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장 (Chapter Thirty-Three)

전도의 비밀(Secrets of Evangelism)

아브라함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의지를 보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래와 같은 약속을 하셨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8).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 복수 씨들이 아닌 단수 씨에게 주신 것이며 그 씨는 곧 그리스도라고 지적하였다(갈 3:16을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천하 만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전 세계 수천 개의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그 민족들은 서로 다른 지리적 지역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인종이며 다른 문화에서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기를 원하시며 그 때문에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요일 2:2을 보라).

비록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지만(마 7:14을 보라), 사도 요한은 미래 하나님의 나라에는 세상 모든 민족의 대표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게 하는 좋은 이유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강조 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젠가는 여러 민족의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일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많은 현대의 선교 전략가들은 전 세계의 나머지 수천 개의 “숨겨진”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 각 민족에게 생명력이 있는 교회를 세우는 것에 큰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칭찬할만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계획하였다 할지라도, 특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종종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분의 지혜를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분은 우리에게 전 세계의 제자를 삼는 방법에 관해 마태복음 28:19의 말씀보다 더 많은 정보와 가르침을 주셨다.

아마도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간과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분은 누구보다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관심이 있으시며 누구보다 그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그 일을 위해 죽으시고 심지어 우리를 만드시기 전부터 그 일을 생각하셨으며 지금도 여전하시다. 이것이야말로 헌신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이기라(“Wining the World For Christ”)

흥미롭게도, 우리가 신약 서신을 읽어보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얻으라!”는 신자들을 위한 열정적인 간구함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며,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분과 함께 동역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주님께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하심으로 회심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성령님과 동역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확장되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함”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소개하면서, 그의 첫 번째 기사(그의 이름을 딴 복음서)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 1:1, 강조 추가) 기록하였다고 썼다. 누가는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계속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적었음을 분명히 믿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기름부으심과 그분과 동역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종들을 통하여 일하셨다.

만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나가서 이웃에게 증거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이 세상을 이기게끔 도왔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에 대한 그들의 책임은 무엇이었을까? 특별히 복음을 대중에게 선포하도록(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욕하거나 질문을 제기하는 하는 자들의 공격을 막아내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4-16).

베드로가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썼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세상은 (당연히) 그들을 박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적게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아무도 그들을 핍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날에 “이웃들과 함께 자신의 믿음을 나누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들이 이웃에게 믿음을 증거했을 때, 이웃들은 그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매우 놀라고 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선행이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좋은 소식”에 불과하며 그냥 “예수님을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그들의 주님은 진정 예수님이었다) 어둠 속에서 서 있는 빛과 같았기에 그들은 전도에 관한 수업을 듣거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것을 이웃에게 말하려고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의로움을 행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베드로가 말한 대로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고 방어할 준비를 하면 된다.

아마도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 – 우리가 “교리”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은 그의 행함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흥미롭게도, 처음 14세기까지 개인 성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인 책임인 “매일 자신의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당연히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그들의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을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다른 29,999개의 교단의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여) 험담하고 거짓말하고 땅에 보물을 쌓는 교리들을 바로잡은 것에 대해 자부감을 느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그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교리보다는 우리의 행동에 의해 그렇게 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위대한 복음 전도자시다(God, the Greatest Evangelist)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면서 하신 일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더 잘 이해할수록, 그분과 더 잘 동역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마음으로 믿는다(롬 10:9-10을 보라). 그들은 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회개한다. 그들은 자기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높인다. 믿음은 마음의 변화를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도 마음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에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식적인 결정으로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서 버린다. 불신은 마음을 변화하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결정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너무 굳어져 있어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분께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지적하셨다(요 6:44을 보라).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시며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할 것인지 아니면 부드럽게 할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결정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실까?

첫째로, 그분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8-20, 강조 추가).

바울은 사람들이 “그들 속에 분명히 보여진 진리를 막는다”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즉, 그 진리가 그들 속에서 떠올라 그들을 대면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밀쳐 내고 내적인 확신을 거부하였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분명히 보여진 진리는 정확히 무엇일까?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진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면 그분의 존재하심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게 되며[1] 그분의 크신 능력, 놀라운 창조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총명과 지혜를 알게 된다.

