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Chapter Twenty-Eight)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God's Eternal Plan)

하나님은 왜 우리를 창조하셨을까? 그분은 처음부터 몇 가지 목표를 염두에 두셨던 것일까? 그분은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을 반역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셨다는 말인가? 그분은 우리의 반역 결과 인류가 받게 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예측하지 못하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그분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그들과 그 후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을 것을 알고 계셨다고 말씀한다. 놀랍게도, 그분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창조 전의 계획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강조 추가).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속할 것을 계획하셨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에 쓴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1, 강조 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예상하시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속하게 고안해낸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영원한 목적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을 영원 전부터 아셨으며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책에 기록까지 하셨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강조 추가).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신과 나의 타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줄을 아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누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을지를 아셨다.

다음 질문(The Next Question)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다면, 왜 그분은 예수님을 거부할 사람들을 만드셨을까? 왜 그분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만 만드시지 않았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해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첫째,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섬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순종 또는 불순종하거나, 회개 하거나 또는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아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미리 아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느 시점에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모든 축구 경기가 진행되기 전에 그 결과를 미리 아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기 결과를 아시기 위해서는, 이런 결과가 있는 경기가 반드시 진행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진행되지 않은 축구 경기의 결과를 아시지 못하며 아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진행되지 않은 경기에는 결과가 있을 수 없으므로 그 결과를 미리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결정을 내릴 기회가 있고 또 결정을 내렸을 때에만 그들의 결정을 미리 아실 수 있다. 그들은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께서 미리 아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만드시지 않았다(그리고 만드실 수도 없다).

또 다른 질문(Another Question)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만 원하신다면, 왜 그분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왜 그분은 우리를 영원히 순종하는 로봇과 같이 만들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와 부자간의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며 로봇과 같은 자식을 둔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자녀들과 영원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계획이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하-5, 강조 추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로봇한테서 얼마나 큰 기쁨을 얻는지를 알고 싶으면, 손에 인형을 잡고 인형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요구해보라. 당신은 결코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인형은 당신이 그에게 하라고 한 말만 할 뿐이다.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형과 로봇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마음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선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정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어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일생 동안 그들에게 그분의 창조, 그들의 양심, 복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의로운 심판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지옥의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께 비난의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벧후 3:9을 보라). 그러나 각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위해 결정해야 한다.

성경의 예정론(Biblical Predestination)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신약 성경의 말씀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개개인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은 특정 사람들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한다. 즉,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할지를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분명히 자유의지의 개념을 없애는 것이며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실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도하심 아래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로 자기 절로 선택한 사람을 미리 아셨으며 창세 전 부터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을 읽어보자.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므로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2-5, 강조 추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분 자신을 위하여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 칠천 명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로 먼저 선택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믿는 유대인들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절로 먼저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셨으며, 그것은 그분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God’s Foreknowledge)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될 사람들을 미리 아신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1-2중, 강조 추가).

우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받는다. 바울은 또한 미리 아신 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미리 아시며,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거듭난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그 영원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그분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이렇게 썼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강조 추가).

이곳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볼 수 있다 –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가(그분께서 미리 아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자녀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부 사람들은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고 이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한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의 구원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 그 선택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것을 “무조건적인 택하심”의 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아무 조건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는 “무조건적인 택하심”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자유 국가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속의 조건에 근거하여 정치 후보자를 선거한다. 우리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도 매력적인 성품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만족시킨 조건 때문이 아님을 믿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구원은 순전히 기회에 불과하며 잔인하고 불의하고 위선적이고 무지한 하나님이란 괴물에게 달려 있다! “무조건적인 택하심”이란 문구는 자체 모순적인데 그것은 택하심이란 단어 자체가 조건적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무조건적인 택하심”이라면, 그것은 전혀 택하심이 아닌 순수한 기회일 뿐이다.

큰 그림(The Big Picture)

이제 우리는 큰 그림을 보도록 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것을 아셨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그 계획은 그분의 죄 없는 독생자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정의를 드러낸다.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우리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아들 예수님처럼 될 것이라고 예정하셨다.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된 우리는 언젠가 불멸의 몸을 받게 될 것이며 완벽한 사회에서 살면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예정하심을 찬양한다!

현재의 삶(This Present Life)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의 삶에 대해 좀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주요하게, 이 세상의 삶은 모든 사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한다. 각 사람의 선택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분의 자녀가 받는 축복과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한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그림에 복종하여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을 보라). 현재의 삶은 주요하게 미래의 삶을 위한 시험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일부 오묘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왜 사탄과 마귀들이 사람을 시험하도록 허용되었는지?” 또는 “사탄이 천국에서 쫓겨날 때 왜 이 땅에 올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우리는 심지어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주요하게 인간에게 선택사항으로 제공된다. 만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라면, 모든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을 섬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투표를 요구하지만, 후보가 한 명밖에 없는 선거와 같다. 그 후보는 만장일치로 선출 될 것이지만, 그를 선거한 사람들로부터 사랑 심지어 호감을 받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그에게 투표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일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나님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고려해보자.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아무런 금지사항도 없는 동산에 두셨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환경 때문에 로봇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택하심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는 아담과 하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할 기회가 없음으로 하여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그분께 불순종할 기회를 주셔야만 그가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는지를 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아무나 시험하시는 것은 아니다(약 1:13을 보라). 하지만 그분은 모든 사람을 연단하신다(시 11:5; 잠 17:3을 보라). 그분께서 시험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 받게 된다.

완벽한 예(A Perfect Example)

우리는 신명기 13:1-3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게 된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강조 추가).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에게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한 짓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그분 백성들의 마음에 대한 시험으로 사용하셨다.

이 같은 원칙은 사사기 2:21-3:8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시기 위해 그들이 이방 민족들의 유혹을 받도록 허용하실 때에도 반영되었다. 예수님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마 4:1을 보라). 따라서 그분도 하나님께 시험받으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입증받아야만 했으며 유일한 방법은 유혹을 받아 시험받는 것이었다.

사탄이 모든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Satan Does Not Deserve All the Blame)

사탄은 이미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멀게 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기만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아무 사람이나 다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단지 자기 자신을 속임수에 빠지도록 허용하고 진리를 거절한 사람들만 속일 수 있다.

바울은 불신자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엡 4:18) 무지해졌다고 선언하였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밝혔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하-19, 강조 추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슬프게도 사탄의 속임수에 빠진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무지해지고 속임 당하기를 원하는 완고한 죄인들이다.

아무도 속임당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이 일단 부드러워지면, 사탄은 당신을 계속하여 속일 수 없다.

궁극적으로, 사탄은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동안에 결박당할 것이며 그때에는 다시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고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사탄이 결박당하기 전에는 “만국을 미혹했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가 결박당할 때에는 아무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놓이게 되면, 그는 만국을 또다시 미혹하게 된다.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계 20:7-9, 강조 추가).

하나님은 왜 사탄을 잠깐 놓아 주실까? 그것은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지만, 그분의 통치 동안 겉으로 순종하는 체했던 사람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때에 그들은 공정하게 심판받을 수 있다. 그것은 마지막 시험이 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사탄이 지금 이 땅에 영향을 주는 것이 허용된다 –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드러나게 되며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 사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그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 그곳에서 영원한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0을 보라).

내세를 위한 준비(Preparing For the Future World)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다면, 당신은 이생에서의 가장 첫 번째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험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속적인 헌신과 믿음을 결정하시기 위해 당신을 더 이상 시험하시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오직 “계속하여 믿음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다(골 1:22-23).

이 외에도, 성경을 보면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때에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순종한 대로 상을 받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미래의 특별한 상급에 합당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전히 시험을 받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0-12, 강조 추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강조 추가).

무슨 상급을 받을까?(What Will be the Rewards?)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증명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일까?

성경은 적어도 두 가지 상급에 대해 말씀한다 – 하나님의 칭찬과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이다. 이 두 가지 상급은 예수님이 하신 귀족의 비유에서 나온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12-27).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먼 나라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귀인으로 그려졌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우리는 비유에서 귀인이 각 종에게 주신 므나처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능력, 사역 그리고 기회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충성했다면, 우리는 그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비유에서 충성된 종들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도와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될 것이다(딤후 2:12; 계 2:26-27; 5:10; 20:6을 보라).

우리가 받게 되는 미래 심판의 공정성(The Fairness of Our Future Judgment)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한 비유는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되는 심판의 공정성이 완벽함을 보여준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도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마지막에 다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불공평한 것뿐 아니라 많은 다른 말씀들과 모순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눅 19:12-27; 고전 3:8을 보라).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받는 상급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가에 근거한다고 가르치셨다. 비유에서 한 시간 동안 일한 품꾼도 집 주인이 기회를 주면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동일한 상급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에게 각각 다른 기회를 주신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놀라운 은사를 사용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을 섬기고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적은 기회와 은사를 받았지만 충성 되게 주님을 위해 일한다면, 그들은 결국 같은 상급을 받을 수 있다.[1]

결론(The Conclusion)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지금 알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며 그의 제자들도 똑같이 하도록 동기부여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이라는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진일보 연구하기 위해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참고하라. 마 6:1-6, 16-18; 10:41-42; 12:36-37; 19:28-29; 25:14-30; 눅 12:2-3; 14:12-14; 16:10-13; 고전 3:5-15; 딤후 2:12; 벧전 1:17; 계 2:26-27; 5:10; 20:6.

 


[1]이 비유는 젊어서 회개하고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긴 사람과 생의 마지막 년에 회개하고 하나님을 일 년밖에 섬기지 않은 사람이 같은 보상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불공평하며 하나님께서 매 개인에게 주신 기회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전체 생애를 통해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이 일한 사람은 적게 일한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제 27 장 (Chapter Twenty-Seven)

내세(The Afterlife)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천국이 아니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천국이 의인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며 음부가 악인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죽을 때에, 그들의 영과 혼은 즉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에 올라간다(고후 5:6-8; 빌 1:21-23; 살전 4:14을 보라). 그러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것이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벧후 3:13; 계 21:1-2을 보라). 그곳에서 의인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악인은 죽으면 즉시 음부로 내려간다. 그러나 음부는 그들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장소이다. 그 날이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그다음에는 성경에서 게헨나라고 하는 불과 유황으로 불타는 호수에 던져질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모든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악인이 죽을 때(When the Unrighteous Die)

악인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구약 성경의 한 히브리어 단어와 신약 성경의 세 헬라어 단어를 공부해야 한다. 비록 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이 실제로 세 가지 다른 장소를 설명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성경에서 종종 모두 지옥으로 번역됨으로써 독자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먼저,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에 대해 알아보자.

스올이란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60번 이상 언급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악인들의 죽음 뒤의 거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거역했을 때, 하나님은 땅이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키게 함으로써 그들을 처벌하셨다. 성경은 그들이 스올에 빠졌다고 말씀한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말하니라(민 16:33, 강조 추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스올에 그분의 진노의 불이 일어난다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신 32:22, 강조 추가).

