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장 (Chapter Thirty-Two)

청지기 직분(Stewardship)

이전 장의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청지기 직분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일시적인 보물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뿐 아니라 그들 마음의 어두움에 대해 지적하셨다(마 6:19-24).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들의 진정한 신은 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섬기고 돈은 그들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라면, 그분은 또한 우리 돈의 주인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다른 무엇보다도, 돈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경쟁하고 있다.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눅 14:33을 보라).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하나님은 그분의 돈을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하기를 즐기신다.

예수님은 청지기 직분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종종 그분의 추종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된 듯 보인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을 왜곡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현대 “번영 교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어떤 것은 미묘하게, 어떤 것은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제자 삼는 사역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라고 가르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범과 말과 성경적인 청지기 직분을 통하여 가르칠 것이다.

아래에 우리는 성경은 청지기 직분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동시에 번영에 대한 일반적인 거짓 가르침을 폭로할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부분을 다 망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관하여 완전하게 쓴 책의 영어본을 우리의 웹 사이트(ShepherdServe.org)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성경적인 주제”란 표제 아래의 부표제 “예수님이 논하신 돈”에서 찾을 수 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The Supplier of Needs)

긍정적인 말씀으로 시작해보자. 우리는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바울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익숙한 약속을 종종 인용하거나 주장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가 문맥적으로 읽어보면 곧 바울이 하나님께서 빌립보 신자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4-19, 강조 추가).

바울이 예수님께서 빌립보 신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이 교회를 계속하여 개척할 수 있도록 그를 희생적으로 섬김으로써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할 것이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

그래서 우리는 빌립보서 4:19에서의 바울의 약속이 그것을 인용하고 주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What Do We Really Need?)

우리는 마태복음 6:32-33의 예수님의 약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그분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해주시겠다고 했던 이 “모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이다. 아무도 이점에 대해 반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살펴본 이 말씀 바로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6:25-31을 보라).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물질적 필요이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다니실 때에도 그것만 소유하셨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아래와 같이 쓴 것을 보아, 그도 우리의 필요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에 동의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 강조 추가).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만이 우리가 진정 물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리가 그것에만 만족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빌립보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약속한 것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게 한다! 어떤 설교자들이 그 구절을 해설하는 방식은 당신으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은 너의 모든 욕심을 채워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만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에만 만족해야 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실제로 소유한 것, 단지 먹을 것과 입을 것만을 훨씬 초월한 것에 대해서 더 많이 만족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만(Discontentment)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제 필요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낙원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는 데서 행복해지기를 의도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은 한 번도 수돗물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며 욕실에서 샤워하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분은 세탁기로 옷을 세탁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냉장고의 문을 열어보신 적도 없다. 그분은 자동차 또는 자전거를 운전하신 적도 없다. 그분은 한 번도 라디오를 들어보신 적이 없으며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신 적이 없으며 레인지로 요리를 하신 적이 없으며, 음향 설비를 통해 대중 설교를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비디오 또는 TV 쇼를 시청하신 적이 없으며, 전등,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사용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손목시계를 착용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을 소유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은 행복하실 수 있었을까?

미국에서(그리고 아마도 당신의 나라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새로운 물질로 인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를 보여주는 광고들의 공세를 당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세뇌당하여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모으는 것과는 관계없이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물의 유혹”(마 13:22)이라고 언급하신 것이다. 물질은 행복을 약속하지만 그렇게 된 적은 드물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물질을 얻으려는 세상의 열광적인 경주에 참가함에 따라, 우리는 실제로 우상 숭배자가 되며, 재물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과 그분의 지상명령인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이 점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여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1-14).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진정한 신자가 “재물의 유혹”이 자기를 미혹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영적 생활이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마 13:7, 22을 보라).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경고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라고 권면했다. 이것들은 단지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몇 가지 성경의 예에 불과하다.

