가 단지 실제 교회 건물이 없다는 이유로 진정한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 사람들이 교회의 첫 삼백 년 사이에 살았었다면, 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거부했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은 신자들이 어느 곳에 모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두 명의 신자들이 있더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레스토랑에서 종종 식사하고, 진리에 대해 나누고, 서로를 가르치고 권면하는 모습이 일요일 아침에 많은 교회 건물 안에서 진행되는 일보다 실제로 신약의 교회 모식에 더 가깝다.

이전 장에서는, 나는 가정교회가 제도적 교회가 갖고 있지 않는 장점 일부를 열거했다. 나는 가정교회 모식이 제자를 삼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성경적인 대안임을 말해주는 이유를 몇 가지 더 열거하면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말하기에 앞서 첫째로 나의 목적이 제도적 교회와 목사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고 싶다. 제도적 교회에는 많은 경건하고 성실한 목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구조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해마다 수천 명의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을 향한 사역을 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그들을 많이 사랑하고 좋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에 속한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동시에 보다 효과적이고 행복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정교회 모식은 성경적이며, 제자들을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다. 나는 제도적 교회 목사들의 대다수가 가정교회 모식으로 사역하면 더 효과적이고, 훨씬 더 행복해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룩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제도적 교회에서 20년 넘게 목사로 사역했으며, 그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최선을 다 해 왔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에 걸쳐 많은 교회의 주일예배를 방문한 뒤, 나는 처음으로 평신도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눈을 뜨게 했고, 나는 왜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열정 없이 교회에 다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목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처럼 나도 정중하게 앉아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나는 적어도 지루하게 구경하기보다 참가자로 다른 사람들과 상호 교통할 수 있었다. 그 때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 나은 대안에 대해 생각하게 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가정교회 모식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전 세계에 가정교회가 수백만 개나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가정교회는 제도적 교회보다 몇 가지 확실한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목사들의 대부분은 가정교회가 아닌 제도적 교회를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쓴 많은 내용을 그들이 처음부터 중요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주어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말들을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목사들을 위하여 이 책을 썼으며, 그들과 그들의 교회에 대한 사랑에 의해 쓰게 되었다.

성경 속의 유일한 종류의 교회 (The Only Kind of Church in the Bible)

첫째로, 신약에는 특별한 건물에서 모이는 제도적 교회가 없었으나 가정교회는 명확하게 초대 교회의 표준이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분명히 교회건물이 아닌 곳)에서나 각 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강조 추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3-5을 보라; 롬 16:14-15에서도 로마에 있는 또 다른 두 개의 가정교회인듯한 교회들을 언급하고 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4:15).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킬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

초대 교회가 건물을 짓지 않은 유일한 이유가 그것이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논쟁이 지속하였는데 신약 성경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초기 단계는 몇십 년 동안밖에 지속하지 않았었다(그리고 두 세기 이상 존속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건물이 교회 성숙의 표시라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읽었던 사도들의 교회는 종래로 성숙해본 적이 없는 셈이다.

나는 어느 한 사도도 교회 건물을 짓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최저한도로 이런 일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러한 모본이나 지시를 우리한테 남겨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한 건물이 없이 제자를 삼았고, 그는 제자를 삼으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특별한 건물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건물을 짓고 일주일에 한 번씩이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특별한 건물을 건설하는 것은,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완전히 불필요한 무언가에 돈을 낭비하지 말고,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훔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다.

성경적 청지기(Biblical Stewardship)

이 생각은 가정교회가 제도적 교회를 능가하는 두 번째 장점으로 연결해준다. 가정교회 모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자원의 영적인 청지기가 되는 것을 제창하는 데 이는 확실히 제자도의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1]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임대하고, 수리하고, 확장하고, 재구축하고, 난방 또는 냉방 하기 위해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따라서, 건물에 낭비될 뻔했던 돈들이 사도행전 때 사람들이 사용했던 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교회 건물에 소요되는 수십억 달러가 복음을 전파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된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또한, 인수가 20명이 안 되는 가정교회 내에 성숙한 신자들이 있다면 실제로 “장막을 만드는”(곧 지불받지 않는) 장로/목사/감독들에 의해 감독 될 수 있다. 이러한 교회 운영에는 돈이 거의 필요 없다.

물론, 성경 말씀은 장로/목사/감독들은 자신의 노동에 비례하여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전직 사역자들은 응당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받아야 한다(딤전5:17-18을 보라). 가정교회에서 10명이 십일조 헌금을 하면 한 명의 전직 목사가 평균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만큼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가정교회에서 5명의 십일조 헌금은 한주 노동시간의 절반을 헌신할 수 있는 목사를 확보할 수 있다.

가정교회 모식을 따르면 건물에 사용될 돈이 목회자를 지원하기 위해 쓰일 수 있으므로 제도적 교회 목사가 가정교회의 확산이 자신들의 직업을 위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심어놓은 소원 즉 직업을 갖고 사역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2] 결과적으로, 그것은 제자를 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20명의 직업인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는 잠재적으로 그 수입의 절반을 밖으로 사역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사용할 수 있다.[3]

만일 제도적 교회가 가정교회의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경우,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사람은 교회 행정 및 프로그램 지원 직원일 것이며 아마도 일부 전문 부처직원(예를 들어, 큰 교회의 어린이나 청소년 목사)들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사역과 성경적 근거가 미약한 사역을 바꾸기를 꺼린다. 가정교회는 어린이나 청소년 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성경에서 그 책임을 부여받았고, 가정교회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기독교 규범보다는 성경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청소년도 제도적 교회에 가입되듯이 가정교회에 가입되고 제자로 훈련받을 수 있다. 혹시 왜 “청소년 목회자” 또는 “어린이의 목회자”가 신약에 언급되지 않았는지 궁금한가? 이러한 사역들은 기독교 역사상 첫 1900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런 사역들이 왜 지금 부유한 서구 국가에서 갑자기 필수적이 되었을까?[4]

마지막으로, 특별히 가난한 나라들에서, 목회자들이 서양에 기독교인들의 보조를 받지 않고서 교회 건물을 임대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존성은 많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사실은, 300년 이래 기독교에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개발도상국에 있는 목사이고, 당신의 회중이 교회 건물을 지급할 능력이 없는 상황이라 해도, 방문 온 미국인들에게 지원받으려는 희망으로 아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당신은 정말로 성공적으로 제자를 삼기 위해 교회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 모식을 따르라.

조각난 가족들의 최후(The End of Fragmented Families)

가정교회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제자로 훈련시키는 것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침투된 제도적 교회들(특별히 미국의 큰 교회들)의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사역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흥미로운 어린이와 청소년 사역에 참석한 어린이들의 대다수가 “둥지를 떠난” 후에 다시는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아무 청소년 목회자에게 이 통계수치에 대해 물어보라 – 그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청소년 목회자와 어린이의 목회자들이 있는 교회들은 계속해서 부모들에게 그들은 자녀의 영적 훈련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도 없다는 거짓말을 침투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당신들의 자녀들의 영적 훈련을 책임질 것이다, 우리는 훈련된 전문가들이다.”

이 같은 사역체계는 계속하여 늘어나는 타협의 순환을 형성하기 때문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일은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즐길 수 있는 교회를 찾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 만일 한 아이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회에서 재미있었다고 한다면 부모들은 감격해 마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이가 교회에서 즐거웠다는 것과 그 아이가 영적인 일에 흥미를 느꼈다는 것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종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다.

성공 중심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따라서 어린이와 청소년 목회자들도 종종 회의 중 동역자들에게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재미있는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게 한다. (“관련”은 “재미”에 비해 항상 부차적이고, “관련”은 반드시 “아이들을 회개, 믿음,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아이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좋아하게 되면, 순진한 부모들은(그들의 돈과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며, 교회는 따라서 커지게 된다.

특히 청소년 그룹의 성공 여부는 출석 인수에 의해 측정된다. 청소년 목회자들은 출석률을 높이기 위해 그들이 할 수 모든 일을 하게 되며 이는 종종 진정한 영성을 외면하게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청소년 목회자의 메시지가 지루하고 정죄 적이라고 불평한다며 담임목사에게 고발하는 것을 듣게 되는 청소년 목회자는 참으로 불쌍하다.

하지만 청소년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좋은 관계성 기술과 젊음의 열정과 충만한 정력을 갖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청소년 목회자로 있는 이유는 청소년 목회자가 점차 담임목사가 되는데 필요한 초 인간적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정교회를 목회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들이 청소년 그룹에서 해왔던 사역들이 교회 성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보다 더 성경적인 교회모식에 가까울 수 있다! 동일하게 어린이 목회자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작은 원을 이루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가정교회에서 담임목사보다 훨씬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자연적으로 가정교회에서 제자로 더 잘 훈련받는다. 가정교회에서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체험하고, 참여와 질문의 기회를 갖게 되며 기타 연령층의 사람들과의 교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큰 쇼와 “재미”를 주는 것들에만 노출되어 있어 진정한 공동체 생활을 체험하기 어렵다. 그들은 보편적인 위선에 익숙해 있으며, 학교에서처럼 자신의 동료에 관한 것만 배운다.

그러나 모든 연령층이 다 있는 모임에서, 울고 있는 아기나 진정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그들은 항상 즐길 수 있어야 하며, 문제가 될 때에는 실제 단계를 거쳐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을 다른 방으로 옮겨 즐겁게 놀아주거나, 또는 크레용과 종이를 주어 바닥에서 색칠하게 할 수 있다. 가정교회 모임에서, 아기와 아이들은 문젯거리가 아니며 낯선 사람한테 맡기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가정교회 가족 안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울기 시작한 아기는 종종 예배의 형식에 영향을 주며 이로 말미암은 낯선 사람들의 아기를 향한 뜨거운 눈총은 부모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가정교회에 울기 시작한 아기는 그의 가족들에 둘러싸여 있어 아무도 그들이 안았었던 하나님의 작은 선물이 그들 가운데에 있음을 알리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통제 못 하는 부모들은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다른 부모들에 의해 부드럽게 가르쳐 질 수 있다. 다시 한 번 신자들은 진정으로 보살펴주는 관계속에 있다. 그들은 제도적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서로에 대해 험담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사랑해 준다.

기쁜 목사들(Happy Pastors)

20여 년간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전 세계 수만 명의 목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많은 목회자들과 개인적으로 친구가 되면서, 나는 내가 현대 교회를 목회하는 데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교회의 모든 목사처럼 나도 사역의 “어두운 면”을 경험했다. 어떤 때에는 매우 암흑할 수 있다. 사실, “잔인하다”라는 표현이 그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사람들의 기대 때문에 자연스럽게 놀라운 압력을 받고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가족관계까지 파괴한다. 목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낙담한다. 그들은 정치인, 판사, 고용주, 심리학자, 활동 감독자, 건설 계약자, 결혼 상담가, 대중 강사, 관리자, 심리 전문가, 행정가여야 한다. 그들은 종종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해 다른 목회자와 치열한 경쟁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영성훈련을 위한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직업에 갇혀 있으며 봉급이 적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회중은 그들의 고객이자 고용주이다. 어떤 때에는 그 고용주들과 고객들이 목회자의 삶을 아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비교해보면, 가정교회 목사는 쉬운 축이다. 첫째, 만일 그가 진정한 제자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예수님의 계명에 타협이 없는 순종을 가르치면, 아주 적은 무리의 염소들만이 그 그룹의 일부가 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될 것이다. 사실, 가정집에서 모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염소가 떠나게 하는 데 충분하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온전한 양들만을 목양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자기의 모든 양을 개개인의 수준으로 사랑하고 제자 삼을 수 있다. 그가 감독하는 성인은 12-20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의 아버지처럼 그들과 함께 진실한 친밀감을 즐길 수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시간을 내줄 수 있다. 나는 제도적 교회의 목사였을 때, 종종 고독감을 느꼈다. 나는 회중 중의 어떤 사람과도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친구처럼 나와 가깝게 지내지 못함으로 인해 화를 내거나 또는 그런 친구들을 질투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다른 신자들과 진실한 친밀함을 바랐으나, 진정한 친구를 얻음으로 인해 치러야 할 값은 감수하지 못했다.

가정교회의 관계가 긴밀한 가족안에서, 지체들은 자연스럽게 목사가 책임 적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그것은 목사가 그들의 친한 친구이지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교회 목사는 미래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때가 되어 배가할 때에 지도자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게 된다. 그는 자기의 가장 유망한 미래 지도자들이 그들의 은사를 갖고 다른 곳에 있는 신학교에 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는 자신의 지역 회중 이외에 다른 사역들을 개발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감옥이나 개인요양원에 가서 사역할 수 있고, 난민들이나 사업가들에게 일대일 전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는 사역경험을 토대로, 다른 가정교회를 개척하거나,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성장한 젊은 가정교회 목회자들을 지도하는 데에 그의 시간을 할 수 있는 대로 바칠 수 있다.

그는 주일 아침 출연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토요일 밤에 3점 식의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하면 영적 성장이 다른 수준에 있는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5]그는 모임에서 성령님이 모든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을 즐겁게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가 모임에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가 없이도 모든 것은 제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괴롭히는 건물도, 그가 관리해야 하는 직원도 없다.

그는 다른 지역 목회자들과 경쟁할 이유가 없다.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적 내분이 보편화해가는 “교회 구조”는 없다.

즉, 그는 문화적 기독교가 그에게 부여한 신분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는 주연배우, 회사의 회장, 또는 사역의 중심이 아니다. 그는 제자 삼는 사역자이며, 성도들을 영적으로 무장시켜주는 사람이다.