다윗 왕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시 9:17, 강조 추가).

그리고 그는 악인들을 대적하여 아래와 같이 기도하였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시 55:15, 강조 추가).

현명한 솔로몬은 젊은이에게 창녀의 간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의 집은 스올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 7:27; 9:18, 강조 추가).

솔로몬의 다른 잠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은 결국 스올에서 끝장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한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잠 15:24, 강조 추가).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 23:14, 강조 추가).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를 예시하여 바벨론 왕에게 그가 스스로 높아지려 했지만 결국 스올에 떨어지게 됨을 말하였다.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사 14:9-17, 강조 추가).

이런 말씀들과 이와 같은 다른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올은 악인들이 죽은 뒤 고통받는 장소임을 믿게 해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많은 증거가 있다.

하데스(Hades)

신약 성경의 헬라어 하데스(Hades)는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스올(Sheol)과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시편 16:10과 사도행전 2:27을 비교하는 일만 남았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강조 추가).

이는 내 영혼을 음부(Hades)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7, 강조 추가).

이로부터 보아, 신약 성경에서 하데스가 언급된 모든 열 번의 경우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씌어졌으며 종종 악인들이 죽은 뒤 감금되어 고통당하는 장소로 씌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마 11:23; 16:18; 눅 10:15; 16:23; 행 2:27; 2:31; 계 1:18; 6:8; 20:13-14을 보라).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스올이나 하데스가 악인들이 죽은 뒤에 가는 곳이며 고통 받는 장소임을 보여준다.[1]

예수님은 스올이나 하데스에 가신 적이 있는가? (Did Jesus Go to Sheol/Hades?)

우리가 시편 16:10과 그것을 바울이 사도행전 2:27에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두 곳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같은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한 설교에 따르면, 다윗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는 달리 부패하기 때문에, 다윗은 시편 16:10에서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행 2:29-31을 보라). 이 때문에, 우리는 시편 16:10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께 하신 말씀이며, 그분의 아버지가 그분의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분의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선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선언이 그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 3일 동안, 그분의 영혼이 스올 또는 하데스에 갔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이 암시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분의 아버지께 하신 말씀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라.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예수님은 아버지께 “나는 내 영혼이 스올/하데스에서 며칠 보낼 것이지만 주께서 내 영혼을 그곳에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죽을 때, 주께서 나를 악인들을 대하듯이 나의 영혼을 스올/하데스에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그곳에서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나를 사흘 만에 부활시키시며 나의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 해석은 확실한 보증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예수님의 몸이 사흘 동안 점점 부패해지다가 부활하실 때에 회복된다고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 말씀은 그분의 몸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사이에 어떠한 부패도 겪은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그분의 영혼이 스올/하데스에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께서 스올/하데스에 며칠 동안 머무를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곳에 버려지지 않는다고 해석할 필요가 없다.[2]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영혼은 스올/하데스에 버려지는 악인들이 영혼처럼 취급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 되어야 한다. 그분의 영혼은 그곳에서 단 일 분도 머무르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셨지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안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이 사흘 동안 예수님의 영혼은 어디에 계셨을까? (Where Was Jesus’ Soul During the Three Days?)

예수님께서 그분은 사흘 동안 땅속에 계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마 12:40을 보라). 그분의 몸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덤을 “땅속”으로 간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분의 영혼이 땅속 깊은 곳에 계셨음을 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혼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천국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요 20:17을 보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점을 확인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회개한 도둑에게 그날 그가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음을 명심하라(눅 23:43을 보라).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영혼이 땅속에서 밤낮 사흘 동안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그 동안 적어도 얼마 동안은 “낙원”이라 부르신 곳에 계셨다. 이 곳은 확실히 고통받는 곳인 스올이나 하데스와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땅속에 스올/하데스 외에 반드시 낙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생각은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하신 불의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에 의해 뒷받침된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하데스)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19-26, 강조 추가).

물론, 나사로와 부자 모두가 죽은 뒤에 몸속에 있지 않고 영/혼으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갔다.

나사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Where Was Lazarus?)

부자는 자신이 음부(하데스)에 있음을 발견 하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다른 장소에 있는 나사로를 볼 수 있었음을 주목하라. 사실, 나사로는 어떤 장소가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가능하게 나사로가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위로를 받았음을 나타내려는 것 같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 후,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었을까?

성경에서 부자는 나사로가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며 그들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가 땅속에서 천국까지의 거리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신적인 도움이 없이는) 나사로를 볼 수가 없을 것이며, 두 곳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는 언급을 하여 누구도 두 곳 사이를 오갈 수 없음을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울부짖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큰 구렁텅이”를 사이 두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곳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나사로가 우리가 천국이라 부르는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땅속의 독립된 곳에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한다.[3] 이 곳은 예수님이 회개한 도둑에게 말씀하셨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구약 속의 의인들도 죽은 후에 땅속의 낙원으로 갔다. 그 곳은 나사로가 간 곳이며 예수님과 회개한 도둑이 간 곳이었다.

선지자 사무엘도 죽은 후에 그 곳에 갔음이 명백하다. 사무엘상 28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영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예언하게 허락하실 때, 엔돌의 여인은 사무엘을 “땅에서 올라온 영”(삼상 28:13, 강조 추가)으로 묘사하였다. 사무엘 자신도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삼상 28:15, 강조 추가)라고 말했다. 분명히, 사무엘의 영/혼은 땅속의 낙원에 갔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 낙원이 비워지고 구약 시대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성경은 예수님이 땅의 낮은 곳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셨다”고 말씀한다(엡 4:8-9; 시 68:18). 나는 그 사로잡혔던 자들이 낙원에서 살던 모든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했다. 예수님은 당연히 스올/하데스의 사람들은 풀어주시지 않았을 것이다![4]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설교하셨다(Jesus Preached to Spirits in Prison)

성경은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설교하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 다음의 말씀을 읽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18-20).

이 성경 말씀들은 분명히 내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왜 예수님은 특별히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일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어쨌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까지 밤낮 사흘 동안 낙원에서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게헨나(Gehenna)

오늘날, 의로운 사람들이 죽을 때에는 그들의 영/혼은 천국으로 바로 올라간다(고후 5:6-8; 빌 1:21-23; 살전 4:14를 보라).

불의한 사람들은 여전히 스올/하데스에서 고통당하고 몸의 부활과 최종 심판, 그리고 스올/하데스와는 다르고 구별된 “불못”에 던져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불못으로 묘사된 단어는 자주 지옥으로 번역되는 세 번째 헬라어 단어 게헨나이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의 외곽에 위치한 힌놈 골짜기의 쓰레기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곳은 벌레와 구더기가 욱실거리는 쓰레기 더미이며 어떤 곳은 끊임없이 불타고 연기 난다.

예수님이 게헨나를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사람의 몸이 던져질 장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5:30, 10:28, 강조 추가).

게헨나와 하데스는 동일한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악인은 몸을 떠난 영/혼의 형태로 하데스에 간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천 년 동안 다스리신 후에야만, 악인들은 몸이 부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 불못 또는 게헨나에 던져지게 된다(계 20:5, 11-15을 보라). 또한, 하데스 자체도 언젠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계 20:14을 보라). 그러므로 하데스는 반드시 불못이 아닌 다른 장소여야 한다.

타르타로스(Tartaros)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되는 네 번째 단어는 헬라어 타르타로스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 단어를 단 한 번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

타르타로스는 일반적으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위한 특별한 감옥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것은 스올/하데스 또는 게헨나가 아니다. 유다 또한 결박당한 천사에 대해 썼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지옥의 공포(The Horrors of Hell)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의 운명은 봉인되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고 말씀한다.

지옥은 영원한 것이기에 거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탈출할 희망이 없다. 악인에 대한 미래의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악인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형벌은 의인이 받게 되는 영생만큼 영원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6-9, 강조 추가).

지옥은 끝없는 형벌이기에 그곳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장소이다. 그곳에 영원히 갇힌 악인들은 영원한 죄책감을 안고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된다 .

예수님은 지옥은 “바깥 어두운 데”이며, “울며 이를 갈게 될” 곳이며,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 22:13; 막 9:48)고 말씀하셨다. 아,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곳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

어떤 교단에서는 연옥의 개념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그 곳에서 신자는 한동안 고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죄를 제거하고 천국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 아무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죽음 후의 의인(The Righteous After Death)

신자가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은 즉시 천국에 올라가며 주님과 함께 있는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쓸 때 이 사실을 분명하게 썼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1-23, 강조 추가).

바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며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그의 영혼은 어떤 무의식 상태에 빠져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바울은 그에게 있어서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 때에만 그럴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에 쓴 두 번째 서신에서 만일 신자의 영혼이 그의 몸을 떠나면, 그는 “주와 함께 있게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6-8).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만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자는 자들과 함께 오시려면, 그들은 반드시 지금 그분과 함께 천국에 있어야 한다.

천국에 대한 예견(Heaven Foreseen)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결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 흘끗 보여주었을 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과 구주가 되신 예수님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살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우리가 천국에 가면, 우리의 마음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천국의 모습에 대한 최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천국은 축제와 아름다움, 무한한 변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한 곳으로 묘사되었다. 천국은 사람들이 종일 구름 위에 앉아서 하프나 치는 곳이 아니다!

천국에 대한 비전을 보여준 요한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보좌, 우주의 중심을 주목하였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음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2-11).

요한은 지구 위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을 땅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직접 천국을 직접 보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은 확실히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천국에 관한 말씀 중 가장 감격스러운 구절은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새 예루살렘은 현재는 천국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천 년 통치 후에 이 땅에 내려올 것이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 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21:10-22:5).

예수님의 모든 추종자들은 계속하여 믿음을 지킨다면 이 모든 경이로움을 기대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천국에서 서로에게 “아! 이것이 바로 요한이 계시록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었구나!”라고 말하면서 며칠 동안 보낼 것이다.

 


[1]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37:35, 욥기 14:13, 시편 89:48, 에스겔 9:10과 이사야 38:9-10과 같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의인도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사용된 성경 구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일 음부가 악인과 의인이 죽은 후에 모두 가는 곳이라면, 음부는 반드시 두 개의 별도의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한 곳은 지옥이고 한 곳은 낙원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2]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다음 두 이론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한 가지 이론은 스올/하데스는 악인 의인의 죽은 후의 거처인데 두 구획으로 나뉘며 한 곳은 고통받는 곳이고, 한 곳은 예수님이 가셨던 낙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이론은 예수님이 3일 동안 밤낮 저주를 받아 고통당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성경에서 증거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님이 스올/하데스에서 가신 적이 없다면, 이 두 이론은 모두 필요 없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의 선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론에서처럼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3일 동안 밤낮 고통을 당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속량받은 것이지 스올/하데스에서 받은 고통으로 속량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골 1:22을 보라).