바울의 결론은 이런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은 맞았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 외치시며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려고 노력하시지만, 대부분 사람은 귀를 막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기적을 – 꽃, 새, 아기, 눈송이, 바나나, 사과,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른 것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삶의 전반에 걸쳐 외치시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은 그분이 만드신 만물이 보여주는 만큼 위대하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사람 내면의 계시가 외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회개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바울은 실제로 시편 19편의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하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상, 강조 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밤낮 말씀하심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의 메시지에 올바르게 반응한다면, 땅에 엎드리어 아래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위대하신 창조주시여, 당신이 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뜻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또 다른 방법(Another Means by Which God Speaks)

이 외적인 계시와 내적인 계시에 관련된 또 다른 내적인 계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은 창조물의 기적을 보는 것을 통한 것이 아니다. 이 내적인 계시는 각 사람의 양심이다. 양심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드러내는 음성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4-16).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더 강경히 말하면, 모든 사람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노하시게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은 심판의 날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데 더 익숙해지며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들에게 그분의 법을 말씀하시는 것을 멈추시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A Third Means)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가장 위대하신 복음 전도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도록 그들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바울의 말씀을 읽어보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강조 추가).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타난다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진노는 많은 슬프고 비극적인 사건과 크고 작은 재앙 속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났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모든 일을 행하실 수 있고 모든 일을 막으실 수 있다면, 그분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분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단지 무감각한 신학자와 어리석은 철학자들만이 이것을 볼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의 진노 속에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진노의 대상은 종종 그들이 받아야 할 진노보다 훨씬 적은 진노를 받고 있으며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진노에 대해 경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해야 할 사람들의 주의를 끄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다.

네 번째 방법(A Fourth Means)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창조, 양심과 재앙을 통해 사람을 이끄실 뿐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각 사람을 부르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일꾼들은 그분께 순종하고 복음을 전할 때 창조, 양심, 재앙에 관한 메시지를 재확인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복음화를 위해 우리가 한 일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몇 년을 걸쳐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에 반하여, 그분은 지속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매일 삶의 모든 순간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신다. 그리고 그 복음 전도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한 번만 설교한다. 사실, 이런 전도자들이 예수님의 계명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집이나 마을이나 도시에서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날 수 있도록 허용받은 기회도 한 번밖에 없다(마 10:14을 보라).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매우 제한적인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전 인류를 향한 끊임없고 극적이고 내면적인 복음 전도와는 비교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복음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서의 우리의 책임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회개하고 믿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설명한 것과 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누구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누구의 마음이 굳어지고 있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누가 그분의 영원한 메시지를 듣고 누가 무시하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누가 삶 속에서 재앙을 겪은 후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누구의 마음이 너무 강퍅하여 회개할 희망이 없는지를 아신다. (예를 들어, 그분은 예례미야에게 세 번이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 상태가 회개하기에는 이르렀기 때문이다; 렘 7:16; 11:14; 14:11을 보라.)[2] 그분은 누구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단지 성령님께서 조금만 확신을 주시면 회개할 수 있는지를 아신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의 책임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원칙 1 (Principle #1)

첫째, 전체 복음화 작업의 95%를 감당하고 계시고 끊임없이 매일 사람들을 향해 외치시는,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꾼들을 마음이 굳어진 사람보다 마음이 가장 열려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미 모든 사람에게 그들 삶의 매 순간마다 복음을 전파하신 위대한 전도자 하나님께서 수 년 동안 그분의 말씀을 무시해왔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귀찮게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왜 그분은 그분께서 이미 말씀하신 95%의 내용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나머지 5%를 들려주시기 위해 노력하시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핑계할 수 없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성경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을 통하여 그들에게 끊임없이 그분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롬 1:20).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 때문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복음에 더 수용적인 사람들에게 그분의 일꾼들을 보내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일꾼으로서 추수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인도될 수 있게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분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성경의 (A Scriptural Example)

이 원칙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복음 전도자 빌립의 사역에서 잘 드러났다. 빌립은 사마리아의 복음에 수용적인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였지만, 나중에 한 천사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그는 복음에 매우 수용적인 구도자를 만나게 된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보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행 8:26-39).

빌립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온, 그리고 적어도 일부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 사본을 돈을 주고 구매한,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 사역하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그 사람은 이사야서 53장을 읽으면서(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쓴 부분이다), 이사야가 쓴 사람이 누구인지가 궁금했었는데 바로 그 때, 빌립이 나타나서 그에게 그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회심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기에 빌립을 보내셨다.

나은 방법(A Better Way)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않으면 그들이 복음화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무작위로 또는 체계적으로 그들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끊임없는 전도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한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수용 여부를 확인하려면 먼저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물어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모종의 방법으로 죄책감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원칙의 또 다른 예는 고넬료의 한 가족이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회심한 사건이다. 베드로는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을 받아 복음에 매우 수용적인 이 이방인 가족에게 설교하였다. 고넬로는 그의 구제와 기도생활이 보여주다시피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행 10:2). 하나님은 그를 베드로와 연결해주셨고 그는 열린 마음으로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영광스럽게 구원받았다.