기쁜 양들 (Happy Sheep)

진실하고 성경적인 가정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모든 진정한 신자가 소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과 진정한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가정교회의 중요 부분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다. 다른 형제자매와 자신의 진실한 삶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가정교회는 신자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 즉 많은 신약 성경에 쓰인 “서로에게”란 구절 중에 말씀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가정교회 모식에서 신자들은 권면하고, 격려하고, 고양해주고, 위로해주고, 가르치고, 봉사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고, 자신의 죄를 서로 고백하고, 서로의 짐을 부담해주고, 시편,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피차 권면할 수 있다. 그들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며 우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제도적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에서는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그냥 앉아서 보고 있기만 할 뿐이다. 한 가정교회 성도가 나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지체 가운데 누군가가 병 들었을 때, 나는 단지 음식사역에 등록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집에 음식을 보내주지 않는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음식을 가져다준다.”

진정한 신자들은 상호 작용하고 서로 참여하는 것을 즐긴다. 수년 동안 수동적으로 앉아서 관련이 없거나 중복적인 설교를 듣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영성에 대한 모욕감을 준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자신의 통찰력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선호하고 가정교회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무화적인 모식이 아닌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 때 각 사람은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다”(고전 14:26). 가정교회에서는 아무도 무리 속에서 길을 잃거나 교회 당파에 의해 배척되지 않는다.

진정한 신자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 가정교회에서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할 기회와 책임이 있으므로 아무도 제도적 교회의 헌신적인 신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소진되는 현상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렇게 최소한 모두가 일반적인 식사를 나누기 위해 음식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애찬”(유 1:12)과 같은 것이다. 많은 가정교회의 경우, 그 식사는 실제 유월절 식사의 일부인 주의 만찬의 예를 따른다. 주의 만찬은 내가 목회했던 교회의 어린 소년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식”이 아니다. 교회 예배때 몇 초 동안을 들여 모르는 사람들과 작은 제병을 먹고 약간의 주스를 마시는 방식은 성경과 성경적인 가정교회에 있어서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제자가 함께 모여 나누는 식사는 성찬의 성례적인 의미를 여러모로 더하여 준다.

가정교회에서 예배는 간단하고 신실하고 참여적이지 하나의 쇼가 아니다. 진정한 신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교리적 균형과 관용(Doctrinal Balance and Toleration)

작은 교회의 모임 중 부담 없고 열린 토론은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대한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은 그들 것과 다른 관점들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설사 그룹이 어떠한 합의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교리가 아닌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같이 결속되어 있게 한다. 장로/목사/감독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어떠한 가르침도 모두 다른 사람들 사랑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자가 우리 모두에게 내주하시기 때문이다(요일 2:27을 보라). 내적인 견제와 균형 잡힌 성경적인 모식은 교회가 교리적으로 탈선하는 것을 방지해준다.

이것은 현대 제도적 교회의 규범에 비해 매우 대조적이다. 제도적 교회의 교리는 처음부터 설립되었고 도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잘못된 교리는 부단히 연속되어 갔고, 교리는 수용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이 되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한 설교 중의 하나의 요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 반대자들의 즉각적인 출교를 유발할 수 있다. 그들은 목사와 교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목사가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도록 설득당했다 하더라도, 그는 교회의 많은 곳에서뿐 아니라 자신의 교단 내의 높은 사람들에게 이 부분을 감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도적 교회에서 교리적인 차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숙련된 정치인과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연설가와 같은 목회자들을 배출한다. 그들은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들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하려고 한다.

하나의 현대적 흐름(A Modern Trend)

흥미롭게도, 점점 더 많은 제도적 교회들에서 제도적 모식내에서 소그룹 구조를 개발하고 있으며 제자 훈련함에 있어서의 소그룹 구조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일부 교회들에서는 더 나아가서 그들의 핵심구조를 소그룹에 두며, 소그룹을 그들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큰 “축하 모임들”은 소그룹들보다 차요적이라고 한다(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런 것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발걸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발걸음들을 축복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축복이 우리가 그분의 뜻에 얼마나 맞는지에 따라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 삼는 데 있어서 제도적 교회보다 “셀 교회들”이 더 잘 구성되어 있다. 셀 교회는 제도적 교회 모식과 가정교회 모식사이에 있으며 두 가지 교회모식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소그룹 구조를 가진 현대 제도적 교회와 고대와 현대 가정교회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들은 불행하게도 때때로 제도적 교회 내에서 많은 잘못을 빚어내는데 특히 소그룹사역을 시작한 실제 동기가 담임목사가 자신의 교회 왕국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게 되고, 소그룹은 그 계획에 잘 맞춰주게 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소그룹 지도자들은 모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근거로 선출되게 되며, 마귀가 그들의 머리에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은사가 너무 많거나 카리스마가 넘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종류의 정책들은 소그룹의 효과성을 방애하고, 다른 모든 제도적 교회에서처럼, 진정으로 부르심 받고 열심 있는 지도자들을 신학원으로 몰아내고, 교회의 은사들을 강탈하여, 그들을 강의만 듣고 실제 재직훈련이 없는 곳으로 데려간다.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은 종종 교회모임의 성격을 벗어날 때가 있다. 제자 삼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마도 주일 아침에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소그룹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것들에 초점을 두려 하고 주일 아침의 반복을 원하지 않는다.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들은 종종 교회의 직원으로 구성된 것이며 성령의 역사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교회의 다른 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된다. 사람은 연령, 사회적 지위, 배경, 취미, 결혼 여부 또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분배된다. 염소는 종종 양들과 함께 섞여 있게 된다. 이 육적인 조직은 신자들이 서로의 차이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혼합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은 정기적으로 함께 식사하였다. 비록 유대인의 전통에 의해 금지되는 것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모임은 서로 배우는 좋은 경험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행하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복음의 능력을 얼마나 증거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 왜 우리는 반드시 같은 종류의 그룹으로 모두 나누어져야만 소그룹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주일 오전 쇼를 하고 있으며 관중은 프로들의 연기를 보고 있다. 제도적 교회에서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는 “진정한” 예배가 있을 경우 소그룹 모임은 진행되지 않는다. 이런 메시지 때문에 주일 아침 참석자 중 절대다수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은 비록 소그룹 모임에 참여하도록 격려받지만 참석하지 않으려 하며 그것을 단지 선택사항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중요한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소그룹 개념은 다소 중요한 것으로 홍보되고 있지만, 주일 제도적 활동만큼은 중요하지는 않다. 진실한 공동체, 제자 훈련과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가 경시된 것이다. 잘못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제도적 활동은 여전히 우선시되고 있다.

더 많은 차이점들(More Differences)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모든 사람이 계급 구조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피라미드식 기업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섬기는 지도자”라고 자칭할 수 있지만, 더 많이는 경영진 의사결정 책임을 진 최고 경영자와 같다. 더 큰 교회일수록, 목사는 그의 회중들과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그가 진정한 목사라면 당신은 무실 결에 그가 밝히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보통 작은 무리를 목회할 때 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는 여전히 교목과 평신도 사이의 분리를 조성하고 있다. 소그룹 지도자는 지불받는 전문가들의 하위 계층에 항상 있다. 소그룹 지도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할 만큼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공부는 종종 교목들에 의해 계승하거나 승인된다. 소그룹은 주의 만찬을 진행하거나 침례를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신성한 의무는 명목과 학위가 있는 엘리트들이 집행하게 되어 있다. 교회 지체 중 전직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신학원에 가야만 엘리트 그룹에 가입할 수 있는 “진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 예배는 60-90분 정도 진행되고, 한 은사 있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은사 있는 사람이 검증된 가르침을 주는 소규모의 교회 예배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님이 다른 사람을 사용하고 은사를 주고 사역자들을 개발할 공간이 거의 없다.

사람은 종종 제도적 교회의 소그룹에 진지하게 헌신하지 않으며, 산발적으로 참석한다. 그리고 그룹들은 때때로 임시로 설계되어 그 깊이가 가정교회보다 얕다.

제도적 교회에서 소그룹들은 보통 주중에 만나게 함으로 토요일의 다른 교회모임들과 충돌되지 않게 한다. 따라서, 주중 소그룹 모임은 일반적으로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상으로 두 시간 이상 진행할 수 없으며 집에 학생이 있거나 거리 적으로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다니기 어렵다.

제도적 교회에서 소그룹 사역을 추진할 때에도, 돈을 낭비하는 건물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 만일 소그룹 프로그램이 교인들을 증가시킨다면 더 많은 돈이 건물을 짓는데 낭비될 수 있다. 또한, 제도적 교회 내의 소그룹들은 적어도 한 명의 추가 유료 직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더 많은 돈이 또 다른 교회 프로그램에 쓰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최악의 상황은, 소그룹을 가진 제도적 교회 목사가 종종 개인적으로 제자를 삼는 일에 매우 제한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책임 때문에 너무 바쁜 삶을 살고 있으며, 일대일 제자 훈련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제자 훈련이라고는 소그룹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뿐이지만, 그것마저도 종종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것으로 제한된다.

내 생각에는, 이 모든 것은 가정교회가 제자나 제자 삼는 자를 삼고 배가하는 데 있어서 더 성경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의견이 수백 년간의 교회 전통을 매우 빠르게 변경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제도적 교회 목사가 그들의 교회를 제자를 삼는 성경적인 모식으로 이동하기 위해 뭔가를 하기를 촉구한다.[6] 그들은 개인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거나 또는 소그룹사역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들은 “초대교회 주일”을 개최하여 교회건물을 닫고 모든 사람이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 했던 것처럼 집에서 식사를 나누고 만나는 것을 시도해볼 수 있다.

자신의 교회에 소그룹이 있는 목사들은 일부 소그룹들을 풀어서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만일 소그룹이 건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장로/감독들에 의해 인도될 때 그 소그룹들은 자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부속되지 않은 젊은 교회보다 더 모교회를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어떨까?[7] 회원들이 모 교회에 헌금하는 돈으로 가정교회의 목사를 지원할 수 있다.

내가 가정교회를 지지한다고 해서 제도적 교회에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제도적 교회에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가 양성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관행과 구조들은 때론 도움보다는 방애가 될 수 있으며, 그들은 종종 목사의 살인범이다.

가정교회 모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What Happens at a House Church Gathering?)

모든 가정교회들이 같게 구성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거기에는 다양성을 위한 많은 공간이 있다. 매 가정교회마다 자신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게 된다 –이것은 가정교회가 특히 기독교 문화와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전도에 매우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가정교회 회원들은 그들의 이웃들을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교회건물로 초대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완전히 낯선 의식에 참여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의사소통의 주요 장애물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이웃들을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에 초대한다.

일반적인 식사는 보통 가정교회의 주요 구성요소이다. 많은 가정교회들에서, 그 음식들은 주의 만찬이거나 그것을 포함하며, 각각의 가정교회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래의 주의 만찬은 실제로 유월절 식사로 시작했으며 그 자체가 영적인 의미로 가득했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은 식사 식사의 일부로서 명백히 초대 교회 신자들이 모였을 때 가진 형식을 따른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2,46).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떡 덩어리를 떼고 함께 나누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문화 속에서 거의 매 식사때마다 해왔던 것들이다. 식사하는 동안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 성경에는 확실한 대답이 없다. 그러나 윌리엄 바클리는 그의 책, “주의 만찬”에서 “주의 만찬이 가족 식사거나 개인 집에서 친구와의 식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하나의 작은 떡 조각과 한 모금의 포도주에 관한 생각은 원래의 주의 만찬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주의 만찬은 원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가족식사였다.” 놀라운 것은 모든 현대 성경학자들이 바클리에 관점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그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그분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도 그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일반적인 식사에서 주의 만찬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고린도 신자들에게 쓴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그것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여기서 그는 교회건물에서 모이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교회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고전 11:20-21, 강조 추가).

만일 주의 만찬이 현대 교회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바울의 말들은 엉터리가 아닌가? 당신은 혹시 현대 교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만찬을 먼저 먹으므로 인해 어떤 사람은 주의 만찬과 함께 취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시장함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는가? 이런 말들은 오직 주의 만찬이 실제 식사와 함께 시행되었을 때에야 이해된다. 바울은 계속하여 썼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바울은 교회건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인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전 11:22).

이런 일이 실제 식사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빈궁한 자들이 왜 부끄러워했겠는가? 바울은 그들의 모임 중에 먼저 도착한 고린도 신자 중 일부가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만찬을 먹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아마도 너무 가난하여 식사에서 같이 나눌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을 당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음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바로 이후, 바울은 “주께 받은”(고전 11:23) 성례인 주의 만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썼으며 첫 번째 주의 만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적었다(고전 11:24-25을 보라). 그 후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에 대해 경고하고, 스스로를 살피지 않는자는 실제로 자기들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허약함, 질병, 심지어 조기사망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고전11:26-32을 보라).

그리고나서 그는 결론 지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33-34).

문맥상으로 보아서는 주의 만찬을 범한다는 것은 다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같이 나누었어야 할 식사임에도 자신의 만찬을 먼저 먹은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또는 훈계)을 받을 위험에 있다고 경고했다. 이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만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시장하다면 그 모임에 오기 전에, 그는 뭔가를 먹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 먼저 도착한 사람은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 문맥을 봤을 때, 바울은 주의 만찬을 같이 나눈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하여야 하며, 서로에게 대한 사랑과 배려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떠 상황에서도, 초대 교회에서 성직자 없이 가정에서 일반적인 식사의 목적으로 주의 만찬을 연습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는가?