[3]나사로와 부자가 모두 그들의 몸에서 분리하였지만 모두 의식이 있었고 시각, 촉각, 청각과 같은 모든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주목하라. 그들은 고통과 편안함을 경험할 수 있고 과거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며, 몸이 부활할 때 의식을 되찾는다는 “영혼이 잠잔다”는 이론을 반증한다.

[4]일부 사람들은 에베소서 4:8-9에서 말한 사로잡혔던 자들이 죄에 사로잡혔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자유롭게 된 우리 모두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제 26 장 (Chapter Twenty-Six)

금식(Fasting)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 또는 음료를 먹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성경은 금식한 사람들의 많은 사례를 기록했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 기간에 모든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만 먹지 않았다. 후자의 예는 다니엘의 3주 동안의 금식이 될 것이다. 그는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단 10:3).

성경에는 또한 음식과 물을 모두 금식한 사람들의 예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금식은 매우 드물며 3일 이상 지속하는 경우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세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아래에 있었으며 자신의 얼굴이 광채가 나기까지 하였다(출 34:28-29을 보라). 그 번의 금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번째 사십 일 금식을 반복하였다(신 9:9, 18을 보라). 그가 했던 두 번의 금식은 매우 초자연적이기에 아무도 이 점에서 모세를 모방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않고 며칠 이상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수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몇 주 동안은 생존할 수 있다.

금식하는가? (Why Fast?)

금식의 주요 목적은 기도와 주님을 구하는 데 여분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통해 제공되는 혜택을 얻기 위함이다. 성경은 기도를 떠난 금식을 언급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금식만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1]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두 번의 금식은 모두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행 13:1-3).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단순히 “주를 섬겨 금식하였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예언과 계시를 받고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의 첫 선교여행에 보냈다.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의 새로운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아마도 이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하신(눅 6:12을 보라) 모범을 따라 했을 것이다.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한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할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데 금식은 이런 기도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다. 만일 신약 성경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잠시 동안 분방할 것을 권하였다면(고전 7:5을 보라), 우리는 잠시 동안 금식하는 것이 똑같은 목적을 위함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2]

따라서 우리가 영적인 의사결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금식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많은 다른 필요를 위한 기도를 위한 금식은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도하심을 위한 기도는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종종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잘못된 욕망이나 동기, 또는 헌신의 부족과 싸우기 때문이다.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연장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 금식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냥 좋은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금식이 기도와 결합되어 있는 한, 그것을 우리의 영적인 힘과 효과성을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기의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음”(행 6:4)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그들의 영적인 힘과 효과성의 비밀의 일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부 잘못된 금식 이유(Wrong Reasons to Fast)

우리가 새 언약에서 금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적 이유를 확립한 이상, 금식에 대한 몇 가지 비성경적인 이유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가능성을 높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주요 방법은 금식이 아닌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1:22을 보라). 금식은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수단이거나 하나님께 “당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굶어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금식이 아니라 단식 투쟁이다! 다윗이 밧세바가 낳은 그의 아픈 아기를 살려 주시기를 며칠 동안 기도하였으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금식은 그의 상황을 개변시키지 못했다. 다윗은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가 살 것이라는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보여주듯이,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도와 금식을 하였다.

금식은 부흥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 아무도 부흥을 위하여 금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사도들은 단순히 예수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만일 한 성이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께 순종하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갔다(눅 9:5; 행 13:49-51을 보라). 그들은 그곳에 머물며 “영적인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흥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금식 기도가 복음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유익이 되며 그들로 하여금 부흥을 위한 효과적인 일꾼이 되게 한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의 영적 거인들은 모두 기도와 금식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임을 볼 수 있다.

금식한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으려는 욕구는 갈라디아서 5:19-21에 나와 있는 명백한 “육체의 소욕”과는 달리 합법적이며 죄가 아닌 욕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금식은 자기를 다스리는 훈련이며, 이 같은 미덕은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데에도 필요하다.

자신의 영성을 증명하거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광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금식은 시간 낭비이며 위선의 표시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이유이며,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하셨다(마 6:16; 23:5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금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사탄을 대적하면, 그들은 우리를 피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금식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귀신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 말씀은 단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 사탄의 개인적인 공격에 대적함으로써 승리를 얻어야 할 모든 신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금식으로 마귀에 대해 더 큰 권한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능히 고치지 못함을 들으신 후, 처음 하신 일이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신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마 17:17을 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자기들이 실패했는지를 물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마 17:20을 보라). 그분은 또한 각주로 “이런 종류의 귀신들은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쫓아낼 수 없다”(마 17:21)라고 추가하셨을 수 있다. 내가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각주의 방식으로 추가하셨을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이 마태복음의 원문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성경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 the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높이 평가받고 있는 영문 번역본)의 여백에는 대부분의 마태복음 원문에는 그런 말씀이 없다고 씌어 있다. 그 뜻인즉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귀신들은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쫓아낼 수 없다”라는 말씀을 가능하게 하신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영어권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의 여러 가지 번역본을 읽을 수 있는 혜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언어로 된 많은 성경 번역본은 원래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을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400여 년 전에 번역된 킹 제임스 버전을 번역한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의 여백에는 많은 사본에는 “그리고 금식”이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 말씀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한 사람이 모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신 것처럼(마 10:1을 보라) 한 사람에게 그런 권능을 주셨다면, 그 사람은 이미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식하는 것이 자신의 권능을 더 늘려줄 수 없다. 물론, 금식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함으로써 영적인 민감성을 높아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 안에서 아마 믿음도 커가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실제로 종류의 귀신들에 대해서만 그러한 말씀을 하셨음을 명심하라.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특정 종류의 귀신들을 쫓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성공적으로 다른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눅 10:17을 보라).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에 대한 사탄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금식에 관한 지나친 강조(Overemphasis Regarding Fasting)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게도 금식을 하나의 종교로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지배적인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 서신에서는 단 한 번도 금식을 언급한 적이 없다.[3] 신자들에게 금식을 어떻게 하고 언제 해야 할지에 대해 가르친 적이 없으며 금식할 것에 대한 격려도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금식이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금식은 더 자주 언급되었다. 가장 많이는 한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이 애도의 기간이거나 회개하는 기간, 혹은 국가적인 또는 개인적인 위기 때 하는 절박한 기도와 연결되었다(삿 20:24-28; 삼상 1:7-8; 7:1-6; 31:11-13; 삼하 1:12; 12:15-23; 왕상 21:20-29; 대하 20:1-3; 스 8:21-23; 10:1-6; 느 1:1-4; 9:1-2; 에 4:1-3, 15-17; 시 35:13-14; 69:10; 사 58:1-7; 단 6:16-18; 9:1-3; 요 1:13-14; 2:12-17; 욘 3:4-10; 슥 7:4-5을 보라). 나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금식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구약 성경은 또한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더 중요한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금식에만 치중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8:1-12; 슥 7:1-14을 보라).

물론, 예수님은 금식을 지나치게 조장시켰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금식하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비난 받으셨다(마 9:14-15을 보라). 그분은 그들이 더 중요한 영적인 일들보다 금식을 더 중히 여김을 꾸짖으셨다(마 23:23; 눅 18:9-12을 보라).

반면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금식할 것을 분부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그들이 정기적으로 금식할 줄을 예상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분은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에 대해 보상하심을 약속하셨다. 그분 자신도 어느 정도 금식하셨다(마 17:21을 보라).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올 것이며 그 때는 바로 그분이 그들을 떠나실 때라고 말씀하셨다(눅 5:34-35을 보라).

얼마나 오랫동안 금식해야 하는가?( How Long Should One Fast?)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성경에 기록된 사십 일 동안의 금식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두 번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금식한 것을 살펴보았다. 엘리야도 사십 일 동안 금식하였으나 그는 미리 천사가 주는 떡을 먹었다(왕상 19:5-8). 예수님 사십 일 동안의 금식에도 매우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초자연적으로 성령님에 의해 광야로 인도받으셨다. 그분의 금식이 끝날 무렵 사탄의 초자연적인 유혹을 경험하셨다. 또한, 금식이 끝날 때에 천사들이 그분의 수종을 들었다(마 4:1-11을 보라). 사십 일 금식은 성경의 규범이 아니다.

만일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 끼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는 금식한 것이다. 금식을 단지 금식한 날 수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두 번의 금식은 분명히 긴 시간의 금식이 아니었다(행 13:1-3; 14:23을 보라). 그것은 단지 한 끼의 금식일 수 있다.

금식은 주님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하므로 나는 당신이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금식하여 당신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을 때까지 하기를 권장한다.

금식은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시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금식은 단지 성령님에 대한 당신의 민감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당신이 금식하는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어려움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분별해내는 것이다.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Some Practical Advice)

금식은 일반적으로 인체에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금식함으로써 사람들은 연악함, 피로, 두통, 메스꺼움, 현기증, 복부 경련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커피, 차 또는 다른 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면, 이러한 증상 중 일부는 카페인 섭취를 중단한 데 있다. 이런 경우에 속한 사람들은 금식하기 며칠 전부터 그런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만일 한 사람이 정기적 또는 반 정기적으로 금식하다 보면, 그는 보통 적어도 처음 두 주에 어느 정도 연약함을 경험하게 되지만, 점차 자신의 금식이 쉬워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금식할 때 탈수하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금식을 멈출 때에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금식했을수록 멈출 때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의 위장이 사흘 동안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지 않았다면,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섭취하여 금식을 멈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다. 그는 소화하기 쉬운 음식과 과일 주스로 시작해야 한다. 긴 시간의 금식은 소화기계통이 다시 먹는 것을 조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하게 하지만, 한 두 끼의 금식은 특별한 조정 기간이 필요 없다.

일부 사람들은 적당한 금식은 실제로 우리 몸의 건강을 증진하는 수단임을 확신하는데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나는 아픈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치유받았다는 증언을 많이 들었다. 금식은 몸을 휴식시키고 정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아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첫 번째 금식 때 가장 힘들어 할 것이다. 금식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인체 내의 정화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할 수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2~4일 동안 금식하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배고픔이 다시 시작하는 것은(보통 몇 주 후), 조심스럽게 금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체가 저장된 지방을 다 활용하고 이제는 필수적인 세포를 활용하는 기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 주리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마 4:2을 보라).

 


[1]나는 이레 동안 금식했지만 아무런 영적인 혜택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영적인 목적이 없었고 기도하는데 여분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킹 제임스 버전의 고린도전서 7:5에서는 부부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구절을 번역한 대부분의 현대 영어 번역본은 금식을 언급하지 않고 기도만 언급했다.

[3]유일한 예외는 고린도전서 7:5에서 결혼한 부부의 금식에 대한 바울의 언급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영어 번역본 중에서 이것은 다만 킹 제임스 버전에서만 발견된다. 비자발적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 27:21, 33-34, 고린도전서 4:11과 고린도후서 6:5; 11:27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한 것이다.