우리가 성령님께서 우리를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에게로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분할한 후 복음을 증거하는 팀을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하게 하는 광범위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 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 만일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선교 전략회의에 참석했다거나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계속하여 복음을 전했다면, 고넬료의 가족과 에디오피아의 낸시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복음 전도자와 사도들은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섞인 무리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성령님과 동역하여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전도 방법은 현대 교회에 비하면 많이 다르며 그 결과도 많이 다르다! 왜 그토록 성공적인 모식을 본받지 않는가?

원칙 2(Principle #2)

우리가 이 장의 첫 부분에서 고려했던 성경의 원칙들은 복음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서의 우리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물, 양심, 재앙을 설계하신 것은 모두 사람을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그것과 모순된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너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죄인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던 것과 직접 모순된다! 그들은 거룩함과 순종이 궁극적인 영생을 얻는 데 중요하지 않다는 비성경적인 은혜를 주장하고 있다. 구원을 위한 회개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고 구원이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바울은 종래로 이렇게 이해되기를 뜻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들을 더욱 큰 미혹에 빠지게 하여 영원한 파멸로 이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눅 24:47)를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그의 전체 생애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재확인시켜준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게 되며 마음이 굳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그러나 현대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는데(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내시지 않는다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그들은 종종 그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우리의 영접이 필요없다. “당신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가?”라고 물어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받아들이셨는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답은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한, 당신은 그분께 혐오스러운 존재이며, 오직 그분의 자비만이 지옥으로 향하는 당신의 운명을 늦춰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 내려가게 하는 현대의 복음에 비추어 보면, 나는 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은 지도자들의 통치를 받는(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단 4:17, 25, 32, 15:21; 요 19:11; 행 12:23; 롬 13:1을 보라),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서방의 선교사들에게 완전히 폐쇄적인지 궁금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을 거짓 복음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함은 아닐까?

원칙 3(Principle #3)

이 장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던 원칙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짓 종교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들은 진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므로 동정해야 할 무지한 사람들인가? 이 모든 책임은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교회에 있을까?

아니, 그런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물, 양심, 재앙을 통하여 드러내신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회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거나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굳어지게 하였다.

바울은 불신자들의 무지함에 대해 쓰면서 그 이유에 대해 밝혔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이방인들이 무지한 이유가 “그들의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임”을 주목하라. 바울은 또한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고 선었하였는데 그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였음이 분명하다. 손의 굳은살은 부드러운 피부가 거친 것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형성된다. 굳은살은 덜 민감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창조물, 양심과 재앙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하면 그들의 마음은 점차 덜 민감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일반적으로 복음에 덜 수용적이라는 통계가 나온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회개할 가능성이 작다. 지혜로운 전도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을 목표로 삼는다.

불신자들의 죄(The Guilt of the Unbelieving)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에게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죄를 물으신다는 추가적인 증거는 그분께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죄를 물으시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시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시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물으심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물으신다면, 그들은 무엇이 그분을 기쁘시게 못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심으로써” 더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1-32, 강조 추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와 책임을 강조하였음을 주목하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분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들어보았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셨으며,”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갈수록, 가장 기괴하고 순리를 거스르는 변태적인 일을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실제로 “네가 나를 섬기는 대신 죄를 섬기려고 하느냐? 그럼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내가 말리지 않을 테니. 하지만 너는 네가 사랑하는 우상에게 점점 더 매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심판을 하나님의 자비의 표시로 여길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정상적으로, 사람은 더 완악해지고 죄악스러워질수록 자신의 죄을 깨닫고 정신을 차릴 것이다. 왜 많은 동성애자들이 자신에게 “왜 나는 실제로 완전한 성관계를 가질 수 없는 동성한테 성적 매력을 느낄까? 이것은 이상한 짓이다!”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는지 궁금할 것이다. 모종 의미에서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주장할 수 있다(그들은 종종 자신을 위해 이렇게 변명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은 그들이 정신을 차려 회개하고 그분의 놀라운 자비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바램 때문이다.

스스로 그 같은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은 동성애자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진 그분의 심판의 증거로 많은 죄를 나열하였다. 수십억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왜 나는 내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는가?”, “왜 나는 남의 험담을 하는 것에서 만족하는가?” “왜 나는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해 만족한 적이 없는가?” “왜 나는 점점 더 노골적인 포르노를 보는 것을 억제할 수 없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우상에게 매이도록 내버려 두셨다.

물론, 어느 시점에 있든지 누구나 다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완악한 죄인 중 일부는 그렇게 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셨다!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다.