떡과 포도주(Bread and Wine)

주의 만찬의 구성 요소의 특성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원래의 주의 만찬을 완벽하게 모방하려면, 우리는 떡의 정확한 재료와 원래의 포도주를 만드는 데 쓰인 포도의 정확한 종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일부 교부들은 포도주를 반드시 물에 희석하여야 한다고 엄격하게 규정하였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찬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떡과 포도주는 고대 유대인들 식사의 가장 일반적인 요소 중의 일부였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사람이 날마다 먹는 매우 일반적인 두 가지 음식에 깊은 의미를 주셨다. 그분이 만일 역사의 다른 시간에 다른 문화를 방문했었다면, 첫 번째 주의 만찬은 치즈, 염소 젖, 또는 쌀 케이크, 파인애플 주스로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나눴던 식사의 모든 음식과 음료는 잠재적으로 그분의 몸과 피를 나타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의미이다. 우리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는 동시에 율법의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지 말자.

사람들이 일반적인 식사를 할 때 꼭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미 읽은 바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진지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7-34에서 엄숙하게 지적했듯이 주의 만찬을 먹기 전에는 자기를 살피는 것은 항상 절절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한다. 모든 다툼과 분열은 식사하기 전에 해결하여야 한다. 모든 신자는 자기를 살피고 모든 죄를 자백하여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자기를 살피라”라는 뜻일 것이다.

성령님은 지체를 통하여 나타나신다(The Spirit Manifested Through the Body)

일반적인 식사는 예배와 가르침과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는 모임 전이나 후에 진행할 수 있다. 각각의 가정교회마다 진행형식을 결정할 수 있으며, 그 형식은 같은 가정교회에서도 모임마다 다를 수 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의 모임이 현대 제도적 교회의 예배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장부터 14장까지 초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모였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풍부한 통찰력을 주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같은 형식은 따를 수 없거나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바울이 기술한 초대 교회 모임에서 일어난 일은 오직 소그룹 모임에서만 일어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이 형용한 모임들은 큰 모임에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기술한 네 장절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함을 먼저 인정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1장부터14장에서 묘사된 모임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그들 중에 함께 하신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그분이 제체들을 통해 자신을 나태내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몸을 세우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바울은 적어도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나열하였다. 예언, 방언, 방언의 통역,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영적 분별력, 병 고치는 은사, 믿음, 그리고 능력 행함. 바울은 이 모든 은사가 모임을 할 때마다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은사들이 나타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고린도전서 14:26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요약한 것 같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먼저 이 다섯 가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들을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 고린도전서 12:8-10에 나와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을 더 철저하게 고려해 보자.

목록 중 첫 번째 은사는 찬송시다. 바울은 다른 두 서신서에서도 성령님이 주신 찬송시가 교회 모임에서의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차이는 불분명하지만, 요점은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신자들에 의해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 신자들에 의해 불린 많은 찬송가와 노래들은 이 세 가지 종류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현대의 찬양과 노래들은 성경적인 깊이가 빠졌으며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얕으므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할만한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가정교회에 모인 신자들은 성령님이 개개인한테 영감을 주어 과거와 현재에 잘 알려진 기독교 노래들을 인도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덕을 세우는 데 활용될 수 있게끔 구성원 중의 일부에게 특별한 노래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한다. 교회가 성령님이 주신 자기만의 노래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가르침 (Teaching)

바울의 목록 중 두 번째는 가르침이다. 이는 다시 한 번 모임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모든 가르침은 그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맞는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며(왜냐하면,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행 2:42을 보라),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하여야 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어디에도 지역교회 모임에서 매주 같은 사람이 설교해야 하고 모임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주의하라.

예수살렘에서는 사도들은 큰 모임은 사원에서 가르쳤다. 우리는 장로들도 교회에서 가르침의 책임이 주어졌고 그들 중 일부는 교육사역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고 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또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행 20:20을 보라). 그러나 신자들의 작은 모임에서 성령님은 사도, 장로나 교사 외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가르치게 할 수도 있다.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가 모임에 개인 성경사본 가지고 다닐 수 있으므로 초대 교회 때보다 훨씬 우세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에, 아마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쉬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교리를 더 우선시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려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죽음으로 교리화 되어가고 있다. 많은 소그룹 성경 공부는 주일 아침 설교처럼 삶과는 관련이 없이 지루하기만 하다. 가정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다음과 같은 좋은 규칙이 있다. 큰 아이들이 지루함을 숨기지 않는다면, 어른들은 아마도 그들의 지루함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주 좋은 진리의 지침이다.

계시(Revelation)

세 번째로 바울은 “계시”를 나열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의 일부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드러내신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특별히 불신자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들어왔을 때 예언의 은사로 그들의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책망을 들으며, 판단을 받을 것이며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할 것이다”(고전 14:24-25).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님의 실제 임재가 교회 모임의 예상 기능이며 그런 초자연적인 일은 예수님의 임재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다. 만일 예수님 자신이 그들 중에 있다면,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였다”(빌 3:3).

어떤 경우라도, 예언은, 그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곧 말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다른 것들에 관한 것일 수 있고 다른 것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꿈이나 비전을 통해 계시를 받을 수 있다(행2:17 을 보라).

방언과 통역(Tongues and Interpretation)

넷째로, 바울은 함께 사용되는 은사인 방언과 통역을 나열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이 과도하게 사용되고 또 남용되는 현상이 있었다. 즉, 사람은 교회 모임 중에 방언을 말하지만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무도 방언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통역의 은사를 주지 않은 채 방언의 은사만 주신 성령님의 잘못으로 보일 수 있고 고린도 교회는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 궁금해할 수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바울은 방언을 금지한 적은 없었다(많은 제도적 교회에서는 금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그는 방언을 금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계명이었다고 선언하였다(고전14:37-39을 보라)![8] 그것은 제대로 사용되기만 하면,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임재를 확정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의지를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14장에서 바울은 예언이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나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고린도 신자들이 예언하기를 소망하도록 강력히 권장하였는데, 이것은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더 큼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신자들의 예언 은사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 사이에서 예언의 은사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어떻게 시작할까?(How to Start)

가정교회는 가정교회 개척자 또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교회에 대한 비전을 받은 장로/목사/감독들에 의해 시작된다. 성경적인 장로/목사/감독은 제도적 교회가 말하는 성숙한 평신도를 말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가정교회 개척자는 정식적인 사역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님에 의해 가정교회의 비전을 받은 개척자는 누구와 함께 동역해야 할지를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주님은 그를 비슷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하며, 그분이 인도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신다. 또는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가질 불신자들을 붙여주셔서 그들이 가정교회에서 제자로 훈련받게 할 수도 있다.

금방 가정교회를 시작하는 사람은 서로 편하게 느끼고, 성령님과 관계를 갖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함을 예상해야 한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시행착오가 겪을 것이다. 모든 성원이 동참해야 한다는 개념, 성경적인 섬김의 지도력, 장로들을 장비하고, 성령님의 인도와 은사,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 편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 등 이런 것들은 제도적 교회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정교회가 개척할 때에는 은혜와 인내로 하는 것이 지혜롭다. 처음 시작할 때 형식은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고, 또 다른 사람이 준비한 말씀을 가르친후에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으로 마칠수 있다. 하지만 가정교회의 성경적인 진행방식은 매 개인에 의해 부단히 연구되어야 하며 장로/ 목사/감독들은 회원들이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해야 하며 그 과정을 즐겨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 모임은 매주 한 회원의 집에서 다른 회원의 집으로 바꿔가며 진행하거나, 한 사람이 매주 자기 집을 모임장소로 열수 있다. 날씨가 화창할 때에는 어떤 가정교회들은 가끔 아름다운 야외장소로 이동한다. 모임 시간과 장소는 반드시 주일 아침이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구성원들의 시간에 맞출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정교회는 열두 명의 회원을 초과하지 않게, 작게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떻게 제도적 교회를 가정교회로 전환할 수 있을까?(How to Transition from Institution to House Church)

이 책을 읽는 대부분 목사들은 제도적 교회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며, 아마 당신도 그중의 한 명일 것이다. 내가 설명한 교회의 종류가 당신이 바라던 교회의 모습이라면, 당신은 이미 어떻게 하면 전환할 수 있는지를 궁금할 것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기존의 구조와 틀 안에서 성경적인 진리만 가르치고,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라. 진정한 제자들은 그들이 일단 이해만 되면 성경적인 교회구조로 전환하고 싶어할 것이다. 염소와 종교적인 사람은 이러한 전환을 거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둘째로, 이 주제에 대한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가정교회 구조와 그것이 가진 축복에 대해 회중에게 가르친다. 당신은 성숙한 신자들의 감독하에 가정집에서 매주 셀 모임을 시작하기 위해 평일이나 주일 저녁 예배를 취소할 수 있다. 그리고 모두사람이 참석하도록 권장하라. 점차적으로 이런 모임들이 가능한 한 가정교회의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소그룹이 주는 축복을 만끽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인다.

모든 사람이 가정교회 모임을 즐기게 되면 다음 달의 어느 한 주일날을 택하여 “초대 교회의 주일”로 정할 수 있다. 그 주일날에는, 교회 건물을 닫고, 모든 사람은 가정집으로 가서 초대교회가 했던 것처럼 모임을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고, 주의 만찬, 교제, 기도, 예배, 가르침과 성령의 은사들을 즐길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런 모임들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질 수 있으며, 점차 두 번, 세 번씩 가질 수 있다. 결국, 당신은 모든 그룹을 독립적인 가정교회로 풀어주며 몇 달에 한 번씩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릴 수 있다.

내가 설명한 이 모든 전환 과정은 1-2년의 세월이 걸릴 수 있다.

당신이 더 조심스럽게 진해하려면, 자신이 인도하는 가정교회에 대해 가장 관심이 있는 몇 명 회원들과 함께 하나의 모임부터 시작할 수 있다(다시 반복하지만, 가정교회는 주일 아침에 모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실험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며 모두에게 좋은 학습경험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성공하면 그 그룹에 감독을 임명하며 독립적인 교회로 풀어주며 한 달에 한 번씩만 제도적 주일예배에 참석하게끔 한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교회가 아직도 모교회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기에 여전히 제도적 교회에 소속된 회중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회중들로 하여금 제도적 교회가 개척하는 다른 가정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고려할 수 있게끔 영향 주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첫 번째 그룹이 성장하면, 기도하면서 그것을 두 그룹으로 나눠 두 그룹 모두 좋은 지도자들과 충분한 은사가 있는 회원들로 구성되게 할 수 있다. 두 그룹은 달마다 혹은 3개월에 한 번씩 큰 행사에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합의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떠한 방식을 택하든지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말고 실망하지 말라. 가정교회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제도적 교회의 모든 회중이 이러한 전환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개인적으로 언제쯤 제도적 교회를 떠나 가정교회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기 시작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날은 당신에게 있어서 뜻깊은 날이 될 것이다!

이상적인 교회(The Ideal Church)

하나님 보시기에 가정교회의 목사가 실제로 거대한 건물과 주일마다 수많은 참석자를 거느리는 대형교회의 목사보다 더 성공적일까? 그렇다, 만일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쇼를 감상하고 문맥을 무시한 몇 구절 성경 말씀으로 거룩해 보이고 재미를 선사하는 설교를 듣는 단순한 영적인 염소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는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고 있다면 말이다.

가정교회 모식을 따르기로 한 목사는 자기만의 많은 회중을 거느릴 수 없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그는 자기의 제자가 또 제자를 삼으므로 말미암아 많은 지속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40명에서 50명의 “적은” 회중들을 거느리면서 더 많은 무리를 얻고자 애쓰고 있는 목사들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들의 교회는 이미 너무 커져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더 큰 건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 두 개의 새로운 가정교회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워달라는 기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제발, 그렇게 되면, 새로운 교파를 만들거나 자신을 그 교회의 “주교”라고 칭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교회는 클수록 좋다는 생각을 근절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기준으로 순수하게 판단했을 경우, 특별한 건물 안에서 모이는 수백 명의 제자가 아닌 관객으로 구성된 하나의 교회는 매우 이상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초대 사도 중 누구라도 현대 제도적 교회를 방문하면 머리를 긁적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 반대 이유(A Final Objection)

사람은 종종 기독교가 이미 문화의 한 부분이 된 서양 세계에서 집에서 만나는 교회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제도적 모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가정교회 운동이 서양 세계에서 급속한 추진력을 얻는 것으로 봐서는 그런 관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사람은 이미 기꺼이 집에서 파티를 열고, 식사를 나누고, 교제하고, 성경공부와 셀 모임을 하기를 원한다. 조금만 생각을 조정하면 가정교회모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 종교적인 사람들 즉 “영적 염소들”은 가정교회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은 그들이 일단 성경적인 기준을 이해하기만 하면 가정교회의 개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츰 교회 건물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고전 3:12) 큰 교회를 세우려면, 당신은 건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은 다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제자들과 제자를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려 하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건물에 돈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원주민 복음 전도운동인, 중국 가정교회의 “백투 예루살렘” 운동이 10/40 창을 전도한다는 특정 전략을 세웠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그들은 “우리는 어디에도 교회 건물을 세울 생각이 없다! 이렇게 함으로 복음이 빠르게 전파될 수 있으며, 당국이 감지하는 데 어려움을 주며, 그리고 우리가 복음 사역에 우리의 모든 자원을 직접 사용할 수 있게끔 해준다.”[9] 이것은 실로 우리가 따라야 할 지혜롭고 성경적인 모범이다.