돈이 주인이 되었을 때(When Money is Master)

아마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돈과의 관계일 것이다. 돈은 벌기 위해 사용한 시간과 방법, 그리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우리가 돈이 있든지, 없든지를 막론하고 우리를 가장 잘 시험할 수 있는 것은 돈이다. 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쉽게 저버리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돈은 우리의 유일하신 하나님 이상의 신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우리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돈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번,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돈이 자신을 지배하게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예수님은 이 부자를 매우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셨다. 비록 그는 건강과 비옥한 땅과 경작 기술을 가진 축복을 누렸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여분의 재산을 쌓지 않았을 것이며 쉬면서 이기적인 즐겁고 평안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란 것을 깨닫고 그가 받은 축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주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가 자신의 풍요로움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하셨고 그가 계속하여 일함으로써 그 풍요로움이 계속하여 나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어쩌면, 유일하게 받아들여지는 대안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면, 그가 농사를 접고 자비량 사역에 헌신하는 일일 것이다 .

예수님의 비유 속의 부자는 자신의 죽는 날짜에 대해 큰 오산 을 했다. 그는 죽기 몇 시간 전만 하여도 아직 남은 연수가 많다고 생각했다. 예수님 요점은 명백하다. 우리는 날마다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매일 하루를 살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가지 관점(Two Perspectives)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얼마나 많이 다른지 모른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그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인간의 눈에는 부하였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난했다. 그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었지만, 그가 죽을 때에 그에게 아무 이익도 가져다줄 수 없는 땅에 쌓아두기로 선택했다. 예수님께서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비추어 볼 때, 그분은 우리가 부자가 죽은 뒤에 천국에 갔다고 믿지 않기를 바라셨을 가능성이 높다.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은 우리가 신실한 청지기가 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비유는 물질적인 소유를 가진 사람뿐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22-34).

예수님의 말씀은 현대의 “번영 설교자들”과는 관점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소유한 것을 팔아 구제하라고 가르치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기를 바라신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다시 한 번, 그분은 자신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셨다. 그 보물의 주인의 마음은 땅에 있으며 그 곳에 쌓아둔 보물은 썩어 없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이 어리석은 부자의 교훈을 소유가 적음으로 인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근심하는 자들에게 적용하셨음을 주목하라. 이런 것에 대한 근심은 우리의 초점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본분대로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근심 없는 태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Christ’s Example)

예수님은 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모든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해야 하듯이 자신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가르치셨다. 그분은 자신이 행하신 것을 설교하셨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예수님은 자신의 상황을 이용하여 쉽게 큰 부자가 되실 수 있었지만, 땅에 재물을 쌓지 않으셨다. 많은 은사를 가진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이 돈을 벌 수 있으면, 하나님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부해지기를 원하심이 틀림없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기한테 주어진 돈을 제자 삼는 일에 사용하셨다. 그분은 심지어 제자들의 전도 여행 경비까지 부담하셨다.[1] 우리의 시대에서, 젊은 제자들은 신학교에서 연장의 사역자들의 강의를 대부분 돈을 지급하고 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본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또한 그분께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게끔 그분의 아버지께서 그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축복해주실 줄을 믿는 신뢰의 삶을 사셨다. 우리는 그분께서 때로는 저녁 만찬에 초대되시기도 하고, 때로는 밭에서 밀 이삭을 드신 적도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눅 6:1을 보라).

예수님은 적어도 두 번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온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셨다. 이것은 강연을 듣기 위해 입장료를 내야만 하는 현대 기독교 회의와 얼마나 많이 다른가! 우리는 우리의 사역자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데, 사람들은 종종 우리가 “돈을 지급하여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를 듣게 한다”고 조롱한다. 실은,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또한 가난한 자들도 보살피셨는데 그분의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돈궤를 관리하고 있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일반적인 기능이었으며 그분께서 유다에게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 그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분부하셨을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은 유다가 가서 음식을 사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줄로 알았다(요 13:27-30을 보라).