제 24 장 (Chapter Twenty-Four)

대립, 용서와 화해(Confrontation,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우리가 이전 장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연구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마 6:14-15을 보라).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그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에 비유했다(마 18:23-35을 보라). 누군가가 당신한테 빚을 졌는데 당신이 그 빚을 탕감해주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그의 빚 문서를 파기한다. 당신은 더 이상 상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 채무자에게 화를 품지 않는다. 당신은 이제는 그를 그가 당신에게 빚졌을 때와 다르게 바라본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면 용서해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에는 우리에게 그분을 노하게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지우지 않는다. 그분은 더 이상 그 죄 때문에 우리에게 화를 품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한 짓에 대해 징계하거나 처벌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화해되었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를 풀어주며, 자비를 베풂으로써 정의 또는 복수의 욕망을 극복한다.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화를 품지 않는다. 우리는 화해하였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분노나 원한을 품고 있다면, 나는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종종 자기 자신을 속인다. 그들은 그들이 누군가를 용서하였다고 말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마음속 깊이 가해자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 그들은 가해자를 회피하는데 그것은 그들을 만나면 억제된 분노가 다시금 표면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가 형제에게 노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마 5:22을 보라)

지금 내가 한 가지 질문해보자. 어느 사람을 용서하기가 더 쉬운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인가 아니면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인가? 물론,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무한대 쉬워 보인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만일 회개한 가해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어느 경우가 더 큰 죄일까? 만일 이 두 경우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나는 우리가 회개한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악이라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놀라운 해석(A Surprise from Scripture)

이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다른 한 질문을 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가 자기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실까?

우리가 성경을 더 가깝게 연구할수록, 우리는 대답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놀랍게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가 자신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우리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단순히 용서하기를 원하실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마태복음 18:15-17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단계를 따르며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서 추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네 번째 단계(추방)에 도달하면, 용서와 추방이 호환되지 않듯이 가해자에게는 용서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용서한 후 교회에서 추방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의 결과는 화해이지 단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만, 지금부터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추방당한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실제로는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설명하신 네 가지 단계에서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는 한, 첫 번째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단계 이후에도 용서는 부여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어떤 단계 이후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로 취급된다. 오직 가해자가 당신의 말을 들을 때(즉, 회개할 때)에만, 당신이 “형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곧 화해를 이룬 것이다).

대립의 목적은 용서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에 따라 예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1) 가해자가 회개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그와 대립하며 (2) 그가 회개하면 (3) 용서해준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형제가 대립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를 단순히 용서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미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우리는 죄 지은자를 사랑하며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고 싶기 때문에 그들과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설명하신 화해를 위한 세 단계의 노력을 다하였다면, 네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1] 우리가 음행하거나 술 취하거나 동성애자인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자들과(고전 5:11을 보라) 사귐이 없듯이, 우리는 교회의 권계에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과도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며 그분의 교회에 대한 비난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본(God’s Example)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할 우리의 책임을 더 깊이 생각해 볼수록, 우리는 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하시지 않은 것을 우리가 하기를 기대하시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물론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자비를 베푸신다. 그분은 자신의 진노를 억제하시고 그들에게 회개 할 시간을 주신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용서받는 것은 그들의 회개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하시지 않는다. 그럼 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이로부터 보아, 사람이 용서하려 하지 않는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통탄할 죄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지 않는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교회의 규율에 관한 네 단계를 설명하신 후, 베드로가 아래와 같이 물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베드로는 예수님이 조금 전에 하나의 죄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형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셨을 때 회개하지 않는 형제의 죄를 수백 번 용서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용서한 사람을 증오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또 다른 질문이 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절대 회개하지 않을 수백 가지의 죄를 지은 신자를 수백 번도 넘게 용서해줌으로써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신다면, 왜 그분은 우리의 배우자가 그가 범한 유일한 죄인 간음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겠는가(마 5:32을 보라)?[2] 그것은 오히려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예수님의 자세한 해석(An Elaboration)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형제를 사백 구십 번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 그분은 베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3-35).

첫 번째 종은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주목하라. 또한, 두 번째 종도 겸손하게 첫 번째 종의 용서를 구하였음을 주목하라. 첫 번째 종은 자기가 용서받은 것처럼 두 번째 종을 용서해주지 않았으며 이것은 주인을 크게 화나게 했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비유에서 전혀 설명되지 않은,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을 그에게 원하신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대립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친 후에는 그들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대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더욱 그래 보인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말씀에 비추어 그가 회개하지 않은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더욱 적다. 예수님은 우리가 탕감받은, 영원히 갚지 못할 모든 빚을 다시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정당한 징계가 될 수 있을까? 만일 한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하면, 그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되며 그가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도 용서하시지 않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리실 수 있을까?

용서의 개요(A Synopsis)

예수님께서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것에 대한 기대는 누가복음 17:3-4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에서 간결하게 명시되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강조 추가).

더 이상 명확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가 회개할 때 그들을 용서해주기를 기대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한 것 처럼 우리를 대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간구하기 전에는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기를 기대하신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에 대하여 원한을 품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와 대립하도록 명령받았으며, 그렇게 해야만 그와의 화해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또한 죄 지은 대상인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죄 지은 신자를 용서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단지 대립을 피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는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들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가해자를 피하기 위해 애쓰며 종종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화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대립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본받아, 우리에게 죄 지은 신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립함으로써, 회개와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백성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이러한 사랑은 책망은 허용하나 원한을 품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에도 이러한 계명이 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7-18, 강조 추가).

이의(An Objection)

그러나 마가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이 한 구절이 우리가 이 주제에 관해 고려했던 다른 모든 구절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잘 확립된 사실에 비추어 해석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용서의 구체적인 기교나 용서받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께 용서받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한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간구함에 입각한다는 성경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무시할 수 있을까(마 6:12; 요일 1:9을 보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기서 그점을 언급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현명하지 못한 가정이다. 또한, 우리의 용서가 그들이 용서를 구하는 것에 입각한다는 성경의 그 밖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이의(Another Objection)

예수님은 그의 옷을 나누는 군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단지 어느 정도까지만 그들을 용서하셨다. 그것은 무지한 자에게 베푸신 자비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자기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군인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그들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 그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옷을 나눈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만 보장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사형을 집행해야 할 또 한 명의 죄수로만 간주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면해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고통을 가져다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셨는가? 아니, 그분은 그러지 않으셨다. 예를 들어, 유다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셨다(마 26:24을 보라). 예수님은 분명히 그분의 아버지께서 유다를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시편 69편과 109편을 예수님의 예언 기도로 본다면, 베드로가 분명하게 말했던 것처럼(행 1:15-20을 보라), 절대 용서하셨을리가 없다. 예수님은 무지한 범법자가 아닌 유다에게 심판이 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의 옷을 나눈 무지한 군인과 같은 불신자들처럼 우리에게 한 짓에 대해 무지한 자들에 대해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 하며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라신다(눅 6:27-28을 보라).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그들의 증오를 녹이고, 선으로 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점은 심지어 모세의 율법에도 기록되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출 23:4-5)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 25:21-22).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지만(눅 6:27-28을 보라),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사실상,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용서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그분의 옷을 나눈 군인을 용서하시기를 기도하셨다고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살펴본 성경의 다른 모든 사항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기를 기대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죄를 모르고 죄 지은 사람을 자동적으로 용서해주어야 하며 불신자들에게 특별한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요셉은 어떠한가? (What About Joseph?)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은혜롭게 용서한 요셉은 종종 용서를 구하는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야 한다는 본보기로 사용된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과연 이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들을 회개의 장소로 이끌기 위해 그들에게 적어도 일 년 동안의 연속적인 시련과 시험을 주었다. 그는 심지어 그 중의 한 형제를 애굽에 몇 달 동안 감금까지 하였다(창 42:24을 보라). 그의 모든 형제들이 마침내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창 42:21; 44:16을 보라),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의 대신하여 자기가 종으로 머무르겠다고 할 때(창 44:33을 보라), 요셉은 그들이 더이상 자신을 팔 때처럼 질투와 이기심이 많은 형제들이 아님을 알아냈다. 바로 그다음에야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고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요셉이 즉각적으로 그들을 “용서”하였다면,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용서를 하라”는 가르침의 결함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와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해주는 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1) 거짓 용서를 하게 되고 화해를 이루지 못한다 (2) 죄 지은 자가 회개하지 않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8:15-17의 실천(The Practice of Matthew 18:15-17)

예수님께서 나열하신 화해의 네 단계는 매우 간단해 보여도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네 단계를 설명하실 때에 갑형제는 을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다고 확신한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갑형제가 잘못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럼 아래에 모든 가능한 상황을 고려해보자.

만일 갑형제가 을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지었다고 확신한다면, 그는 먼저 자기가 눈의 티를 찾듯이 을형제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지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많은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그냥 간과하거나 너그럽게 받아주어야 한다(마 7:3-5을 보라). 그러나 만일 갑형제가 자신이 중요한 범죄에 대해 을형제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는 을형제와 대립해야 한다.

그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개인적으로 을형제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 그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고 화해가 목표여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을형제의 잘못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죄를 폭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죄들을 덮어줄 것이다.

그의 대립은 온유해야 하며 그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아래 말과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을형제, 나는 우리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해 내가 마음의 벽을 쌓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장벽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왜 당신이 나에게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지를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이 문제를 일으킨 점이 있다면 당신이 나에게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서 그는 을형제에게 그가 죄 지은 점이 무엇인지를 온유하게 알려줘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을형제는 자기가 갑형제에게 죄 지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가 깨닫게 되면 용서를 구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갑형제는 을형제를 즉시 용서해주어야 하며 그 둘은 화해하게 된다.

다른 하나의 가능한 상황은 을형제는 갑형제가 자기에게 범한 잘못을 말함으로써 갑형제에게 범한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 할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을형제는 언녕 갑형제와 대립했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결국 대화가 오가기에 화해의 희망이 보인다.

이러한 경우에, 서로에게 죄 지은 당사자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각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용서하고 또 용서를 받아야 한다.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된다.