 


[1] www.shepherdserve.org싸이트의 홈 페이지에서 Biblical Topics목록아래의 “Jesus on Money” 를 보라.

[2]비록 이것이 급진적으로 들리지 모르겠지만, 교회 건물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작은 가정교회를 감독할 지도자가 결핍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적 교회 내에서 잠재적인 지도자에 대한 제자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다. 큰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이 실제로 그들의 회중들 가운데 하나님께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정당한 사역의 권리를 박탈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

[3]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삼은 성경적인 모델과 모세가 십부장을 삼아 백성들을 재판한 모델(출 18:25을 보라)에 비추어 보면 일 대 십 또는 일 대 이십의 비율을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은 그들 자신이 효과적으로 제자 삼을 수 있는 인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감독하고 있다.

[4]우리는 성경에서 왜 “담임목사”, “협동목사” 또는 “부목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다. 현대교회에 있어서 구조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런 직함들은 초대 교회에서는 구조때문에 필요 없었다. 이십명 규모의 가정교회는 담임목사, 협동목사, 부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5]비록 많은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보살피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훌륭한 연설자는 되지 못했다. 사실, 사람들이 목사들의 많은 설교가 지루하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때론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가혹한 것일까? 한 교회 비평가는 회중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지루했던 연설자도 종종 아주 좋은 대화 상대가 되며, 사람들이 그들과 대화할 때에는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가정교회에서의 대화형 가르침이 항상 흥미로운 이유이다. 이런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동안 손목시계에서 왔다갔다하는 눈짓과 대조를 이룬다. 가정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이 지루해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6]미친 짓에 대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중 하나는 바로 반복적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목사들이 모든 사람들의 제자 삼는 것에 관한 책임에 대해 수 년동안 가르칠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의 형식이나 구조를 개변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당에 와서 앉아서 듣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목사들이여, 만일 당신이 과거에 사람을 개변시키지 못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그것은 앞으로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부터 변화하라!

[7]물론, 많은 목사들이 이 생각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의 왕국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8]물론, 나는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의 모든 초자연적인 나타나심은 첫 세기에만 한정되며 그 시점에서 멈췄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초대 교회가 경험 한 것을 추구 할 이유가 없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다. 나는 현대의 사두개인과 같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이 생긴다. 나의 한 일본인 친구는 내가 일본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몇 번이나 일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이런 은사들이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중단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나는 또한 이런 사두개인들이 왜 성령님이 여전히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죄를 깨닫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주장은 유지하면서 성령님의 그런 기적들 이상의 역사는 부정하는 지 궁금하다. 이런 종류의 “신학”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산물이며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실제로 그리스도의 목표를 위배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37에 쓴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불순종이다.

[9] Brother Yun, Back to Jerusalem, p. 58.

제3장 (Chapter Three)

적절하게 계속하라 (Continuing Properly)

수년 동안 많은 방식으로, 나는 저도 모르게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목표를 거스르는 일을 해왔다. 그 목표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를 추구하고 싶은 목표에 대해 작업 관행을 따라갔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성령님은 은혜로 나의 눈을 열어 나의 오류들을 보게 하셨다. 내가 배운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이제까지 배워온 그리고 믿어온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통이 우리의 눈을 막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진리에 대해 더 잘 아는 엘리트 그룹이라고 생각하며 전통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사는 이렇게 비꼬아서 말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 32,000개의 교단이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 그중 진리의 그룹에 속해 있을 행운이 있을까요?”

우리의 자부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저항하고 계신다. 그분은 교만한자를 막으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더 나아가려 하고 예수님앞에 온전히 서 있을 준비가 되어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겸손한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목사의 역할(The Role of the Pastor Considered)

사역자의 모든 사역은 제자를 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이런 질문을 자신한테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에 어떠한 도움될까?” 우리가 이 간단한 질문을 솔직하게 자신한테 해본다면 많은 기독교 활동의 기치 아래 수행되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가 특정 지역의 교회에서 섬기는 목사/장로/감독[1]들의 사역을 생각해 보자.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의 계명에 모두 순종하는 제자를 삼으려고하는 경우, 무엇이 그가 져야 할 첫 번째 책임일까? 자연스럽게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는 가르침을 통하여 삼는다고 하셨다(마28:19-20을 보라). 장로/목사/감독의 직분의 요구조건도 가르치기를 잘하여야 한다(딤전 3:2). 설교와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응당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한다(딤전 5:17).

그러므로 목사는 “이 설교가 어떻게 제자를 삼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하면서 모든 설교를 평가해야 한다.

주일이나 주중 설교만으로 한 목사의 가르침에 대한 책임은 끝난 것일까? 만일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르침의 책임은 주로 한 사람의 본이 되는 삶에 의해 완성된다는 성경 말씀을 홀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인 가르침은 단지 본이 되는 일상생활에 대한 보완이다. 이것이 바로 장로/목사/감독에 대해서 구두 의사소통 기교보다 그 사람의 성격과 삶에 대한 요구가 더 많은 이유이다. 디모데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 감독에 대한 15가지 요구가 씌어있다. 그중 14가지는 성품에 관한 것이고 1가지만 가르치는 은사에 관한 것이다. 디도서 1장 5절부터 9절까지 쓰인 장로에 대한 18가지 요구조건 중 17가지가 성품에 관한 것이고 1가지만 가르치는 은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첫째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결에 있어서 믿는자에게 이 되라”(딤전 4:12)고 권면하였다. 그 후 그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말했다. 따라서 디모데의 성품에 대한 요구가 공적인 가르침의 사역보다 먼저 언급되었으며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베드로도 비슷하게 썼다.

너희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1-3).

누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라고 격려하는가? 우리가 존경하는 설교를 하고 존경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헌신하지 않은 “부드러운” 목회자들은 누구한테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도전하지 못한다. 이러한 목회자가 가끔 그리스도에 대해 헌신하라는 말씀을 전한다 해도 꼭 모호한 말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청중들이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설교가 아닌 그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이 보여줬던 삶은 오랫동안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만일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서의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가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시간낭비다. 목사여, 당신의 모범적인 삶은 설교보다 10배는 더 호소력이 있다. 당신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격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하지만 목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주일 아침 연설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이 목사의 개인적인 삶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교회건물을 나갈 때 5초간의 악수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아마도 현대의 목회방식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

 

매주 주일 아침 설교(The Weekly Sunday Morning Sermon)

만일 목사가 자신의 교육책임을 주요하게 매주 대중 설교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이건 또 하나의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은 대중 설교(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설교내용은 상당히 짧아 보인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호기심이 많은 제자에 의해 시작된 개인적인 대화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한 교회 건물에서 매주 한 시간 반에 한정되지 않은, 해변가에서, 집안에서, 그리고 먼지나는 도로를 걸으면서도 나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제자들에게 완전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가르침의 방식은 사도들에 의해 이어졌다. 오순절 이후, 열두 사도는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행5:42) 가르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 신자들의 공동체와 상호 교통하였다. 바울은 또한, “공중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가르쳤다(행 20:20).

이 시점에서, 당신이 만일 목사라면, 가르침에 대해서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과 첫 번째 사도들의 사역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당신은 아마 하나님이 당신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해왔었는지 아니면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교회 전통을 따라 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아마 당신은 더욱 멀리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은 자기 자신한테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내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나의 삶을 통하여 본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요구되는 시간을 어디에서 짜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훌륭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당신으로 하여금 목사의 역할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더 많은 문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심지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이 교회 사람들과 밀접하게 지내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학교에서 목사는 자기 회중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배웠다. 목사는 자신이 회중들로부터 전문적인 존경을 받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는 회중들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자주 현대 교회에서 실제로 아주 잘못된 일이 행하여 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었는데 제자 중 하나는 일반적인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편안히 기대였을 정도였다(요 13:23-25을 보라).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몇 년 동안 함께 살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목양하기 위해 그들과 전문적인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그만 하여야 할 것이다!

고대와 현대 방법들의 비교(A Comparison of Methods, Ancient and Modern)

만일 예수님께 순종하고 제자 삼는 것이 목표라면, 우리가 제자를 삼는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까? 그 방법들은 예수님께 아주 효과적이었고 또한, 예수님을 따랐던 사도들한테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들을 삼음에 있어서 현대의 방법들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연구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은 비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젠 아마도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성경 말씀을 다시 검토해야 시점이 온 것 같다.

아래 질문을 자신한테 물어보기 바란다. 어떻게 초대 교회는 교회건물, 전문적으로 훈련된 성직자, 신학교와 세미나, 찬송가와 오버 헤드 프로젝터, 무선 마이크와 테이프 복제기, 주일학교 교육과정과 청소년 사역, 예배 팀과 합창단, 컴퓨터와 복사기, 기독교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수십만 권의 기독교서적, 그리고 심지어 개인 소유의 성경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에 성공했을까? 그들은 제자를 삼기 위해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필수적이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사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제자를 삼는 데 있어서 우리를 방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두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다.

현대 교회에서는 신학원에서 훈련받은 목회자만이 교회를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념은 바울 한테는 생소한 것이다. 일부 도시에서 그는 교회를 개척한 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와서는 장로를 임명하여 교회를 감독하게 하였다(행 13:14-14:23의 예를 보라). 이 사실은 몇 주 또는 몇 달동안 교회에는 바울과 정식식적인 장로들의 관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로들이 임명되었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은 상당히 젊은 신자였으며 자신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2 ~ 3 년의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성경은 목사/장로/감독들이 자신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2~ 3 년의 정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요구사항은 지속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당신이 교회를 이끌어가려는 한, 몇 년 동안의 정규 교육이 필요하다”[2]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는 리더를 배출하는 과정을 느리게 하며, 따라서 제자를 삼는 속도가 늦춰지며, 이는 교회의 성장을 늦춰지게 한다. 나는 이븐과 암웨이 같은 미국회사들이 매 영업 사원에게 비누나 향수를 판매하기 전에 자기들의 가족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3년 동안의 정규교육을 받도록 요구했더라면 어떻게 목표시장을 점유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목회사역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그리고 “성경은 새로 입교한자를 감독직에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일부는 말할 것이다(딤전 3:6을 보라).

첫째로, 새로 입교한 자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데, 바울의 개념은 우리와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장로/목사/감독직에 신자가 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을 세웠다는 것이다.

둘째로, 현대의 목회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경적인 모식과는 너무 멀어진 복잡한 교회구조와 사역체계 때문이다. 우리는 이 체계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서 실제로 소수의 초인간적인 사람들만이 그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감독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훈련받지 않은 감독은 사람들을 거짓 가르침으로 인도할 수 있다!” 라고 다른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동정녀 출산을 믿지 않고 동성애를 승인하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치는, 어떤 사람들의 멸망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했다는, 그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고도 천국에 가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신학훈련을 받은 성직자들로 가득하다. 현대 신학원들은 종종 거짓 교리를 생성하고, 전문 성직자들은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교회의 “서민들”은 그들에게 도전하기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원을 나온 전문가들이며 더 많은 “말씀 증거”를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독특한 교리들로 자기들의 교회를 정의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그들은 기존 교회와 구별된다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교회 건물 앞의 표지에 그 차이를 게재하여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보낸다. 타격을 더 주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의 도전할 수 없는, 그리고 분열적인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 분열자”로 취급한다. 오늘날까지 이단재판소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성직자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제자들을 삼아야 할 사역자들이 보여줘야 할 모습이란 말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특정 교리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고, 올바른 신학 교리를 갖는 것을 올바른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모든 것은 성경적인 모식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선택 가능한 하나의 성경적인 대안(A Biblical Alternative)

내가 지금 믿은 지 3개월 된 신자들에게 교회를 맡기라고 주장하고 있는가(바울이 했던 것처럼)? 그렇다, 하지만 그 신자들이 반드시 장로/감독에 대한 성경적 요구 사항을 충족하고, 오직 그들이 감독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 즉, 그 교회들은 먼저 일부 감독 직능을 할 수 있는 사도와 같은 성숙한 교회 설립자에게 복종하는 새로 개척된 교회 모임이어야 한다.[3] 그렇게 되어야만 새로 부임된 장로가 전적으로 감당하게 되는 일이 없다.

둘째로,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회중인수는 가정집에서 모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적어야 한다.[4] 그래야만 교회관리가 훨씬 더 잘 된다. 그것은 아마도 장로/감독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자기 가정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고 한 이유일 것이다(딤전3:4-5을 보라). 한 가족을 관리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가정교회를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셋째로, 회중은 반드시 성경적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누군지 명으로 구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양처럼 보이는 염소들을 목회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제거해준다.

그리고 넷째로, 목사/장로/감독들은 반드시 문화적인 역할보다는 성경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현대 교회에서 쥐고 있었던 가장 중심적인, 가장 중요한, 가장 주목받는 위치에서 물러나야 한다.[5] 오히려, 그들은 전체 몸의 한 부분으로서, 주일 아침 설교자가 아닌,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 제자를 삼기 위해 본이 되는 삶과 교훈으로 가르치는 겸손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런 모식대로 따라한다면, 3 개월 된 신자 중 일부는 교회를 감독 할 수 있다.

교회 건물(Church Buildings)

교회 건물은 어떠한가? 초대 교회 때에는 건물 없이도 잘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건물이 또 다른 하나의 현대의 “필수”가 되었다. 제자를 삼는 과정에 교회 건물이 과연 도움될까?