예수님은 그분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셨기에 단순하고 나누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세례 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한 벌 있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눅 3:11)라고 설교할 때 회개하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께는 단 한 벌의 옷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번영 설교자들은 예수님이 오직 부자들만 입었을 것 같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속옷을 입으셨기에(요 19:23을 보라) 그분은 부자였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누군가가 수많은 다른 성경 말씀과 모순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 본문에서 찾아낸 요점은 참으로 놀랍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부를 숨기려고 통으로 짠 겉옷을 착용하시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하셨으며 우리가 그것을 다 고려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사람을 속이는데 숙달된 현대 번영 설교자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부하게 하셨다(“God Made Solomon Rich”)

이것은 많은 번영 설교자가 자신의 탐욕을 위장하는 데 사용하는 변명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부하게 하신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겠는 약속을 하셨을 때, 솔로몬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재부를(다른 것을 포함하여)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기뻐하셨기에 지혜에 재부를 더하여 주셨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그분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았고 결국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그가 현명했더라면, 그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아니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라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4-17).

이것은 번영 설교자들이 항상 무시하는 또 다른 성경 말씀인데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말씀을 무시했던 솔로몬의 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그들도 우상 숭배자가 되었다. 솔로몬의 마음은 그의 많은 아내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를 하게 되었으며 그가 재부를 남용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아내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분께서 주신 재부를 사용하여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를 바라셨지만, 솔로몬은 그것을 자기를 사랑하는데만 사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하여 자신을 위해 금, 은, 병거, 그리고 아내들을 늘렸다. 그는 궁극적으로 칠백 명의 아내를 두고 삼백 명의 첩을 소유하였는데 이것은 천 명 남자의 아내를 강탈한 것과 같다. 솔로몬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보다는 자기 욕망만을 채웠다. 번영 설교자들이 솔로몬이 이기심과 우상 숭배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든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본보기로 떠받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아브라함을 부하게 하셨으며 아브라함의 우리에게 약속하셨다(“God Made Abraham Rich, and Abraham’s Blessings Are Promised To Us”)

이러한 변명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 바울의 말에서 지어낸 것이다. 나는 자주 잘못 인용되는 구절을 앞뒤 문장과 함께 아래에 인용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8-14, 강조 추가).

바울이 14절에서 쓴 “아브라함의 복”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이것은 바울이 8절에서 인용한 것과 같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몇 구절 뒤에 설명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한 자손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갈 3:16). 우리가 금방 읽은 것에 따르면,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게 그 약속된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처럼 물질적으로 부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그 약속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다(여기에서 바울의 요점은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왜곡(Another Twisting)

이와 같은 구절은 종종 자신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번영 설교자들에 의해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들은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아 가난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고(신 28:30-31, 33, 38-40, 47-48, 51, 68을 보라),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썼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가난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고 주장한다.

첫째,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쓸 때, 신명기 28장의 특정 저주를 염두에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께서 율법의 “저주들”(복수)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쓰지 않고 단수인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썼는데 아마도 모든 율법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한테는 저주라는 것을 암시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에 의해 속량받았으면, 더 이상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구원하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았다.”

만일 바울이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신명기 28장에 나열된 모든 재앙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고 우리에게 물질적인 번영을 약속했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우리는 그가 왜 자신에 대해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다”(고전 4:11)고 썼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왜 아래와 같이 썼는지 궁금할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36).

분명한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의 위협을 받지 않을 것이며 바울도 이 같은 말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왜 다음과 같은 천국의 장면을 예언하셨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4-40, 강조 추가).

따라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은” 신자가 별로 풍요롭지 못한 상황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고통받는 신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며 그분은 필요 이상을 소유한 다른 신자들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상황이 일시적으로 달라 보일지라도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처럼 부해지기를 원하는 번영 설교자들은 그들의 일생을 전기와 수돗물이 없는 천막에서 보내기를 원하는지를 자신한테 성실하게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느 정도 물질적인 축복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은 그들의 재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그들의 풍요로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했다. 아브람함은 그렇게 하여 수백 명의 사람을 고용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다(창 14:14을 보라). 욥도 그렇게 하였고 자기의 재산으로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펴주었음을 증언하였다(욥 29:12-13, 31:16-22을 보라). 사업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최고 사업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다짐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Scripture Says That Jesus Became Poor So That We Could Become Rich”)