세 번째는 갑형제와 을형제가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단계(Step Two)

갑형제와 을형제가 지금 그들의 화해를 돕기 위해 누가 개입해야 할지에 대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이상적인 것은, 갑형제와 을형제를 잘 알고 또 사랑해주는 병형제와 정형제가 참여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그들의 공정성을 보증할 수 있다. 그리고 병형제와 정형제만 이 분쟁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갑형제와 을형제를 사랑하고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만일 을형제가 이 점에 대해 협조하지 않는다면, 갑형제는 다른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을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만일 병형제와 정형제가 현명하다면, 그들은 갑형제와 을형제 모두의 관점을 듣기 전까지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병형제와 정형제가 일단 판단을 내린 후에는, 갑형제와 을형제는 그들의 결정에 복종하여야 하며, 그들 중 일방 또는 쌍방은 권유받은 대로 서로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병형제와 정형제는 일방의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쌍방이 모두 회개하기를 권유함으로써 지나친 공평을 주장하여 개인적인 위험을 적게 감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갑형제나 을형제 중 누구라도 그들의 재판을 거부한다면, 그것을 전체 교회 이전에 항소하게 되며, 그들의 비겁한 재판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병형제와 정형제는 갑형제와 을형제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과 타협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왜 두 명의 재판관이 한 명보다 나은지를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두 명의 재판관은 진실을 밝히는 데 있어서 서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명의 결정은 갑형제와 을형제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 단계(Step Three)

갑형제 또는 을형제 중 한 명이 병형제와 정형제가 내린 결론을 거부할 경우, 이 문제를 전체 교회에 반영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는 제도적 교회에서 종래로 실행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종래로 지역교회를 가정교회의 크기보다 더 크게 의도하신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갑형제와 을형제에 대해 잘 알고 아껴주는 작은 규모의 교회가 세 번째 단계가 의도된 성경적인 설정이다. 제도적 교회에서 세 번째 단계는 모든 사람이 갑형제와 을형제를 잘 알고 사랑해주는 작은 그룹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만일 갑형제와 을형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의 그룹에 소속되었다면, 두 그룹에서 각각 가장 적합한 구성원들 몇 명씩 의사결정 그룹으로 섬길 수 있다.

교회가 일단 그 판결을 내리면, 갑형제와 을형제는 모두 그 판결에 복종해야 하며, 복종하지 않는 것의 결과를 알아야 한다. 사과하고 용서를 베풀고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갑형제나 을형제가 권장받은대로 사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야 하며 교인들은 누구도 더 이상 그와 함께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통상적으로, 이 지경에 이르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자발적으로 교회를 떠났거나, 이런 단계를 밟기 전에 이미 떠났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영적 가족을 사랑하는데 진정으로 헌신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보편적인 문제점(A Common Problem)

제도적 교회에서, 분쟁을 해결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데 이런 교회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하는 목사가 있으며 그런 목사는 다른 목사들과 진정한 관계를 세우지 않았으며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 편을 들어주며 그들이 하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어준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화해를 위한 단계를 효과적으로 폐해버린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런 목사들이 교회로 환영했던 상처 받은 자들은 불과 몇 달 또는 몇 년 사이에 또다시 상처받고 다른 교회로 떠나간다.

예수님은 교회가 가정의 크기에 맞게 충분히 작고 그 지역의 목사 / 장로 / 감독들이 한 몸 안에서 협력하기를 바라셨다. 따라서 한 교회에서 축출당한 사람은 그 지역의 모든 교회에서 축출당한 것과 같다. 새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에게 그가 전에 소속되었던 교회의 배경에 대해 물어보고 이전 교회의 지도자와 문의하여 그런 사람들을 환영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 목사 / 장로 / 감독의 책임이다.

거룩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God’s Intention for a Holy Church)

제도적 교회의 또 다른 보편적인 문제점은 교회가 종종 예배만 드리기 위해 모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순전히 사회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특히 목사들은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모르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지속적으로 얼룩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외부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 점을 보더라도 제도적 교회의 구조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분의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거룩하지 않고 위선적인 사람들은 종종 큰 제도적 교회에 숨어 있으며 그리스도께 치욕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 18:15-17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가 자결하고 헌신 되고 거룩한 사람들로 이루어지기를 분명하게 의도하셨다.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게 되며 그분의 순결한 신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남편에게 부정한 큰 창녀를 보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상황을 말할 때, 하나님은 교회가 자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뜻함이 분명하다. 교회에 이미 받아들여진 지체가 실제로 자신의 계모와 불륜 관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 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5, 9-13).

이런 사람은 화해의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진정한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를 “소위 형제”와 같은 “악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몇 구절 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분명한 것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처럼 부도덕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런 사람들은 형제로 취급할 수 없으며 화해의 네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교회에서 쫓겨나야 하며, 사탄에게 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그들의 자기기만을 부추기지 않게 되고 그들은 회개해야 할 필요를 볼 수 있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5:5).

오늘날, 전 세계의 대형 교회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체 하는데 그들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불신자들이며 마땅히 교회에서 축출당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가 회개하지 않은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를 교회 내에서 쫓아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 종종 “은혜”의 기치 아래에 비슷한 문제를 가진 다른 “신자”들에 의해 격려받도록 교회에 배치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삶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한 모욕이다.

타락한 지도자(Fallen Leaders)

마지막으로, (간음 죄와 같이) 심각한 죄에 빠졌던 지도자가 회개하는 즉시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어야 할까? 비록 주님은 회개한 지도자를 즉시 용서하시지만(교회도 그래야 한다), 타락한 지도자는 그가 사역했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신뢰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지도자들은 자발적으로 지도자 위치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신뢰성을 입증할 수 있을 때까지 영적인 감독 아래에 복종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겸손하게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작은 일부터 섬기기를 꺼리는 사람은 교회 내의 아무에게도 지도자로서 복종 받을 수 없다.

요약(In Summary)

제자 삼는 사역자는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도록”(딤후 4:2)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제자들에게 항상 자비로운 관용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필요할 때에는 온유하게 대립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하여 대립하며, 언제든지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거짓 용서를 함으로써 깨진 관계에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교회를 순수하고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을 찬양하자!

대립과 교회 규율에 관한 보다 많은 연구를 하려면, 로마서 16:17-18; 고린도후서 13:1-3; 갈라디아서 2:11-14;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디모데전서 1:19-20, 5:19-20; 디도서 3:10-11; 야고보서 5:19-20; 요한이서10장-11장을 참고하라.

 


[1]교회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후에 회개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를 용서해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간음을 범한 배우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 배우자와 이혼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화해의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부정한 배우자가 회개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그를 용서해야 한다.

제 25 장 (Chapter Twenty-Five)

주님의 징계(God's Discipline)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3-13).

히브리서 저자의 계시에 따르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모든 자녀를 징계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 징계받은 적이 없다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아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징계에 대해 알고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과 선하심에만 초점을 두는 일부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모두 마귀의 공격으로 해석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회개하게 한다면 이런 생각은 큰 오류가 될 수 있다.

좋은 부모라면 자녀들이 배워가고, 성숙해지고, 성인으로서의 책임 있는 삶에 준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녀들을 징계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분을 더 잘 섬기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설 준비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성경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라고 말씀한다.

어떤 자식도 부모의 채찍질을 즐기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좀 전에 읽다시피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받을 때의 경험은 “즐거운 것이 아닌 슬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더 좋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징계가 “의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를 징계하시는가? (When and How Does God Discipline Us?)

모든 좋은 아버지들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불순종할 때에만 그들을 징계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마다, 그분의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매우 자비로우시며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신다. 그분의 징계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반복적인 불순종과 그분의 반복적인 경고 다음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징계하시는가? 우리는 앞 장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는 연약함, 질병, 심지어 조기 사망의 형태로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0-32).

우리는 모든 질병이 다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된다(욥의 경우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질병의 타격을 입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지 않았는지 자신의 영적 건강을 점검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기 심판을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병이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면, 우리가 회개하면 치유받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 것은 논리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으로, 바울은 우리가 실제로 세상과 함께 정죄 받는 것을 피면 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는 오직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인도하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과 함께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천국에 가는 길에 있어서 거룩함은 선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은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그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고 있다(마 7:21을 보라). 따라서, 우리가 죄를 계속 짓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생을 상실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고 지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의 사탄(Satan as a Tool of God’s Judgment)

성경의 많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징계의 목적을 위해 사탄을 사용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 종의 주인이 자신이 용서해 준 종이 그의 동료를 용서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노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주인은 그의 용서하지 않은 종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예수님은 엄숙한 말씀으로 이 비유를 마무리 지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누가 “옥졸들”인가? 그것들은 악마와 그의 귀신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녀를 악마에게 내어줌으로써 그가 회개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탕자가 배운 것처럼 고난과 재앙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는 일종 방식이다(눅 15:14-19을 보라).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탄이나 악한 영을 사용하셔서 그분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그들의 삶 속에서 징계하시거나 심판하신 예를 찾을 수 있다. 한 예로, 사사기 9장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 (삿 9:23)하게 하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의 아들들에 대한 그들의 악행을 심판하셨다.

성경은 또한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 왕을 번뇌하게 함으로써 그가 회개하게 하였다고 말씀한다(삼상 16:14). 그러나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반역 때문에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이러한 구약의 두 예에서, 성경은 악한 영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부림을 받기를 기다리는 악한 영이 천국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은 단순히 사탄의 악한 영이 죄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이 고통 아래에서 회개하기를 바라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의 다른 징계방법(Other Means of God’s Discipline)

구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종종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삶 속에 기근이거나 외적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결국 회개하게 되고 그분은 그들을 원수에게서 구원해 주셨다. 그들이 몇 년 동안의 억압과 경고 후에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외부 세력이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들을 포로로 삼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는 것을 허용하신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삶 속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허용하시거나 그들의 원수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이 장의 첫 부분에 인용한 하나님의 징계(히 12:3-13)에 관한 말씀은 그 당시 히브리 신자들이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배경 속에서 한 것이다. 모든 박해가 다 불순종 때문인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는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올바른 반응(Rightly Reacting to God’s Discipline)

이 장의 시작 부분에 인용된 권고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에 두 가지 방식으로 잘못 반응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거나”,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할 수 있다”(히 12:5). 만일 우리가 주님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긴다는 것은” 우리가 징계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경고를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낙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징계가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어느 쪽의 반응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가 사랑임을 인식했을 때에는 회개하고 그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멈추시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주님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죄에 대한 필연적인 대가를 면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한 자에게 응답하신다(사 66:2을 보라). 성경은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라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7-8).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징계에 관한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하여 아래의 말씀들을 참조하라. 역대하 6:24-31, 36-39; 7:13-14; 시편 73:14; 94:12-13; 106:40-46; 118:18; 119:67, 71; 예레미야 2:29-30; 5:23-25; 14:12; 30:11; 학개 1:2-13; 2:17; 사도행전 5:1-11; 요한계시록 3:19.

제 23 장 (Chapter Twenty-Three)

성례(The Sacraments)

예수님은 교회에 두 성례를 주셨다. 물세례(마 28:19을 보라)와 주의 만찬(고전 11:23-26을 보라)이다. 먼저 물세례에 대해 살펴보자.

새 언약에서, 모든 신자는 세 가지 부동한 세례를 경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세례, 물세례와 성령세례이다.

사람은 거듭날 때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를 받는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된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롬 6:3; 엡 1:22-23; 골 1:18, 24을 보라).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후에 받게 되며, 모든 신자는

이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자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은 후 가능한 한 빨리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 물세례는 새 신자의 첫 번째 순종의 행동이어야 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강조 추가).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새로운 회심자는 개종한 후 거의 예외 없이 즉각적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2:37-41; 8:12-16, 36-39; 9:17-19; 10:44-48; 16:31-33; 18:5-8; 19:1-5을 보라).