내가 목사로 있을 때, 나는 가끔 자신이 부동산 업자, 은행원, 일반 계약자 또는 전문 기금 모금 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건물을 꿈 꿨고, 건물을 찾아다녔고, 낡은 건물을 고쳤고, 건물을 임대했었고,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고 벽에 금이 가 누수가 생기면 수리하기도 했다. 건물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 내가 건물 주위를 맴돌았던 이유는 대부분의 목사처럼, 교회모임을 위한 건물 외에는 목회를 성공하게 할 다른 길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건물 또한, 많은 돈을 소모한다(미국의 일부 교회들은 교회 건물에 수백만 달러의 돈을 지출한다). 건물을 소유하는 꿈이 이뤄진 후, 나는 건물의 은행 대부금을 다 지불하는 날을 꿈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역에 모든 돈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회중들에게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하며 부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회중들을 함께 빚더미에 몰아넣었던 적이 있다!(나는 분명히 본을 보여주면서 가르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 건물들은 한 주일에 몇 시간씩 한두 번 사용된다. 전 세계에서 어떤 조직의 건물들이 이렇게 사용되는 시간이 적은가?(답: 오직 이단과 거짓 종교만 그렇다.)

그 돈 먹는 구멍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교회 건물이 있는 목사는 항상 돈을 필요로 하고 이는 그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부자들한테(이런 사람은 종종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는다)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 가르침은 하지 않으려 하며, 성경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왜곡하는 유혹에 놓여 있다. 목사들은 자금흐름과 증가를 가로막는 설교는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신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측면이 (1) 십일조를 바치는 것과(덧붙여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것을 차요한 계명으로 보셨다.) (2)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다(여기서 주일마다 십일조가 거둬들여 진다). 이것은 제자 삼는 모습이 아니다. 비록 많은 목사가 모든 회중이 그 두 가지를 해주기를 꿈꾸지만 말이다. 만일 한 목사가 이끄는 회중 중 절반만이 그 두 가지를 하기 원하기만 해도 그 목사는 자신의 비결을 책으로 써서 수백만 명의 다른 목사들에게 팔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회중들이 교회 건물을 구매하거나 건축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신자들은 가정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했다.[6]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한 모금을 한 적도 없다. 서신서도 교회당 건축에 관한 어떠한 지침도 없다. 또한, 교회가 콘스탄틴의 칙령에 따라 이 세상과 결혼하는, 기독교사가 300년이 되기 전까지, 사람은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300 년! 그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인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심지어 건물이 없는 강렬한 박해의 시기에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몇 세기에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최근에도 오히려 중국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중국에는 아마도 백만 개가 넘는 가정교회가 있을 것이다.

일요일 오전 열한시는 가장 분리된 시간이다(Eleven O’Clock Sunday is the Most Segregated Hour)

미국 교회모식을 따른 현대 교회의 시설은 별도로 진행되는 모든 연령별 사역에 별도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충분한 별도의 공간이 설계될 것이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는 남성, 여성, 그리고 모든 연령별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히 분리된 사역들은 없었다. 교회는 모든 방면에서 통합되었으며, 분해되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는 가족 단위는 함께 있도록 되었고, 부모의 영적인 책임이 강화되었으나 현대의 교회 구조에서는 오히려 침식되었다.

교회 건물이 제자를 삼는 사역에 과연 도움될까 아니면 저애가 될까? 역사적으로, 수 세기에 걸친 제자 삼는 사역은 교회 건물이 없이 더 나은 성공을 이뤄냈다. 거기에는 많은 좋은 원인이 있다.

처음 3세기 동안 초대교회에서 진행된 가정집에서의 모임은 3시간에서 5시간 동안 지속하였는데 기쁨이 가득한 식사, 가르침, 찬송, 그리고 성령의 교통으로 넘치는 나눔의 시간은 신자들에게 진정한 영적 성장을 위한 환경을 마련해줬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은 현대 교회 참석자들처럼 극장에서 서로의 머리 뒤통수를 바라보며 무대에서의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려는 관객처럼 앉아 있을 때 보다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을 때 참여하는 기분이 더 들 것이다. 일반적인 식사 자리에서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서로 투명해지고, 진실한 관심하는 관계와 진정한 교제로 이어진다. 이는 목사의 인도하에 옆자리에 앉은 완전히 낯선 사람과 악수하는 것과 같이 피상적인 현대의 “교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가르침은 예의 바른(그리고 종종 지루해하는) 관중 위에 높이 서서 이상한 옷을 입고 연극을 하는 목소리로 하는 강연이 아닌, 오히려 질문과 답변, 그리고 공개적인 토론에 더 가깝다. 목사가 “매주 설교를 준비”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물론 장로/목사/감독을 포함한다) 성령님이 주시는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가정교회로 하기에 집이 좁아 보일 때, 장로(들)은 더 큰 건물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두 개의 가정교회 모임으로 나눠져야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새로운 모임장소를 어디로 정하고, 누가 감독을 맡아야 할지에 대한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구하는 일일 뿐이다. 다행히, 그들은 철학적 또는 교리적인 관점을 조사하기 위해 낯선 사람들과 교회성장 이론가들의 이력서를 수집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 중에는 이미 열심 있고 훈련된, 그리고 자기가 돌봐야 할 어린 양들을 이미 알고 있는 감독이 있다. 그 새로운 가정교회는 새로운 지역에 복음 전파하고,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불신자들을 식사 초대하는 것처럼 쉽게 그들의 모임에도 초대할 수 있다.

축복받은 목사(The Blessed Pastor)

어떠한 가정교회의 목사/장로/감독도 현대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목회책임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은 탈진으로 고통당하고 있지 않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달마다 약 1,800명의 목회자가 사역을 그만둔다고 한다.) 가정교회 목사는 적은 무리를 돌보고 성도들이 목사의 재정적인 공급을 해준다면 그는 전직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기도와 묵상을 하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병든 자를 방문하고 기도해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며 새로운 제자가 우의 일을 그와 함께 하게끔 그들을 훈련시키는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교회 관리는 간단했다.

그는 자신의 지역에서 다른 장로/목사/감독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일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거나 또는 동료 목사들과 “최고의 청소년 사역”이나 “가장 흥미로운 어린이 교회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팀이 얼마나 잘했고 목사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듭났고 예수님과 그분의 백성을 사랑한다. 그들은 함께 먹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사들을 나누기를 즐겼다. 그들의 목표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 있을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가정교회에도 문제점은 있었고, 서신서에서 그 문제점들이 제기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현대 교회를 괴롭히고 제자 삼는 사역을 방애하는 문제들은 초대교회 때에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지역 교회모식이 3세기 이후 중세시대부터 변화된 교회모식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아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4세기 초까지 그 어떠한 교회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처음 3세기 동안에 살았었다면, 자신의 사역이 지금 것보다 어떻게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약하면, 우리가 더 밀접하게 성경적인 모식을 따를수록, 우리는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목표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제자 삼는 것을 방애하는 가장 큰 장애는 바로 비성경적인 교회구조와 관행이다.



[1]목사 (헬라어로 poimain이며 목자를 의미한다)가 장로 (헬라어로 presbuteros이다), 감독(헬라어로 episkopos이며, KJV에서는 주교로 번역되었다)과 동등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바울은 성령님이 감독자(episkopos)로 삼으신 에베소 장로(presbuteros)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보살피게(헬라어로 동사인poimaino) 하였다(행 20:28을 보라). 그는 또한 디도서 1:5-7에서 장로 (presbuteros)감독(episkopos) 이란 용어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도 장로(presbuteros)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고(poimaino) 권하였다(벧전 5:1-2을 보라). 주교(episkopos의 KJV 번역)가 목사와 장로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으며 수많은 교회를 감독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발상이다.

[2]전문훈련을 받은 성직자에 대한 현대적인 강조는 많은 방면으로 보아 큰 교회가 병든 증상을 나타낸다. 그것은 지식의 습득을 영적인 성장과 동일시 한다. 많이 아는 사람일 수록 영적으로 더 성숙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도리여 자신의 배운 것을 뽐내는 덜 성숙한 사람일 수 있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고 분명하게 썼다. 그리고 2 ~ 3 년 동안 날마다 지루한 강의를 듣는 사람은 앞으로 분명히 매주 지루한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3]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는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가 교회의 장로와 감독을 임명하도록 위임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디모데와 디도는 한 동안 장로들과 감독들을 감독하였으며 그들은 아마 바울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고 말한 것처럼 주기적으로 장로들과 감독들을 만나면서 제자 훈련을 시켰을 것이다.

[4]행 2:2, 46; 5:42; 8:3; 12:12; 16:40; 20:20;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요일 1:10을 보라.

[5]바울의 서신서가 장로나 감독들만 대상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모든 사람을 대상한 것이라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바울은 두 서신에서만 장로/목사/감독을 언급하였다. 한 번은 그가 교회에 대한 인사말에서 감독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바울이 그들이 인사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빌 1:1을 보라). 다른 한 번은 바울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사역자들의 목록에서 목사를 언급하였다(엡 4:11-12을 보라). 또한 바울이 우리의 생각에는 장로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에서 장로들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특별히 주목할 만 하다. 예를 들어, 주님의 만찬을 관리하거나,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 교회에서 장로와 목사가 모든 중요한 역할을 잡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 당시 그들은 중심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행 2:2, 46; 5:42; 8:3; 12:12; 16:40; 20:20; 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1:2; 요이 1:10을 보라.

제2장(Chapter Two)

정확하게 시작하라(Setting the Right Goal)

성경적으로 보면, 제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신자이며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여 죄로부터 최종적으로 자유케 된 사람이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지키기를 배우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그의 가족과 그만의 만족, 그의 소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 사랑을 그의 삶을 통하여 드러낸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천을 통하여 보여준다. 그들은 열매를 맺어간다.2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다.

분명한 것은 그분의 제자가 아닌 사람은 그분을 위하여 제자를 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제자를 삼으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우리 자신이 그분의 제자임을 확신해야 한다. 많은 사역자가 제자란 무엇인가의 성경적인 정의에 재보면 부족하다. 이런 사역자가 제자를 삼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희망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상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제자를 삼으므로 인해 오는 어려움을 인내할만큼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분히 헌신하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나는 이 책을 계속 읽어가는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온전히 헌신된 제자가라고 가정하겠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헌신을 하기전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더는 기다지 말라!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 그분의 놀라운 은총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

제자도에 대한 재해석(Redefining Discipleship)

비록 예수님이 제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지만, 많은 사람은 그분의 정의를 자기만의 것으로 대체한다. 예를 들어, 어떤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자란 단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막연한 정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란 단어는 성경적 의미가 모두 제거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제자도는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에게 있어서 선택적인 두 번째 헌신단계라고 여긴다. 그들은 한 사람이 예수님안에서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아닐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에 쓰여 있는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단수히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수준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르쳐진다 – 예수님을 믿는 신자와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헌신된 제자. 이러한 관념 때문에, 많은 신자와 적은 제자가 있지만 둘다 천국에 간다고 말하여 진다.

이 교리는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효과적으로 중화시킨다. 만일 제자가 된다는 것이 자기부인과 헌신 그리고 심지어 고난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제자가 된다는 것이 하나의 선택사항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제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제자가 아닌 신분으로도 천국에서 환대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다.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꼭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는가? 신자에게 있어서 제자도란 하나의 선택사항인가? 헌신되지 않은 신자와 헌신된 신자란 두 레벨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신자와 제자 두 부류로 나눈적이 없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제자들에 대한 반복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제자는 더 높은 계급의 보다 더 헌신된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1] 매 개인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제자이다. 사실상 “제자가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행 11:26).

신약 성경에서 제자로 번역된 헬라어(mathetes)가 261번 기록된 반면 신자 번역된 헬라어(pistos)는 9번 밖에 기록되지 않았다(New American Standard 번역본에서는 신자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번역된 헬라어(Christianos)는 3번밖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모두 그분의 제자로 여겨졌다.

예수님의 지적(Jesus’ Commentary)

예수님은 신자에게 있어서 제자로 되는 것이 차요적인, 선택적인 단계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읽었던 예수님이 제자도에 관한 세 가지 요구조건은 신자들에게 더 높은 단계의 헌신으로 향해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분의 말씀은 무리 중에 있는 매개 인을 향한 것이다. 제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번째 단계이다. 더욱이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0-32).

그 누구도 예수님이 새 신자들에게 그분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새 신자들에게 “다음 단계 곧 나의 제자로 헌신하는 일은 앞으로 훗날에 고려해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새 신자들이 이미 제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 것처럼, 신자 와 제자란 단어가 동의어인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분은 새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제자인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곧 그들이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34-36을 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고백만으로는 그들이 진정으로 믿는다고 보장할 수 없음을 아셨다. 그분은 또한, 그분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는 것도 아셨다. 이런한 신자 또는 제자들은 자연히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여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배우면서 그분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속에 그들은 점차적으로 죄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시험하신 것이다.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라면”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제자가 아닌 고백만 하는 제자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스스로 속일 수 있다. 예수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그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임을 알 수 있다(그리고 요한복음 8:37-59의 남은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그들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이유가 있음을 보아낼 수 있다).[2]

우리들의 주요 말씀인 마태복음 28:18-20은 제자는 헌신된 신자들의 더 높은 차원이라는 이론을 자체적으로 배제한다. 예수님은 지상명령에서 제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신다. 물론,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이 새 신자에게 세례를 주기 전 그들이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두 번째 단계”가 있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반면, 사도들은 모든 새 신자들에게 그들이 회심한 후 거의 즉각적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모든 진정한 신자는 제자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은 특별히 헌신된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만의 이론과 일관성이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아무나 세례를 주었다. 결코 그들이 제자신분에 맞는 헌신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은 응당 제자신분의 단계에 도달한, 극소수의 사람들한테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무도한 교리에 대한 마지막 일격은 충분할 것이다. 만약 제자가 신자들과 다르다면, 요한은 왜 형제를 향한 사랑이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증표라고 썼으며(요일 3:14을 보라), 예수님은 형제를 향한 사랑이 진정한 제자들의 증표라고 말씀하셨겠는가(요 13:35)?