핑계할 수 없다(No Excuses)

바울에 따르면 죄인은 핑계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이미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1-4).

바울은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또한, 바울이 계속하여 쓴 것과 같이,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롬 2:5-10).

분명히 바울은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회개하고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어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의미할까?

아니, 예수님을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예수님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 하고 싶은데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부르짖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에게 그분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예수님은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다”(마 7:7)라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찾기를 바라신다(행 17:26-27을 보라). 그분은 누군가의 마음이 그분의 끊임없는 복음화에 응답하는 것을 보시면, 그분께서 에디오피아 내시와 고넬료 가족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실 것이다. 다소의 사울의 회심에서 입증하시다시피, 하나님은 교회의 참여에만 의지하시지 않는다. 진심으로 구주를 찾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나님은 직접 전하실 것이다! 나는 폐쇄 국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회심했다는 수많은 현대의 사례들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종교적인 이유(Why People Are Religious)

사실은 거짓 종교를 믿는 대부분 사람들은 신실한 구도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덮기 위해 종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양심을 위반하기에 종교의 탈을 쓰고 뒤에 숨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심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이것은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그런 것처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싸구려 은혜의 복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한다)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그들은 종교활동을 할 때에도, 양심의 정죄를 받는다.

불교 신자가 경건하게 자신의 우상에게 또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승려에게 절할 때에도 그의 양심은 그가 잘못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힌두교 신자가 병에 걸린 길거리의 거지가 전생에 죄를 지었기에 고통받는 것이라고 정당화하며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그의 양심은 그를 정죄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알라의 이름으로 “이교도”의 머리를 벨 때, 그의 양심은 그에게 살인한 위선자로 외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보물을 쌓고, 정기적으로 색정적인 텔레비전을 보고, 교인들의 험담을 하면서 자기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면, 그의 양심은 그를 정죄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계속하여 죄를 짓기를 원하면서 그것을 합리화해주는 종교적인 거짓말을 찾아낸 사람들의 예이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적인 사람들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거짓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김을 받을만한 무지한 사람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함을 교회가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탓으로 돌리시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추수할 밭”을(요 4:35을 보라) 찾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부드러워졌기 때문에 복음에 수용적이다.

원칙 4(Principle #4)

우리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던 성경의 진리에서 알 수 있는 마지막 원칙은 이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에서 적극적으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일부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거나 다른 사람이 견디는 것을 보는 것을 통하여 자기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따라서, 재앙이 지나간 후에는 믿지 않던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한다. 예를 들어, 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 열려있을 수 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있을 때, 나는 항상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강조 추가)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장례식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붙잡았다.

사람들은 질병, 재물의 손실, 깨진 관계, 자연재해, 죄의 결과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을 때 응당 자기가 받는 고통이 정신 차리라는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일시적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들을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노력하신다.

요약(In Summary)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세우시는 일의 대부분을 행하신다. 우리의 책임은 그분과 지혜롭게 동역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거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삶으로써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야 하며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창조물, 양심, 재앙을 통하여, 그리고 어떤 때에는 복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회개하도록 역사하신다.

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들이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굳어진 마음이 곧 죄의 증거이다. 그들이 점점 더 타락하고 죄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의 거짓말을 믿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정당화할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고 계신다. 비록 그분은 우리를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인도하실 수도 있지만,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에게 인도하실 가능성이 더 크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지상명령을 이룸에 있어서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그분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그분의 메시지와 일치하기를 원하신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든 민족의 대표들이 모여 그분을 경배할 것인데, 우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과 동역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민족의 일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부 일꾼들이 특히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회 개척자를 파송하고 지원하거나 직접 가게끔 인도하실 수 있다. 파송 받은 사람들은 제자를 삼아 그들이 제자 삼는 사역자임을 증거해야 한다!

맺는말(Final Words)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을 당신의 언어로 출판하여 당신이 읽을 수 읽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이 책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책이 당신에게 축복이 되었다면, 저한테 편지로 그것을 알려주겠습니까? 제가 영어밖에 읽을 수 없기에 당신은 영어로 편지를 쓰거나 영어로 번역한 뒤 저한테 보내줘야 합니다!

저한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자 메일로 보내는 것입니다. 나의 전자 메일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email protected]. 당신이 전자 메일을 사용할 수 없다면, 내가 사역하는 곳으로 보내주면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을 받은 시기에 따라 주소가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2006년도 주소는 Shepherd Serve, P.O. Box 12854, Pittsburgh, PA 15241 USA입니다.

 


[1]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한다”고 선언했다(시 14:1, 강조 추가).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이같이 명백한 진실을 부인한다.

[2]이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의(바로와 같은)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하실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