세례에 대한 가지 비성경적인 생각들(Some Unscriptural Ideas About Baptism)

일부 사람들은 새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 때 몇 방울의 물을 뿌리는 것에 그치는데 이것이 과연 정확할까? 신약 성경에서 세례로 번역된 동사는 헬라어로baptizo인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잠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물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몇 방울의 물에 뿌림 받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잠겨야 한다. 우리는 곧 살펴보게 될 기독교 세례의 상징적 의미도 잠겨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일부 사람들은 유아 세례를 베푸는데, 성경에는 유아 세례에 대한 예가 없다. 이런 세례는 사람이 세례를 받은 후 거듭난다는 “세례 재생”의 교리에서 유래했다. 성경은 사람이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따라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만큼 충분히 큰 아이들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유아와 어린아이들은 없다.

일부 사람들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물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성경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사도행전 10:44-48과 11:17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가족들은 물세례를 받기 전에 구원받고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요 14:17을 보라).

일부 사람들은 사람이 그들의 특정 공식에 따라 세례를 받지 않으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올바른 세례를 위해 따라야 할 구체적인 의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부 사람들은 신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행 8:16)으로 세례를 받아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복음을 듣기를 기다리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를 논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세례의 성경적인 상징(The Scriptural Symbolism of Baptism)

물세례는 새 신자의 삶에 이미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상징한다. 가장 단순하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씻어버렸다는 것을 나타내며,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졌음을 나타낸다. 아나니아는 사울(바울)이 회개한 후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강조 추가).

둘째로, 물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상징한다. 우리가 일단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 시점부터 “그리스도 안에”있다고 하나님에 의해 간주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리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돌렸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장사되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모든 신자는 물세례를 받을 때마다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세례를 받아야 한다.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은 구약의 유월절에서 기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신 날 밤에, 매 가정에게 일 년 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그들의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리라고 지시하셨다. “죽음의 천사”가 그날 밤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면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일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 묻은 피를 볼 때에 “넘어갈”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먹고, 또한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날을 기념하였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로 삼아 매년 같은 시간에 기념하도록 하였다(출 12:1-28을 보라). 분명한 것은, 유월절의 어린 양은 고린도전서 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불리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예수님께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월절을 기념하였다. 예수님은 유월절 축제 기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진정으로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의 부르심을 성취하셨다.

우리가 먹는 떡과 마시는 주스는 우리를 위하여 찢어진 그분의 몸과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흘리신 그분의 보혈을 상징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6-29).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때와 방법(When and How)

성경은 주의 만찬에 얼마나 자주 참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에는 그것이 가정교회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완전한 식사이었음이 분명하다(고전 11:20-34을 보라). 주의 만찬은 유월절 식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완전한 식사의 한 부분으로 제정하셨으며, 초대교회 때에는 주의 만찬을 완전한 식사로 먹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그렇게 먹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는 “사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합당하지 않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27-32).

우리는 주의 만찬을 취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보도록 권면 받았으며, 만일 어떠한 죄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회개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다. 우리는 고백하지 않은 죄와 함께 그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찬에 참여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처럼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병들고 조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주요한 죄는 사랑의 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 말다툼하고 싸우고 있었다. 실제로, 서로에 대한 헤아림이 부족한 것은 심지어 주의 만찬에서도 드러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시장하나 어떤 사람은 취하였다(고전 11:20-22).

우리가 먹는 떡은 지금은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우리는 떡 한 덩어리를 나누는데 그것은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한다(고전 10:17을 보라). 그리스도의 한 몸을 나타내는 떡을 나눌 때에 한 몸 안의 다른 지체들과 싸우고 분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인가! 우리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어야 한다.

제 22 장 (Chapter Twenty-Two)

성령의 인도를 받는 법(How to be Led by the Spirit)

요한복음은 신자들의 삶속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을 많이 기록하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읽어 보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7, 12-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그들 안에 거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성령님은 또한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장래 일을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보면,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덜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익이며, 그렇지 않으면 성령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과 항상 함께 계셨던 것처럼 성령님과의 교제도 마찬가지로 친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타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성령님과 함께 있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보다 유익이 될 수 없다.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가?

그분의 이름인 성령은 그분이 우리를 인도함에 있어서 가장 주된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거룩해지도록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거룩함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속하는 것은 모두 성령님의 인도의 영역안에 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일반적인 계명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독특한 사역에 관련된 그리스도의 특정 계명에도 순종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신이 당신의 특정 사역에 관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면, 당신은 또한 거룩함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인도받아야 하며, 둘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은 목사들은 성령님이 그들을 위대한 사역 공적과 기적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지만, 거룩함의 “작은” 문제에 관해서는 무덤덤하다. 그것은 큰 오류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인도하셨는가? 주로 그들에게 일반적인 거룩함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에 비하면, 그들의 사역적인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드물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성령님께 인도받고 싶다면, 당신은 우선 그분의 인도를 받아 거룩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썼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아야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 물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할지 여부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현혹하려 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는 육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른 인도로부터 성령님의 인도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성숙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분은 항상 우리가 바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인도하시며, 이런 일들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요 16:14을 보라).

성령님의 음성(The Voice of the Holy Spirit)

비록 성경에 의하면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때로는 환상, 예언, 또는 들을 수 있는 음성과 같이 멋진 방법을 사용하신다고 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성령님은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방식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즉, 만일 성령님이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이끌어갈” 것이며 우리는 특정 방향을 따라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의 음성을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양심의 소리가 어떤지를 알고 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그 유혹에 굴복하지 마십시오”라는 소리를 진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안의 무언가가 그 유혹을 저항하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지었다면,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소리를 진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안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뿐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고 일반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갑작스러운 계시(항상 성경 말씀과 일치하다)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다. 그런 계시들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10분 정도 걸릴 수 있지만 단 몇 초 만에 성령님에 의하여 받을 수 있다.

성령님은 사역의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단순하게 이런 내적인 인도 하심과 감동에 민감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우리는 사역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받을지를 천천히 (시행착오를 통하여) 배워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우리의 합리적 또는 비합리적인 사고)가 우리의 마음(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을 지배하게 할 때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관해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인도하신 방식(How the Spirit Led Jesus)

예수님은 내적인 감동으로 예수님의 인도 하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발생한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강조 추가).

예수님은 진짜 음성을 듣거나 비전을 보고 광야로 인도받으신 것이 아니다 – 그분은 단순히 몰아내심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도록 우리를 끌어당기고, 인도하고, 확신 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예수님은 지붕을 통해 내려온 중풍 병자에게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은 그분이 신성 모독한다고 생각하는 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막 2:8, 강조 추가).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그분의 영으로 감지하셨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영에 민감하다면,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의 사역에 대한 성령님의 인도 하심(The Spirit’s Leading in the Ministry of Paul)

적어도 20년간의 사역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받는지를 잘 배웠다. 어느 정도, 성령님은 그에게 미래의 사역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보여주셨다. 예를 들어, 바울은 에베소에서 그의 사역을 마무리한 후, 그는 앞으로 3년간 그의 삶과 사역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바울은 그의 생각이 아닌 영으로 의도한 방향대로 가기로 작정했음을 주목하라. 즉 성령님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모두 지금의 그리스에 위치해 있다)에 먼저 간후, 예루살렘에 갔다가 마지막에 로마에 가도록 그의 영을 인도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그 코스대로 움직였다. 만일 당신의 성경에 바울의 세 번째 선교 여정과 로마에 가는 그의 여정을 보여주는 지도가 있다면, 당신은 그가 에베소에서부터(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영으로 선교 경로를 작정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달한 후, 몇 년 후에 로마에 도달한 그의 경로를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에게 해안을 돌아, 다시 한번 마게도냐에 갔다가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그 여정 동안 그는 밀레도에 이르러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2-23, 강조 추가).

바울은 그가 “성령에 매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령님이 그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여정 중 머무는 각 도시마다에서 그가 결박과 환난을 받게 된다고 성령님이 증언하셨다고 말하였다. 성령님은 어떻게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이 있음을 증언하셨을까?

가지 (Two Examples)

사도행전 21장에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두 사건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바울이 지중해의 항구 도시 두로에 착륙할 때 일어났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이 한 구절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계속하여 간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다른 말씀들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당연히 그런 결론을 지을 수 없다. 이 점은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더욱 분명해지게 된다.

분명한 것은, 두로에 있던 제자들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예루살렘에는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음을 분별하였다. 그 후 그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다. 윌리엄의 신약 성경 번역본은 이 점을 확인해 준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제자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였다.”

그러나 두로에 있던 제자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자신의 여행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으로 받은 계시에 자신의 해석을 추가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바울은 환난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와 관계없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도처에 다니면서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이 계시하신 것에 우리 자신의 해석을 추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이사랴에 잠깐 들르다(Caesarea Stop Over)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다음 정착역은 항구 도시 가이사랴였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라 하거늘(행 21:10-11).

이것은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증언하신 성령님의 또 다른 예다. 하지만 아가보가 “그러므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라고 말하였다”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아니, 하나님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어가고 계셨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환난에 대한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그를 준비시키고 계셨다. 또한, 아가보의 예언은 단순히 바울이 몇 개월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예언에 의해 인도받아서는 안 된다. 만일 예언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확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예언을 따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가보의 예언을 “특수한 인도 하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의 영이 받은 내적인 감동을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보거나 진짜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특수한 인도 하심”을 주시는 것은 보통 그분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쉽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수한 인도 하심이 가져다주는 별도의 확신이 필요하게 된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는 군중에 의해 거의 살해될 뻔 했고 몇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 줄을 알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당신이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지 못했어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그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적인 인도 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박당하다(In Chains and in God’s Will)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잡히고 투옥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비전을 보고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았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예수님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지금 여가서 무엇을 하는거야? 내가 너보고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고 경고했었잖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실제로 바울이 몇 개월 전에 자신의 영으로 감지했던 그분의 인도 하심을 확인해 주셨다. 바울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증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목적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결국 로마에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최초의 부르심이 유대인과 이방인 앞에서 증언하는 것뿐 아니라 왕 앞에서도 증언하는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행 9:15을 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투옥되고 나중에 가이사랴에 있을 때, 벨리스 총독, 보르기오 베스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도록 “거의 설복당한”(행 26:28)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로마의 황제 네로에게 증언하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네로를 만나러 가는 길에(On the Way to See Nero)

바울이 이달리야에 가는 배에 있는 동안,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영에 민감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았다.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크레데 섬의 어느 항구에서 겨울을 지낼지를 결정할 때, 바울은 한 계시를 받았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행 27:9-10, 강조 추가).

바울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예감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선장은 바울을 말을 듣지 않고 다른 항구에 접근하려 하였다. 그 결과로, 배는 두 주 동안 격렬한 폭풍에 휩싸였다. 상황은 악렬하여 졌고, 사공들은 두 번째 날에 모든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고, 세 번째 날에는 심지어 배의 기구들을 바다에 내버렸다. 얼마 후, 바울은 진일보된 인도 하심을 받았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0-26).