이 거짓 교리의 기원(The Origin of this False Doctrine)

그리스도인을 신자와 제자 두 계급으로 나누는 생각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이 교리가 어떻게 옹호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바로 이 교리가 전적으로 구원에 대한 또 다른 거짓 교리에 기인한다. 그 교리는 제자에 대한 요구 조건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과 호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에 따르면, 제자에 대한 요구 조건이 구원을 얻는 요구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의 선택적인 헌신단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많은 성경 구절은 이 이론의 치명적인 잘못을 반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 중, 많은 계명을 열거하신 후 마지막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을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말씀과 다른 여러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명백하게 순종과 구원을 연관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수많은 이런 말씀들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성경 말씀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믿고, 거듭나고, 성령의 감동으로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일시적으로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방식으로 드러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심,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우리 삶 속의 죄의 능력을 폐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을 주시며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분이 훈계하시는 등 방식을 통하여 드러냈다. 이 중 그 어떠한 축복도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이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성경 말씀을 보면,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만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엡2:8상). 이 두 구성 요소가 필요하며 그들은 분명히 호환되지 않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은혜와 믿음 모두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한다. 진정한 믿음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일으킨다. 야고보가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두 번째 장에 썼던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약 2:14-26을 보라).[3]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도 죄에 대해 허용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거듭나게끔 임시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죽은 후에는 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기회는 더는 없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는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분의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임시적이다.

예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한 여인(A Woman Whom Jesus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는 완벽한 그림은 예수님과 간음 중에 잡힌 여자와의 만남의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 여자는 정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그녀가 죽어야 마땅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분은 그녀를 보내셨다. 하지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죄인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 “나는 지금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죽어 마땅하고 지옥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난 너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 그러나 내 은혜는 일시적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더는 죄를 짓지 말라. 내 은혜가 끝나고 네가 죄인의 모습으로 내 심판대 앞에 서 있기 전에.”

우리가 간음한 여자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회개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가 그렇게 했다면, 그녀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 그녀는 은혜에 의하여 구원받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믿었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을 믿었으며 그분의 경고를 주의했으며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죄에서 돌이켰다. 예수님안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회개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눅 13:3을 보라). 예수님은 또한, 엄숙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마 7:21).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경고를 믿고 주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간음한 여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는 죄를 지속적으로 짓게 되고 죽은 후에는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그녀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세상에! 여기서 당신을 만나니 너무 좋습니다! 나는 내가 당신앞에 오기 전 땅 에 있을 때 당신이 나를 정죄하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확실히 당신은 아직도 여전히 은혜로우십니다. 그 때 저를 정죄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당신은 저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그녀를 천국으로 환영 하실까? 답은 분명하다. 바울은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했다(고전 6:9-10).

이 모든 것은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가 그분 안의 진정한 믿음–무엇이 구원의 믿음인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구원의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되었다. 구원은 은혜로 받기 때문에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 조건이 구원에 대한 그의 요구 조건과 호환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제자가 되는 것은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를 위한 선택 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제자의 신분은 진정한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이다.[4]

이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사역자가 되려면 진정한 복음을 전파하여 제자 삼는 과정을 정확하게 시작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순종의 믿음을 갖게 해야 한다. 사역자가 제자신분은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를 위한 선택적인 단계라는 거짓 교리를 선언할 때, 그들은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거역하고 있으며 거짓 은혜와 거짓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만이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새 거짓 복음(The New False Gospel)

하나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현대의 복음은 종종 가장 중요한 성경적 요소들을 은혜의 메시지와 맞지 않다고 간주하여 제거한다. 그러나 거짓 복음이 바로 대부분의 현대의 새로운 “회심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몇 주 지나지 않아 곧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또,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매우 자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고 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보수적인 이웃처럼 똑같은 죄를 짓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지 않고 실제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 복음에서 제거된 이러한 필수 요소 중 하나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많은 사역자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면(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했던 것처럼)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공로로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회개가 구원에 절대적 필요하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세례 요한,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 모두가 구원의 은혜를 부정한 것이 된다.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주신 일시적인 기회이지,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라는 기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이 누가가 말한 “복음”을 선포할 때, 그의 중심 메시지는 회개였다(눅3:1-18을 보라). 회개 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마 3:10-12; 눅3:17을 보라).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첫 시작부터 회개를 역설했다(마 4:17을 보라).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했다(눅 13:3,5을 보라).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여러 곳에 보내셔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을 때, “제자가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하였다”(막 6:12).

부활 후,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용서에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설교할 때, 회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은 한 남자에 대한 진실을 인식한 후, 마음이 찔려 베드로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베드로는 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답했다(행 2:38을 보라).

솔로몬의 행각에서 한 베드로의 두 번째 대중 설교는 같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회개가 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5]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상)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증언할 때, 그는 자기의 복음은 항상 회개의 메시지를 포함했다고 선언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 26:19-20).

아테네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야 하고, 회개치 않는 사람은 그날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다고 회중들을 경고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에서, 바울은 그의 메시지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믿음과 함께 회개를 들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0,21).

이 성경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이 선포하지 않는 한 진정한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회개로부터 시작한다. 그것 없이는 죄의 용서는 없다.

회개의 재정의(Repentance Redefined)

비록 많은 성경 말씀이 구원은 회개에 근거함을 증거하지만, 일부 사역자들은 여전히 ​​회개의 명확한 의미를 왜곡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거짓된 개념에 부응하기 위해 회개의 필요성을 무효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들의 새로운 정의에 의하면, 회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음의 변화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놀랍게도, 한 사람의 행위에 영향을 줘야 한다는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회개 하라고 촉구할 때 무엇을 기대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변화만을 원했는가 아니면 자신의 행위상의 변화를 원한 것인가?

바울은 진정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의 아그립바 왕앞에서의 선언을 통하여 그의 수십년간의 사역에 관한 증언을 읽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행 26:19-20).

세례 요한도 회개는 특정 신학 사실에 대한 마음의 변화 이상이라고 믿었다. 회중들이 회개하라는 요한의 촉구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을 때, 그는 행위의 특정 변화를 열거하였다(눅 3:3, 10-14을 보라). 그는 또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단지 표면상의 회개만 함을 비웃으며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지옥의 불에 던져질 것임을 그들에게 경고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전파했던 회개와 같은 메시지를 설교하셨다(마3:2; 4:17을 보라). 그는 어느 한 번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것을 말씀하셨다(눅 11:32을 보라). 요나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느웨 사람들이 자신 마음의 변화보다 더 많은 일을 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죄로부터 돌이켜 자신 행위의 변화를 가져왔다. 예수님은 이것을 회개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적인 회개는 마음속으로부터 생긴 진정한 믿음에 대한 자원적인 행위변화의 응답이다. 사역자가 진정한 회개임을 증명하는 행위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는 실제로 제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염원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기의 청중들이 회개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미혹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역자에 대한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지옥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 그 사역자는 인식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역자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제자를 삼으려고 할 경우, 그는 반드시 정확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와 순종의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진정한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경우, 그는 사람들의 눈에는 큰 성공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는 큰 회중들을 거느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구축하고 있으며, 그의 공적은 앞으로 불의 시험을 받을 때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들은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고전 3:12-15을 보라).

헌신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Jesus’ Calls to Commitment)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로부터 돌아서라고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즉각적으로 그분을 따르고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종래로 이보다 더 낮은, 오늘날 종종 일어나는 구원의 조건을 제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종래로 사람들을 그분을 “영접”하라고 초대하고, 용서를 약속하고, 나중에 그분께 순종하도록 제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일 첫 번째 단계로서 전심으로 헌신하라고 요구하셨다.

슬프게도, 예수님께로의 희생적인 헌신은 종종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쉽게 무시된다. 또는 그것이 인정된다고 해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닌 이미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향한 더 깊은 관계로의 부르심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들 중 많은 부분은 예수님의 헌신으로의 부르심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닌 이미 구원받은 그들을 향한 것이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며, ​​그들 또한, 종래로 순종한 적이 없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가정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예수님께 더 깊게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되는 구원으로의 초대 중 하나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는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4-38).

이 구원으로 초대는 불신자들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신자들을 향한 더 헌신적인 관계로의 초대인가? 우리가 정직하게 읽었다면, 답은 명확해진다.

첫째, 예수님이 대화를 한 사람은 “무리 제자들”(34절)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리”들은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그분께 소환당했다. 예수님은 그분이 가르치려는 진리를 모든 사람, 그분을 추종하는 사람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모두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곧이어 “누구든지”(34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또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계속 읽어내려 갈수록, 예수님이 누구한테 말씀하시는지 명확해진다. 특히, 그분의 말씀은 (1)그분을 따르고, (2)자기 목숨을 구하고, (3)영혼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4)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그분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되려는 열망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예수님이 묘사한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은 모두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천국에 약속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진정한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을 상실”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분의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이 성경본문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다섯 구절로 된 본문의 마지막 네 구절은 모두 단어 “누구든지”로 시작됨을 주목하라. 따라서 각 구절은 이전 구절에 대해 설명하고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본문 중의 어떤 구절도 다른 구절들의 조명을 떠나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한 구절씩 해석해보자.

첫 번째 구절(Sentence #1)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고 그분의 추종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 맺으려고 했던 관계는 바로 사람들이 그분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은 그분의 추종자가 아닌 그분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런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을 순종하지 않는 한 그들은 친구로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느 한 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이 그분의 추종자는 되려 하지 않고 그분의 형제가 되기만을 원하는 데 예수님은 그런 선택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분은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형제로 여기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함께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셨다. 오직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천국을 약속받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구절 속에서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그분을 따를 수 없다고 알려주셨다. 그들은 반드시 자기의 욕망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 자기 부인과 순종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본질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뜻이다.

두 번째 구절(Sentence #2)

예수님의 두 번째 구절은 그의 첫 번째 구절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해준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다시 한 번, 이 구절도 “누구든지”로 시작하여 첫 번째 구절과 관련하여 추가설명을 하고 있음을 주의하길 바란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두부류의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다. 첫 구절에서 암시했던 두부류의 사람,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대조된다. 우리가 이 두부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보면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첫 번째 구절에서 자기 부인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두 번째 구절의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하는 사람들과 맞물리고 첫 번째 구절에서 자기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두 번째 구절에서 자기 생명을 잃지만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과 맞물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육체적인 생명을 잃고 얻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 구절의 뒷부분은 예수님이 영원한 손실과 이득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하셨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첫 번째 구절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은 두 번째 구절에서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위해 자기만의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우리가 대조했었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은 사람”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더 명확해진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만의 계획을 내려놓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계획과 복음전파의 실현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구원”할 것이다. 자기보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천국의 기쁨을 누릴 것이나, 계속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만의 계획을 좇을 수 있는 모든 자유를 잃은 채 지옥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Sentences #3 & 4)

이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을 보도록 하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는냐(막 8:36-37).

이 두 구절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세상이 주는 것들을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님은 온 천하의 가치와 한 영혼의 가치를 비교하여 이런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셨다. 물론,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이론적으로 온 천하를 가질 수 있지만, 죽음 뒤에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삶이 기다린다면, 그는 치명적인 착오를 범한 것이다.

이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는 것한테서 멀어지게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주는 자기만족을 위한 그들의 욕망이다. 자기 사랑에 의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죄가 주는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은 그분에 대한 사랑과 순종 때문에 죄가 주는 쾌락을 피한다. 세상을 좇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 반면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들은 자신이 얻은 부, 권력, 명예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심없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구절(Sentence #5)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구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구절 역시 “누구든지”란 단어로 시작하며 다른 구절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하라.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이 사람 역시 자기를 부인하려 하지 않고, 자기만의 계획을 좇아가고, 세상이 주는 것들을 추구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고 영혼을 상실한다. 지금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물론 자신의 불신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더라면, 그는 절대로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 속하며, 예수님은 재림하셨을 때에 그를 부끄러워 할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무엇일까? 전반 단락은 이미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에게 보내는 더 헌신적인 삶으로의 부르심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비교하는 방식을 통하여 구원받는 길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분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순종의 믿음을 보일 수가 없다.

헌신하라는 또 다른 부르심(Another Call to Commitment)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많이 있지만, 또 다른 하나의 헌신에 관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보도록 하자, 이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복음 전도자는 종종 자신의 복음 전도 초대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사용하며,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구원으로의 초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쉼을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쉼이 아닌 영혼의 안식을 주셨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책감, 두려움과 죄로 중압감을 느끼며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지쳐 있을 때에 구원의 말씀을 전하기에 좋은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에 의하며 두 가지를 수행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1) 그분께로 나아오고, (2) 그분의 멍에를 메야 한다.

은혜를 전파하는 거짓교사들은 종종 “예수님의 멍에를 지라”는 표현의 명백한 의미를 왜곡한다. 일부는 실제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반드시 그분의 목에 씌워진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나의 멍에”라고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는 반드시 쌍 멍에이며 멍에의 한쪽은 그분의 목에 씌워져 있고 나머지 한쪽은 비워져 있으며 우리의 목에 걸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쟁기를 당기는 작업을 하시겠다고 한 약속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이러한 거짓교사들에 의하면, 우리가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하게끔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면서 그분의 은혜로 인한 혜택을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아주 억지다.