사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분명히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물질적으로 부요하셨지만 땅에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으므로 바울이 그의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다고 쓴 것은 물질적인 부요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바울이 만일 이 구절의 첫 부분에서 물질적인 부요와 가난함을 썼다면, 두 번째 부분에서 영적인 부요함에 대해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우리는 그가 왜 동일한 서신에서 몇 구절 뒤에 아래와 같이 썼는지 궁금할 것이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만일 바울이 고린도후서 8:9에서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그리스도의 뜻은 분명 바울의 생애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물질적으로 가난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부요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영적으로 부요해지는 것을 의미했으며 예수님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고”(눅 12:21), 우리의 보물과 마음이 있는 천국에서 부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번영 설교자들은 바울이 그 구절의 앞 부분에서 물질적인 부요함을 말했기 때문에 그 구절의 뒷 부분에서 영적인 부요함에 대해 말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안전할까?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을 읽어보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 2:9 상).

분명히, 예수님은 서머나 신자들이 겪고 있는 물질적인 궁핍을 말씀하셨으며 바로 뒤에 그 신자들의 영적인 부요함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버린 것의 백 배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Jesus Promised a Hundred-Fold Return on Our Giving”)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복음을 위하여 버린 것의 백배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분께서 과연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번영 설교자들은 이 약속을 자주 인용하지만, 이 약속은 목사에게 헌금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오히려 이 약속은 자기 집이나 전토나 친척들을 멀리 떠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현세에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 번영 설교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집이나 전토를 문자적으로 백배를 소유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까? 아니, 그분은 그런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백 명의 어머니나 백 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집과 가족을 남겨 두고 복음을 위해 떠난 사람들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에게 자기 집을 개방하고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받아주는 것을 경험하게 됨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 박해와 영생을 약속하셨음을 주목하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본문 중 영생을 바라는 한 부자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매우 놀랐으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버렸음을 예수님께 말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의 “백 배”의 약속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몇 초 전에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번영 설교자들이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백 배의 물질적인 보답을 약속하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번영 설교자는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 외에도 많은 다른 말씀들을 왜곡하고 있다. 편폭의 제한을 받아 이 책에서 그것을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다. 조심하라!

기억해야 할 격언(A Maxim to Remember)

존 웨슬리 영국 감리교 교회의 창시자이며 돈에 대한 적절한 관점을 보여주는 훌륭한 격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주라”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기회를 사용하여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하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검소하고 간단한 삶을 살고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적게 지출하여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처음 두 단계를 수행한 후,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십일조를 내는 것에만 제한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부인하여 과부와 고아들을 공급하고 복음이 전 세계에 선포되게 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확실히 이런 청지기 직분을 수행했으며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신약 시대 신자들의 일반적인 생활 특징이었다. 그들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누가는 초대 교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2:44-45; 4:32-35).

성경은 초대 교회가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였음을 명백히 적고 있다(행 6:1; 딤전 5:3-10을 보라).

가장 위대한 사도이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대부분의 신약 서신을 쓴 바울은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자신의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많은 돈을 모금하였다(행 11:27-30; 24:17; 롬 15:25-28; 고전 16:1-4; 고후 8-9; 갈 2:10을 보라). 바울은 회심한 후, 적어도 17년 동안 자기가 받은 복음을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전했으며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감찰을 받았다. 그들 중 누구도 바울의 메시지에서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바울은 그 때 상황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들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라고 썼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바울의 마음에는 가난한 자들을 연민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요약(In Summary)

이 주제에 관하여, 제자 삼는 사역자에 대한 가장 좋은 충고는 사도 바울에게서 온다. 그는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며 그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경고한 뒤, 아래와 같이 권면하였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딤전 6:11, 강조 추가).

 


[1]번영 설교자들은 종종 이 사실로 예수님의 사역이 번영했음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써 그분께서 사명을 이루시게 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과 번영 설교자들의 차이점은 예수님은 이기적이 아니시며 그분은 사역의 돈을 자신을 부하게 하는 데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