나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당면한 곤경에 비추어 특수한 인도 하심을 주신 이유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련을 넘어, 바울은 곧 배가 깨지는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곧이어 그는 독사에게 물리게 된다(행 27:41-28:5을 보라). 천사가 당신에게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은 멋진 일이다!

가지 실용적인 조언(Some Practical Advice)

당신의 영안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심 살펴보라. 당신은 아마 처음에는 그분의 인도 하심이 아닌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상이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견지하라.

또한, 조용한 장소에서 방언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기도하게 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영에 더 민감해지게 된다. 또한,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에 더 민감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실 때에는 그분의 인도 하심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중요한 결정을 위하여 한동안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 하심임을 확신해야함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특정 방향에 대해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평안이 생길 때까지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말아야 한다.

당신이 특수한 인도 하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비전을 보거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비록 그분의 주권에 따라 그런 일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내적인 증거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항상 믿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에게 당신을 위해 준비하신 미래의 사역을 보여주실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이 몇 년 후가 될 수 있는 것을 몇 주 후라고 여길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런 가정도 하지 말라. 바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조금밖에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제 21 장 (Chapter Twenty-One)

그리스도인의 가정(The Christian Family)

물론, 하나님께서 가정의 개념을 만드셨다. 이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가정의 기능에 대한 통찰력을 주실 수 있으며 가정을 파괴하는 함정에 대해서도 경고하실 수 있다. 실제로, 주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정의 구조와 각 구성원의 역할에 대하여 많은 원칙을 주셨다. 이러한 성경의 지침들을 준수할 때,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획하신 모든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위반한다면, 혼란과 상심의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The Role of Husband and Wif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특정 구조에 적합하도록 설계하셨다. 이 구조가 가정생활에 안정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설계를 애써 왜곡하려 한다.

첫째, 하나님은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되도록 정하셨다. 이것은 남편에게 이기적으로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남편이 머리로써 가족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공급하고, 이끌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아내들은 자기 남편의 지도력에 복종하도록 정하셨다. 성경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남편은 아내의 영적인 머리가 아니다 – 예수님만이 그 역할을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교회의 영적인 머리이며, 그리스도인 아내는 그녀의 그리스도인 남편처럼 교회의 한 구성원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그리스도인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의 머리이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느 정도 복종해야 할까? 아내는 바울이 말한 대로,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규칙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남편이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거나 그녀의 양심을 위배하는 무언가를 하기를 기대할 때이다. 물론, 어느 그리스도인 남편도 자신의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 혹은 그녀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주님이 아니다 – 오직 예수님만이 그녀의 주님이시다. 만일 그녀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할지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녀는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

남편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항상 “남편들의 편”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가 그에게 말한 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창 21:10-12을 보라). 성경은 또한 아비가일이 그녀의 어리석은 남편 나발을 거역하고 재앙을 피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삼상 25:2-38을 보라).

남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God’s Word to Husbands)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25, 28-30, 33).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작은 책임이 아니다! 어떤 아내라도 자기를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는 남편한테 기꺼이 복종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도 자신과 “한 육체”가 된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엡 5:31). 자기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남편이라면 마땅히 아내에게 공급해주고, 아내를 보살펴주고, 존중해주고,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만일 남편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벧전 3:7, 강조 추가).

물론, 갈등과 불화가 완전히 없는 결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헌신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남편과 아내는 화목하게 사는 것을 배워가고 그리스도인 결혼의 축복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모든 결혼에서 발생하는 피면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통하여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창세기 2:15-25; 잠언 19:13; 21:9, 19; 27:15-16; 31:10-31; 고린도전서 11:3; 13:1-8; 골로새서 3:18-19; 디모데전서 3:4-5; 디도서 2:3-5; 베드로전서 3:1-7을 보라.

혼인에서의 성(Sex in Marriage)

하나님은 성을 만드신 분이며, 분명한 것은 그분은 출산뿐 아니라 즐거움을 위하여 성을 만드셨다. 그러나 성경은, 성관계는 평생의 결혼 서약을 한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다고 명백하게 말씀한다.

결혼관계 밖에서 발생하는 성관계는 음행이나 간음으로 분류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6:9-11을 보라). 비록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받아 음행이나 간음 행위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는 영적으로 큰 책망을 느끼게 되어 결국 회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성적 책임에 관해 몇 가지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협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2-5).

이 구절들은 남편이나 아내가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성관계를 하나의 “보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또한,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그것이 결혼의 범위 내에 있는 한, 부정하거나 죄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결혼한 그리스도인 부부들이 성관계를 가질 것을 격려했다. 또한, 우리는 잠언에서 그리스도인 남편에 대한 아래와 같은 조언을 찾을 수 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8-19).[1]

그리스도인 부부가 서로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즐기려면, 남성과 여성이 성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여자의 성적 본능이 그녀의 감정에 연결되어 있는 반면, 남자의 성적 본능은 더 물리적인 것이다. 여자는 관계와 신체 접촉으로 성적인 흥분을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고전 7:1을 보라), 남자는 시각적인 자극에 의해 성적으로 흥분된다(마 5:28을 보라). 남자는 시각적인 매력을 주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반면, 여자는 단지 육체적인 매력보다는 존경하는 남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항상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현명한 남편은 아내가 하루의 끝에 갑자기 “변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항상 포옹해주고, 친절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하는 것을 통하여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준다.

남성의 성욕이 정액의 증가에 따라 커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의 성욕은 월경주기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남성은 성적 흥분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몇 초 또는 몇 분 내에 성적 절정에 이르지만, 여성은 훨씬 오래 걸린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몇 초 내에 성교를 위해 육체적으로 준비되지만, 여자의 몸은 반 시간이 흘러도 준비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현명한 남편은 아내가 성교를 위한 준비가 되기까지 그녀의 몸의 특정 부위를 애무하고, 키스하면서 전희에 시간을 들인다. 만일 그가 특정 부위가 어디인지 모른다면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단 한 번 밖에 성적 절정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의 아내는 여러 번 도달할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얻게 해줘야 한다.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정직하게 자신의 욕구에 대하여 논의하고, 이성에 대해 될수록 많이 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몇 달에서 몇 년간의 대화를 통하여 남편과 아내 사이의 성적 관계를 알아가고 실천해가는 것은 가정에 큰 축복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Children of a Christian Family)

자녀들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완전히 순종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만일 그들이 순종한다면, 그들에게는 장수와 다른 축복들이 약속되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은, 가족의 머리로서, 자녀의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부여받았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아버지의 책임이 두 가지임을 주목하라. 주님의 교훈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먼저 훈계의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자녀 훈계(Child Discipline)

훈계를 받은 적이 없는 아이는 성장하면 이기적이고 권위에 대해 반역적일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가 미리 세운 합리적인 규칙을 반항적으로 어길 때에는 훈계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수 또는 유치한 행위에 대해서 처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실수 또는 무책임으로 인한 결과를 대면하도록 요구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성인으로서 삶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의 말씀대로, 어린아이들은 체벌하는 방식으로 훈계해야 한다. 물론, 갓난아기는 때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기들은 그냥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출생의 첫날부터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관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무엇을 하고 있는 것 또는 하려는 것으로부터 제한받음으로써 단어 “아니오”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 그들이 일단 “아니오”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엉덩이를 살짝 때림으로써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다. 이런 훈계가 일관성 있게 이뤄지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부모들은 또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매번 울 때마다 즉각적으로 주는 것과 같이 아이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동조하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울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만일 부모가 아이들이 화내거나 울 때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이런 부모들은 실제로 그와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 된다. 현명한 부모는 단지 자녀의 바람직한 행동만 보상해 준다.

체벌은 육체적으로 유해하지 않아야 하지만, 확실히 불순종하는 아이가 짧은 시간 동안의 울음을 일으킬 정도로 고통을 생성해야 한다. 체벌을 통하여, 아이는 불순종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성경도 이 점을 긍정하고 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13:24; 22:15; 23:13-14; 29:15).

부모가 규칙을 적용함에 있어서 아이들을 순종시키려고 그들을 위협할 필요는 없다. 만일 아이가 반항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그 아이는 매를 맞아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불순종하는 아이를 때리겠다는 위협만 한다면, 그는 단지 그의 아이의 지속적인 불순종만 부추기게 될 뿐이다. 그 결과로, 그 아이는 그 부모의 언성이 어느 정도 높아지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배우게 된다.

매로 훈계한 후에는, 아이를 포옹해 주고 부모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자녀 교육(Train Up a Child)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강조 추가)라는 잠언 22장 6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반드시 자녀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육은 불순종에 대한 처벌뿐 아니라, 좋은 행동에 대한 보상도 포함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좋은 행동과 좋은 특성을 강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칭찬해줘야 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께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칭찬과 포옹과 키스를 해주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통하여 그들의 사랑을 전해 줄 수 있다.

“교육”한다는 것은 “순종하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니거나 매일 기도를 할지 여부에 대해서 선택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한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만큼 충분히 책임적이지 않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모를 주셨다. 우리가 잠언 22장 6절에서 읽다시피 자녀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노력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부모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아이들이 늙어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들에게 부여되는 책임도 증가해야 한다. 효과적인 양육의 목표는 아이가 점차 성인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지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기 절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를 점점 더 많이 부여받아야 한다. 또한, 십대들은 자기가 내린 결정에 따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며 부모가 자기를 항상 문제 속에서 건져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모의 가르침의 책임(Parents’ Responsibility to Instruct)

에베소서 6장 4절을 읽으면, 아버지들은 자녀를 훈계할 책임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가르칠 책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성경적인 도덕관, 그리스도인의 성품, 또는 신학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 아니라 아버지의 책임이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책임을 주일학교 교사에게 모두 이관하는 부모는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강조 추가).

그리스도인 부모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줘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의 탄생,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야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아이들은 다섯 살이나 여섯 살부터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주님을 섬기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조금 지나면(여섯 살이나 일곱 살, 때로는 더 어릴 적부터),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증거로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아이마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규칙은 없다. 요점은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들의 영적 양육을 그들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 사랑을 위한 10가지 규칙(Ten Rules for Loving Your Children)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 어린이가 어른처럼 행동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줄을 알고,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그만둘 것이다.

2). 자신의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라. 당신이 그들이 가진 독특한 자질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흔상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라.

3). 자녀들에게 집안일에 관한 책임을 부여하여 그들이 가족의 중요한 성원임을 알게 하라.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 곧 성취이다.

4).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있어서 그들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 자신을 주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아이들은 그들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5). 만일 당신이 뭔가 부정적인 말을 꼭 해야 한다면, 긍정적인 방식으로 말하라. 나는 아이들이 나를 거역했을 때 종래로 그들이 “나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대신, 나는 “너는 좋은 아이야, 그리고 좋은 아이는 네가 금방 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아”라고 내 아들에게 말할 것이다(그다음에 나는 그를 찰싹 때려줄 것이다).