아니, 예수님이 지친 사람들에게 그분의 멍에를 지라는 말씀은 그들이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주권자로 모시고 그분이 그들의 삶을 주관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우라고 한 이유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들만의 길을 가고 그들만의 삶을 지배하는 야생 황소들과 같다. 그들이 예수님의 멍에를 멜 때, 그들은 그분에게 지배권을 내려놓는다.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그분의 짐이 가벼운 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친자들에게 쉼을 주는 상징적 표현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그들의 주님으로 모시도록 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요약(In Summary)

이 모든 것은 진정 성공한 사역자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제자를 삼고, 회개와 헌신에 대해 알며, 제자가 되는 것이 천국을 약속받은 신자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믿음을 표현하는 유일하고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성공적인 사역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복음을 전한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할 것이며 헌신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1]제자는 사도행전6:1, 2, 7; 9:1​​, 10, 19, 25, 26, 36, 38; 11:26, 29; 13:52; 14:20, 21, 22, 28; 15:10; 16:1; 18:23, 27; 19:1, 9, 30; 20:1, 30; 21:4, 16에서 언급되었다. 신자는 사도행전 5:14; 10:45, 16:1에서만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4:21에서 누가는 이렇게 썼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함으로 제자를 삼았고, 사람들은 회심한 후 즉각적으로 제자가 되었으며 선택적인 시간을 가진 후 제자가 된 것이 아니다.

[2]이 성경 구절은 새로운 회심자에게 구원을 보장해주는 현대의 잘못된 관행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새롭게 회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짧은 기도거나 말로 된 믿음만 고백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의 고백이 진실한지를 확인해보기를 도전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3]또한, 아무 행함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진정한 믿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믿음에는 항상 행함이 따른다.

[4]바울이 종종 구원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확인했던 이유가 그 당시 그가 끊임없이 충실한 율법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바울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거룩함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그 사실을 믿고 종종 긍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개념이 없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를 모르고 있는 유대인들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할례, 육체적인 혈통, 또는 율법을 지키는 것(어쨌든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이 한 사람의 구원을 이룬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폐하였다.

[5]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베드로에게 계시하셨을 때,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사람들에게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선언하였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5:32에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주신다고 말하였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님이 거하신다(롬 8:9; 갈 4:6을 보라).

제1장 (Chapter One)

정확한 목표를 세우라 (Setting the Right Goal)

사역자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적이 되려면 반드시 그의 앞에 놓인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만약 그가[1]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큰 비극이다. 그는 마치도 일류 달리기 선수처럼, 기뻐하며 전력 질주하여 800미터 경주의 결승선을 넘으면서,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자신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으나 자신이 실제로 1,600미터 경주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목표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실패를 낳기에 승리했다고 생각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은 더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 사역자에게는 “비전”이라 일컫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분명한 부름심과 은사에 따른, 애써 성취하려고 하는 독특한 것들이다. 어느 특정도시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된다든지, 어느 특정지역에서 전도한다든지, 어떤 특정 진리를 가르친다든지 매 개인마다의 은사와 부름심은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는 보편적이며 매 사역자에게 적용되는 비전이며 매개 독특한 비전 뒤에 있는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많은 사역자의 독특한 비전은 하나님의 큰 비전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큰 비전에 대적할 때도 종종 있다.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다. 인수가 부단히 성장하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에 말이다.

그럼, 하나님이 매 사역자에게 주신 큰 목표 또는 비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먼저 마태복음 28:18-20에서 찾아보자.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자주 요점을 놓치는 말씀이다. 말씀을 한 구절씩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은 그의 제자가 하나님 아버지가 그에게 최고의 권세를 주셨음을 알기를 바랐다. 물론, 아버지의 의도는 언제 누구에게 권세를 주시든 간에 우리가 그에게 순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이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유일무이는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주신 제한적인 권세와는 달리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이시다. 그 때문에 신약전서에 600번도 넘게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나온다. (예수님이 구주라고 나온 것은 15번에 그친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가 되려 하심이라”(롬14:9)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만인의 주님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다스리시는 데에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True Saving Faith)

 

전도자들과 목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요청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절과 개념이다)하게 할 때 종종 그들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빌립보 간수가 바울에게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바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라”고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어떤 구원 또는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기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담당하기에 충분하다고 믿고, 믿음에 의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믿으며, 또 기타 수많은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것들을 믿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없다. 마귀도 예수와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을 믿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예수님 안의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는다면 나의 행위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것이고 마음으로부터 그분께 순복하게 된다. 내가 만약 순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는 나의 신발안에 독사 한 마리가 움츠리고 있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고서 침착하게 그 신발을 신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하게 자신이 믿는다고 한 것을 진정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되신 예수님이 아닌 상상 속의 예수님을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의 모든 내용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역자가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을 때 그는 첫 시작부터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역자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수가 부단히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역 속에 하나님의 보편적인 비전이 성취되도록 하는 데에는 불행하게도 실패하였다.

큰 비전(The Big Vision)

 

마태복음 28:18-19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그분의 최고의 주권을 선포 하신 후에 하나의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상).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 “그러므로”를 주목하라. 그분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다시 말해서 이는 “내가 금방 말했기 때문에… 내가 모든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내가 주님이기 때문에…사람은 마땅히 나에게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다(그리고 너희도 마땅히 나에게 순종하여야 한다)–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그 제자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나의 분부한 모든 것을 순종하게 하라”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이 바로 큰 목표이다. 우리의 모든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큰 목표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하였다고 했다”(롬 1:5). 목표는 순종이다. 순종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이다. 예수님안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한다.

그래서 오순절 날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더러 마땅히 순종하라고 한 분을 죽인 것이다. 큰 후회에 빠진 그들은 베드로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베드로는 제일 먼저 “회개”하라고 답했다. 그것은 불순종으로부터 순종으로 전환하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다음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분부하신 것처럼 세례를 받으라고 알려주었다. 베드로는 지금 제자–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하는 무리–를 삼고 있으며 정확한 말씀과 정확한 방법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역자마다 모두 자신의 사역의 성공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응당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사역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공하고 있는 것이나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죄의 회개에 대해서는 촉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라”라고만 설득하는 전도자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교 활동을 조직하는 것을 통해 큰 회중을 거느리는 교회를 세운다 해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가 최신유행을 따르는 교리만 가르치는 것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가 교회는 개척했으나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 성도들로 구성되었다면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축복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 역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실패(My Failure)

 

수년 전 내가 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성령님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비전과는 동떨어진 사역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질문을 하셨다. 내가 마태복음25:31-46에 묘사한 양과 염소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읽고 있는 중 성령님은 “만약 너의 교회 회중들이 오늘 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양에 속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염소에 속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작년에 얼마나 많은 교인이 주님 안의 굶주린 형제자매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었으며, 노숙자나 여행중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했으며, 헐벗은 지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든 자나 투옥 중인 지체들을 방문하였는가?” 나는 그들이 비록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고 나의 설교를 듣고 헌금을 드리는 일은 했지만 거의 아무도 위에서 언급한 일 혹은 그와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염소이며 나도 책망을 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 안의 형제자매의 절박한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예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못했다. 사실상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인식하였다.

그 외에도, 나는 마침내 내가 나의 회중들에게 가르쳤던 온화한 “번영신학”이 사실상 하나님의 가장 큰 목표인 제자 삼는 것과 어긋남을 깨달았다. 비록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마 6:19-24을 보라), 그것이 단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일지라도(히 13:5; 딤전 6:7-8을 보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지만 나는 나의 부유한 미국인 회중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나는(전 세계 수많은 다른 목사가 그랬듯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한 부분에 있어서는 순종하지 않도록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인식한 후로부터 나는 회개하고 나의 회중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나는 제자를 삼고 그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혹시 나의 회중 가운데 예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기를 원하지 않고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 편한 신앙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안고 이 일을 해나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맞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현상이 보여주듯이 극히 소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신자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미전도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 반면, 그들은 그들을 위해 더욱 많은 것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다. 성결에 관한한 그들은 가장 수치스러운 죄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죄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책망하는 죄들이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검증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14:21을 보라).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진실임이 밝혀졌다 — 바로 일부 자칭 그리스도인이 양의 탈을 쓴 염소가라는 사실이다. 내가 그들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화를 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주요하게 좋은 음악을 부대한 하나의 사교경험에 불과하다. 꼭 마치 세상 사람들이 술집에서 즐기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일부 설교를 듣는 것은 용인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것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것들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관해서는 듣기 싫어한다. 그들은 누구도 그들의 구원받음 여부에 대해 묻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들의 삶을 조절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이 더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또 교회시설을 개진하는 것 같이 그들이 준 것을 통해 직접적인 혜택을 입을 수 있다면, 헌금에 동참할 것이다.

자기성찰의 시간(A Time for Self-Examination)

이 책을 읽는 매 사역자마다 자기 자신에게 성령님이 나에게 물으셨던것처럼 똑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목회하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죽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만큼 양에 속하고 얼마만큼 염소에 속해 있을까?” 사역자들이 회중 가운데 염소처럼 행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 사역자는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5:31-46에서 하신 말씀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의 전반 요점은 염소들을 향한 경고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 13:35을 보라). 그분이 말씀하신 이 사랑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사랑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제자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구별될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한다(요13:24; 요일3:16-20을 보라). 요한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쓰고 있다(요일 3:14). 예수님의 명령을 가르치는 사역자를 원망하고 비판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과연 거듭남의 징표인 사랑을 드러내고 있을까? 아니, 그들은 염소가며 지옥을 향해 치닫고 있다.

모든 민족의 제자들(Disciples of All Nations)

계속해 나가지 전에, 마태복음 28:19-20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자. 가장 큰 그리고 보편적인 사명인 이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우리가 얼마만큼 집어낼 수 있을지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상).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를 원하신다. 더 정확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세상의 모든 종족 군체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족 군체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 가능하다. 이 임무는 처음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닌, 그들 뒤를 이은 매 한 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또 그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열한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가르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이 과정은 그 후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영원히 존속되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매 제자마다 모두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동참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지상명령”이 왜 지금까지 성취되지 않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비록 수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지만 진정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제자는 적고도 적다. 대다수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의지적인 결단을 내린 적이 없다. 매번 이러한 결단을 요구할 때마다 그들은 “그건 나의 사역이 아니다”그리고 “나는 그런 쪽으로 인도받은 것 같지 않다”라는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많은 목사가 이러한 말들을 하고 있으며 모든 염소가 그렇듯이 항상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데 맞는 말씀들만 골라서 따른다.

만약 자칭 그리스도인이 모두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머지않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가 합심한다면 이 일은 가능해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과 돈을 더는 잠시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예수님이 분부하신 그들의 큰 사명을 위하여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신실한 목사가 회중들에게 모 선교사가 오셔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공고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석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염소는 집에 있거나 다른 곳에 갈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에, 양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동참된다는 것에 대해 항상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마태복음28:18-20에 관한 마지막 요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셨고, 사도들은 이 명령을 신실하게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즉시 세례를 주었다. 세례는 물론 신자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에 참예함을 뜻한다. 새 신자는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매 새 신자마다 모두 새로운 성품을 가진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머리에 새기기를 원하신다. 그는 이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이 그의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전에는 죄 가운데 죽어 있었으나 이제는 성령님을 통하여 깨끗게 씻은바 되었으며 새롭게 태어났다. 이젠 그저 “용서받은” 정도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죽어 있을 때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됨을 나타낸다. 이 부분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속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이는 신자들에게 임하시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임재가 그들의 행위에 영향준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예수님의 제자도(Jesus Defines Discipleship)

 

우리는 예수님의 가장 큰 목표가 우리가 제자 삼는 것임을 확립했다. 제자란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2에서 진일보 제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리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에 의하면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의 진리를 배워가면서 점차 “자유함을 얻게” 된다. 그다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로부터의 자유함에 대해 암시한다(요 8:34-36을 보라). 그래서 알 수 있다시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배우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 후에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그러므로 예수님의 정의에 따르면, 제자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25-33에서 진정한 제자가 맺는 열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하게 정의 내리신다. 25절부터 시작하여 읽어 보도록 하자.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른다”고 하여 만족하셨는가? 수많은 회중을 거느리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고, 또 어떤 때에는 그분의 음식을 먹었던,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무리로 인해 만족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나열한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제자가 인간적으로 가장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을 반드시 미워해야만 하는가? 이는 어쩌면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라는 명령과는 달라 보이는 듯하다.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과장의 수법을 쓰셨다. 과장의 목적은 그분이 뜻하시고자 하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기준은 적어도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분을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기대는 아주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직업이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의 아내나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들을 삼아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매 사역자마다 모두 이러한 질문을 자신한테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제자를 삼는 일에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가?”

한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보아낼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들의 아내들이나, 자녀들이나 부모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

두 번째 요구(A Second Requirement)

예수님은 그날 그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시한 두 번째 요구이다. 그분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제자가 문자적으로 무거운 나무묶음을 지고 그분을 따르라는 뜻일까? 아니, 예수님은 또다시 과장의 수법을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 중 대부분은 죄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범죄에 대한 억제력으로서의 십자가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도시의 성문 밖의 주요 도로에서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시대에는 “너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보편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사람마다 모두 로마병사의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죄수들에게는 이 말이 무섭기만 하다. 왜냐하면, 몇시간 내지 며칠 동안의 혹독한 아픔과 고통이 곧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곧 “자신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아들여라”는 뜻이 된다.

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나는 네가 냄새나고 더러운 화장실 청소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달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너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화장실 청소를 하려무나”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나는 아내가 남편에게 “나는 당신이 로마인에게 세금 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은 세금 내는 날이니 세리가 지금쯤 집에 오고 있으니 어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서 그 사람에게 세금을 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같은 의미로 마태복음 16:24에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그 결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난을 감수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한 고통을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치뤄야 할 값을 계산하였고 어려움과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경기를 마치기 위해 이미 결단을 내리고 출발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기 위해 치뤄야 할 대가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뒤바침된다 . 그분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울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28-32).

예수님의 뜻은 분명하다. “만약 네가 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가는 길에 시련이 더해질 수록 견지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된다. 진정한 제자는 나를 따름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감수한다.”

 

세 번째 요구(A Third Requirement)

예수님은 그날 그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한 가지 더 말씀하셨다.

이처럼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이 과장의 수법을 쓰셨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있을 곳이 없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며 우리가 재물을 섬기는 것이 아닌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많은 불필요한 소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소박한 삶을 살며 사도행전에서 읽은 초대교회 모습처럼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고, 보물을 이 땅위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을 정리해보자. 예수님에 의하면, 만약 내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는 반드시 그분을 최고로 사랑해야 하며 내 가족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 나는 반드시 그분을 따름으로 말미암은 감수해야 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나의 수입과 소유를 관리해야 한다. (나는 많은 사람처럼 “예수님이 나의 재산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다 순종할 것이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께 순복하고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사역자가 삼아가야 할 제자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이다! 우리는 제자 삼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전 세계 수많은 사역자가 놓치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만약 그들이 내가 했던 것같이 자신의 사역을 평가해본다면, 나처럼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과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나의 회중들이 예수님께 순복한 정도를 봤을 때, 많은 사람을 아직은 진정한 제자로 보기 어렵다.

목사가여, 자신의 회중들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33에서 말씀하신 기준에 맞는 진정한 제자들인지? 전도자들이여, 당신이 전하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세워가고 있는가?

마지막 날에 우리가 예수님앞에서 최후평가를 받기 전에 우리의 사역들을 평가 해야 할 시점이 왔다. 만약 내가 그분의 목표에서 빗나갔다면, 나는 지금 곧바로 발견하기를 원한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마지막 엄중한 생각(A Final Sobering Thought)

 

누가복음 14:26-33의 말씀이 보여주다시피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명확하게 원하신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말씀을 마치실 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셨다.

그러므로[2]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 14:34-35).

보다시피 이 말씀은 상관없는 구절이 아니다. 이 구절은 그러므로 로 시작한다.

소금은 짠맛을 내기 때문에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 없어 지며 “버려지게” 된다.

이것이 제자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소금이 짠맛을 내야 하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유일한 의무는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유일한 이유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쓸데 없어 “버려지게”될 것이다. 그것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들려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곳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5:1을 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사실상 이것은 아주 엄중한 경고이다. 첫째로, 오직 짠맛을 내는 사람만이(여기서는 명백히 “완전히 순복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나머지 사람은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둘째로, “짠맛”을 내는 사람은 짠맛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지않고서야 예수님이 제자들을 경고할 필요가 없다. 이런 진리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얼마나 모순되는지 모른다. 그들은 제자가 되지 않더라도 천국에 꼭 갈 수 있으며 그들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서 다음 장들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1] 이 책속에서 나는 사역자를 지칭함에 있어서 남성대명사 he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문맥상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과 목사와 같은 전직사역자 대다수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성을 전직사역자로 부르신다고 믿고 있으며, 꽤 많은 수의 아주 효과적인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매분들을 알고 있다. 그 부분은 이 책의 12장 사역 속의 여성의 주제이기도 하다.

[2] 역주: “그러므로” 이 단어는 개역개정판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영어번역본 성경원문대로 번역하였다.

请原谅我等了这么久告诉你这

Simplified Chinese: Forgive Me for Waiting So Long To Tell You This

第九章-救主、骗子还是狂热者?

(Lord, Liar or Lunatic?)

 

你是否听过类似的表达:

“我觉得耶稣基督就是一个传说,是很久以前由一些宗教狂热者杜撰的故事,从那以后,无数人就被迷惑了。”

当你向人谈起耶稣的时候,有些人会那样说。他们以为耶稣和宙斯、赫居里士及潘多拉都是一样的。认为耶稣只是神话的想法没有任何历史根据,只是一些伪君子的个人偏见——一个理智的人怎么会有如此荒谬的言论呢?

大约二千年前,一个名叫耶稣的人曾降临世上,这是每一个历史系学生都无法否认的历史事实,若任何人执意否认就是任性的无知。这样的人甚至可能会声称乔治.华盛顿或亚伯拉罕.林肯也是一个传说。耶稣不是一个传说,《大英百科全书》关于耶稣基督的记载有二千余字。

我们如何确定耶稣是一个历史人物?虽然我们没有他的出生或死亡证明及任何照片,但更多的证据证明他在这个地球上生活过三十三年。一世纪的许多非基督徒作家记录了耶稣和早期基督徒的实际生活。

除了他们的记录,最早的历史证据是关于耶稣的四本传记。其中两本福音书是由熟知耶稣的两位门徒所写,另外两本则由同时期的两位作者所写。

从一本小说看尼克松

有些人声称福音书是科幻小说,但仔细想想那样的想法是多么滑稽。

假设有人想出版一本关于前总统理查德德德德德德.尼克松的书,其中记录了尼克松先生一生所行的很多神迹——他医治绝症病人,使死人复活,使食物增加,水上行走。不光如此,尼克松先生还被称为神的儿子,并且他因此罪名被杀。然后,他又神迹般地从死里复活,完成了他自己预言会发生的事情。

这样的书能卖出去吗?它要多久才能登上纽约时报的最畅销书排行榜?可想而知,除了傻子没有人会买这本书,因为知道它只不过是虚构的历史闹剧。毋庸置疑,作者也会遭到无情的嘲讽。

那么那四位作者所写的耶稣传记——其中记录了他所行的神迹,他宣称是神的儿子以及他从死里复活——被人广泛接受的机会有多大呢?如果他从未出现过或只是过着普通的生活,会有人相信他的故事吗?当然没有。

不仅福音书所记载的耶稣生平被人相信,并且被一遍遍地抄写争相传诵。在短短的几年里甚至被翻译成其他的语言,今天我们拥有成千上万本古代手抄本,内容包括新约的部分内容,甚至全部内容。这些手抄本可追溯到公元130年至公元400年。

这个数据与公元前350年的亚里士多德的著作相比,我们现存他的著作为数甚少的古老抄本, 最早也要到公元1100, 跟原著相距了足足1400年!

出自殉道者之口

如果四福音书所记载的内容是假的,那么任何人都可以对此嗤之以鼻,尤其对其中那些令人难以置信的事件。但事实是,没有人能够成功地诋毁那些记载,因为有数以千计的人可以证明那些事件的真实性。

成千上万人见过耶稣,成千上万人听过他的讲道,又有成千上万人被他奇迹般地医治,还有成千上万人吃过他分的食物,甚至有成千上万人亲眼目睹他被钉上十字架。并且他死里复活后至少500人见过他(见哥林多前书15:6)。

马太、马可、路加和约翰所写的耶稣传记被广泛接受,因为他们所写的事情人尽皆知。

在耶稣时代,不光很多人相信四福音书关于耶稣生平的记载,他们甚至愿意为他们的信仰牺牲生命。第一批殉道者是耶稣十二门徒中的十个。你认为他们会为一个他们知道的骗局而死吗?断然不会。

据估计,耶稣之后的三个世纪里,有六百万殉道者为他而死。这些人会为一个在历史上无法查证是否存在过的人而死吗?

四福音书的真实性

同样的推理可以证明四福音书里所记载的每个事件都是真实的。马太、马可、路加或约翰所记载的关于耶稣的任何事件,如果没有真实发生过,那么成千上万的一世纪的人们就会立刻指出他们的错误。如果他们可以证明有一件是假的,那么整本福音书的可靠性都会被质疑。

比如说,如果耶稣并没有使拉撒路从死里复活,那是非常容易反驳的。一个人可以去伯大尼(拉撒路的家乡)探个究竟,那儿离耶路撒冷只有几里路。事情发生以后你只需找一位长者采访一下,便会一清二楚:

“请问这里是否曾经有一个叫拉撒路的人?您认识他吗?他死了吗?死了多久?是否有一位叫耶稣的曾经来过伯大尼并使他从死里复活?当拉撒路从坟墓里出来的时候您在场吗?他真的活了吗?有没有人亲眼目睹这件事情的发生?他复活之后又活了多久?”用不了多久就能弄清楚耶稣是否使拉撒路从死里复活。

我们从圣经的记载中知道一大群人亲眼目睹了拉撒路的复活(见约翰福音12:17)。他们大部分都不是耶稣的狂热追随者,也没有产生幻觉。而正是这个神迹导致嫉妒的法利赛人定意杀害耶稣(见约翰福音11:47-53)。

若耶稣没有使拉撒路从死里复活,那么法利赛人唯一需要做的是:在众人簇拥着耶稣荣耀进入耶路撒冷的时候,直接抬出拉撒路的尸体横在大家面前, 那将不言而喻地证明耶稣是个骗子。但是他们无法否认拉撒路从死里复活的事实,所以能够阻止耶稣的唯一办法是杀了他!

如果耶稣没有像使徒约翰所记载的,使拉撒路从死里复活,那会怎样?那么你可以确定是约翰的福音书不会保留到二世纪——更不用说二十世纪。顺便说一下,现存的约翰福音可以追溯到公元130年。

四福音书的作者对所记录的任何事件都不敢掉以轻心,稍有差池,他和他的整本书都会遭到质疑。只有路加没有像马太和约翰一样亲眼目睹耶稣所成就的事,他才会这样开始他的记载:

有好些人提笔作书,述说在我们中间所成就的事,是照传道的人从起初

亲眼看见又传给我们的。这些事我既从起头都详细考察了,就定意要按

着次序写给你,使你知道所学之道都是确实的。(路加福音1:1-4

闪开,奥森.韦尔斯

如果福音书不是真实的,那就应该把它归在神话、童话故事或科幻小说的范畴。

首先,他们记载的神迹奇事完全证明了耶稣的神性。

其次,福音书的作者所宣讲的耶稣的话语,决定了每个人的永恒命运——取决于他们是否相信。

如果福音书不是真实的,那么它就会成为最令人痛恨的作品,因为它们误导千百万人相信了他们的永恒生命,并使千百万人白白牺牲了生命。

如果福音书不是真实的历史文献,那么它们的作者就是最卑鄙无耻的小人,更不可能被人尊为圣徒,相反,他们应该被列为史上最可耻的人。

你也许听过1938年万圣节的晚上,通过广播诵读的奥森.威尔斯的著作《星际大战》。很多听众以为那部戏剧是一则真实的新闻广播,结果导致一些恐惧的市民甚至为抵御火星人的入侵做好准备。

如果福音书是假的,那它所造成的毁坏性比那场骗局要高出百万倍。数世纪以来,无数真诚的人们,相信福音书的记载,并为此堵上他们的未来及生命。甚至很多人为信仰遭受了极大的逼迫。

福音书上所记载的神迹如此引人注目,所包含的信息也意义重大。因此福音书不可能被归类为神话或童话。

不管它们是史上最残酷、凶恶的阴谋,还是神的儿子所行神迹的真实记载;不管你爱福音书,还是恨它们。你都不能说它仅仅是神话,像潘多拉或宙斯一样。

耶稣是谁?

由于福音书的历史真实性,我们可以相信其中所包含的耶稣的话语是真实的。耶稣没有让我们去猜他的身份,他宣称是神的圣子

有些人没有傻到去否认耶稣是个历史人物,但他们倾向于认为他只是个好人——一个尊贵的宗教领袖,带来了精彩的教导。

福音书让我们毫无选择地相信他不仅是个好人。一个宣称为神的儿子、全人类的唯一救赎者, 不可能“只是一个好人”。

好好想想,耶稣宣称是神的儿子,他饶恕罪(马可福音2:5,路加福音7:48),接受敬拜(马太福音4:10,14:3328:9),宣称是永在的(约翰福音8:56-58,17:5),宣称自己是通往救赎的唯一道路(约翰福音14:6)。

他在公会受审的时候,最高祭祀问他:“你是那当称颂者的儿子基督不是?”耶稣回答说:“我是。你们必看见人子坐在那权能者的右边,驾着天上的云降临”(马可福音14:61-62)。

我们可以推断说耶稣要么在讲述一个真理,要么在说谎。如果他在讲述真理,那么他就是神的圣子。如果他在说谎,要么他是个蓄意撒谎的骗子,要么他就是被人教唆的宗教狂热者。

留给我们的只有以下几个选择:一,耶稣是道成肉身(神变成人的样子);二,他是一个虚伪可恶的骗子;三,他是个疯子。由此可见,说他只是一个好人、一个道德讲师,让人难以信服。

每个人必须做出决定:我们可以鄙视耶稣,认为他是史上最差劲的骗子;我们也可以嘲笑他,说他是弥赛亚附身的傻子;或者我们把他当做神来敬拜。不管怎样,我们都该放弃耶稣只是一个好人、一个道德讲师的想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