6). “안돼”라는 말이 “내가 너를 관심한다”라는 말임을 인식시킨다. 아이들은 모든 일을 항상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그들을 제한할 만큼 그들을 충분히 관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7).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모방하도록 요구하라. 아이들은 부모의 본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현명한 부모는 종래로 자신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대로 하고 행동대로 하지 말라”

8). 아이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 말라. 오직 걸림돌만 제거해 주고 디딤돌은 그들의 길에 남겨두라.

9).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라. 나는 영적으로 미지근한 부모들의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원받지 못한 부모와 완전히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그리스도인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둥지”를 떠난 후에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섬긴다.

10). 당신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에 우선순위를 두지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육, 성경의 가르침을 주는 데에는 실패한다.

사역, 결혼 및 가족의 우선순위(The Priorities of Ministry, Marriage and Family)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범하는 가장 일반적인 오류는 아마도 사역에 대한 헌신 때문에 결혼과 가족을 소홀히 하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희생은 “주님의 일”을 위한 희생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런 오류는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진정한 순종과 헌신의 정도는 그의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반영됨을 깨달을 때 교정된다. 만일 사역자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거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훈계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과 필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시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헌신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사역”을 위해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를 무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는 육적인 사역의 확실한 표시이다. 무거운 작업 부담을 안고 있는 많은 제도적 교회의 목사들은 이 점을 예증한다. 그들은 진행 중인 모든 교회 프로그램을 유지하다가 탈진해버린다.

예수님은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고 약속하셨다(마 11:30을 보라). 그분은 사역자가 자기 가족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 또는 교회에게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라고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사실, 장로에 대한 요구 사항을 보면 그는 반드시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딤전 3:4) 사람이어야 한다. 가족과의 관계는 그가 사역에 적합한지를 잘 보여줄 수 있다.

다른 곳에 다니면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집에 있을 때 가족한테 초점을 맞추고 여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동료들은 이런 안배가 가능하도록 자신의 노력을 다해 도와야 한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주요 제자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그가 그 일에 실패하면, 그는 자기의 집 밖에서 제자를 삼을 자격이 없다.

 


[1]하나님은 내숭을 떠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에 관한 더 많은 증거를 원하면 아 7:1-9 과 레18:1-23을 보라.

제 19 장 (Chapter Nineteen)

그리스도안의 진실(In-Christ Realities)

신약 성경의 서신서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와 같은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문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신자인 우리가 받게 되는 혜택을 자주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온전히 성숙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을 것이다.

우선,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거듭나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게 되며 그분과 한 몸이 된다. 이 점을 확인해주는 신약 성경의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롬 12:5, 강조 추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강조 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합하였고, 그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며, 그분의 영과 하나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한다.

아래의 성경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갖게 되는 혜택들을 알려주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강조 추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었으며(“정죄 받지 않았음”을 선포하고 지금은 옳은 일을 한다), 성별 되고(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사용 받는다), 구속 받았다(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의로워지고 성별 되고 구속받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 그 모든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과거에 지은 죄로부터 용서받았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강조 추가).

이 성경 말씀은 또한 우리가 더 이상 사탄의 나라, 흑암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강조 추가).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당신은 모충이 나비로 변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당신의 영은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았다. 이전에 당신은 사탄의 이기적인 본성을 소유했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모든 삶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 안의 더 많은 축복(More Blessings in Christ)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강조 추가).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가 기도로 그분한테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을 단지 우리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로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할 하심이니라(엡 2:10, 강조 추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성취해야 할 사역들을 예비하셨다. “선한 일을 위하여…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 각자마다 영적인 운명이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강조 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님에 의해 우리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한 행동은 사실은 우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강조 추가).

바울이 쓴 “이 모든 일”은 무엇일까? 로마서에 기록된 이 구절의 앞 구절은 그것이 신자가 겪게 되는 시련과 고난임을 보여준다. 비록 세상은 우리를 패배자로 보겠지만, 우리는 순교할지라도 승리자이다. 우리는 죽을 때, 천국에 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정복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강조 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면,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강조는 추가).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그분은 그분의 양을 보살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Agreeing With What God Says)

우리 중 일부는 불행하게도,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 말씀에 어긋나는 말들을 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서 “악평”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민 13:32을 보라). 그러나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충만할 것이며 성경에 동의하는 말만 믿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일부 성경적인 선언들(Some Biblical Declarations)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구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말해야 한다.

아래의 구절들은 모든 신자가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는 몇 가지 성경적인 진술들이다.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의” 실체인 것은 아니지만,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룩하여 지고 의롭게 되었다(고전 1:30을 보라).

나는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골 1:13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엡 1:7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 나의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후 5:17을 보라).

하나님은 선한 일을 예비하셔 내가 그 가운데 행하게 하셨다(엡 2:10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 5:21을 보라).

나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긴다(롬 8:37을 보라).

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을 보라).

나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빌 4:19을 보라).

나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전 1:2을 보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요일 3:1-2을 보라).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을 보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

나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행 26:18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롬 5:5을 보라).

내 안에 계신 이는 세상에 있는 자(사탄)보다 크시다(요일 4:4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엡 1:3을 보라).

나는 사탄의 영적 권세를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힘을 받았다(엡 2:4-6을 보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롬 8:28을 보라).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롬 8:31을 보라).

아무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5-39을 보라).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막 9:23을 보라).

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다(계 1:6을 보라).

나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롬 8:14을 보라).

내가 주님을 따를수록, 나의 길은 더욱 빛날 것이다(잠 4:18을 보라).

하나님은 나에게 특별한 주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하셨다(벧전 4:10-11을 보라).

나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다 (막 16:17-18을 보라).

하나님은 항상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고후 2:14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고후 5:20을 보라).

나는 영생을 얻었다(요 3:16을 보라).

내가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다 받는다(마 21:22을 보라).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치유받았다(벧전 2:24을 보라).

나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마 5:13-14을 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이다(롬 8:17을 보라).

나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벧전 2:9을 보라).

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한 부분이다(고전 12:27을 보라).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시 23:1을 보라).

주님은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을 보라).

하나님은 나를 장수하게 함으로 나에게 만족을 주실 것이다(시 91:16을 보라).

그리스도는 나의 질고를 지시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다(사 53:4-5을 보라).

주님이 나를 도우시므로, 나는 무서워하지 않는다(히 13:6을 보라).

주님이 나를 돌보심으로, 나는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긴다(벧전 5:7을 보라).

내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나를 피한다(약 4:7을 보라).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도로 찾게 된다(마 16:25을 보라).

나는 주님의 종이다(고전 7:22).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을 보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을 보라).

하나님은 내 안에서 시작하신 착한 일을 이루실 것이다(빌 1:6을 보라).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내 안에서 행하신다(빌 2:13을 보라).

나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갈 3:13을 보라).

이것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선언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들이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릴 때까지 이 선언들을 말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을 감찰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 20 장 (Chapter Twenty)

찬양과 예배(Praise and Worship)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19-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분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의 자격조건을 설명하셨다. 이것은 예배자는 맞지만 참되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 사항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의 특징을 선언하셨다. 그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따라서 거짓 예배자를 “육과 거짓”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거짓 예배자는 육적으로 예배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예배는 단지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놀랍게도, 예수님과 대화했던 여자는 다섯 번 결혼했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장소인지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상을 살면서 그분께 예배 드리려는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참된 예배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헛된 경배를 책망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7-9, 강조 추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사람이 어디에서 예배할지를 크게 중시했지만, 예수님은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각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그가 드리는 예배의 품질을 결정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죽은 예배자들에 의해 연기되는 죽은 예식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를 때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그들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에 그들의 예배는 헛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아침에 “당신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무심하게 읇조리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을 더 듣고 싶으실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다(Worshipping in Spirit)

일부 사람들은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 해석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영으로 예배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음을 나타낸다. 물론, 아무도 오순절 날까지는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그가 방언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은 확실히 신자가 예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방언기도도 무정한 의식이 될 수 있다.

사도행전 13:1은 초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강조 추가).

이 구절에서 그들이 “주를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우리가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을 예배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예배는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대상이 오직 주님일 때에만 성립된다.

예배 드리는 방법(Ways to Worship)

이스라엘의 찬송가라고도 할 수 시편은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도록 권면한다. 예를 들어, 시편 32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하, 강조 추가).

조용하고 공손하게 예배를 드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즐겁게 외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시 33:1-3, 강조 추가).

물론, 우리는 예배 때 주님을 찬송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는 즐거워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는 또 다른 외적인 표시이다. 우리는 또한 다양한 악기로 즐거운 노래를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많은 교회 모임에서, 전기 악기들이 종종 너무 높게 연주되어 노랫 소리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있음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그런 악기 소리는 낮추거나 꺼버려야 한다. 시편 기자들은 종래로 그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4, 강조 추가).

항복과 존경의 표시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손을 들 수 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시 66:1-4, 강조 추가).

우리는 주님께 그분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이신지를 말해야 하며 그분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해야 한다.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우리는 “주님,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라는 반복적인 고백보다 훨씬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강조 추가).

심지어 우리의 자세까지도 예배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서 있든지,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허리를 굽히든지 다 가능하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시 149:5, 강조 추가).

그러나 우리는 서 있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침상에 누워서도 예배 드릴 수 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강조 추가).

감사 드리는 것은 마땅히 우리의 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시 149:3, 강조 추가).

우리는 심지어 춤을 추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육적이고, 관능적이거나 순전히 오락적인 춤은 추지 말아야 한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3-6).

음악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악기를 연주한다면 그들의 은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임 받을 수 있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시 98:1 상, 강조 추가).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의식적이만 않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만일 그런 경우 라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새 노래가 필요하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도록 도와주심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바울은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해야 한다고 썼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서로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헬라어 원어에 대한 공부가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시”는 아마도 악기의 연주에 따라 성경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찬송”은 교회의 여러 신자에 의해 만들어진 일반적인 감사의 노래들일 것이다. “신령한 노래”는 성령님에 의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며, 불러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다.

찬양과 예배는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 하루를 통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다.

찬양 – 믿음의 행동(Praise–Faith in Action)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정상적인 표현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즐거운 사람이 될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소리쳐야만 했었다. 그러자 벽이 무너졌다. 성경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빌 4:4),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상)라고 훈계한다.

역대하 20장에는 찬양의 능력에 관한 가장 뛰어난 사례 중 하나가 기록되었으며, 때는 유다가 모압과 암몬 군대의 침략을 받을 때였다.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래와 같이 지시하셨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대하 20:15 하-17).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대하 20:20-25, 강조 추가).

믿음으로 가득한 찬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한다!

찬양의 능력에 관한 주제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빌립보서 4:6-7(찬양은 평화를 가져온다), 역대하 5:1-14(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사도행전 13:1-12(찬양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보게 한다), 사도행전 16:22-26(찬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탈옥을 경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