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Chapter Twenty)

찬양과 예배(Praise and Worship)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19-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분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의 자격조건을 설명하셨다. 이것은 예배자는 맞지만 참되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 사항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의 특징을 선언하셨다. 그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따라서 거짓 예배자를 “육과 거짓”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거짓 예배자는 육적으로 예배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예배는 단지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놀랍게도, 예수님과 대화했던 여자는 다섯 번 결혼했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장소인지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상을 살면서 그분께 예배 드리려는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참된 예배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헛된 경배를 책망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7-9, 강조 추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사람이 어디에서 예배할지를 크게 중시했지만, 예수님은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각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그가 드리는 예배의 품질을 결정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죽은 예배자들에 의해 연기되는 죽은 예식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를 때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그들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에 그들의 예배는 헛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아침에 “당신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무심하게 읇조리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을 더 듣고 싶으실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다(Worshipping in Spirit)

일부 사람들은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 해석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참되게 예배하는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영으로 예배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음을 나타낸다. 물론, 아무도 오순절 날까지는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그가 방언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은 확실히 신자가 예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방언기도도 무정한 의식이 될 수 있다.

사도행전 13:1은 초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강조 추가).

이 구절에서 그들이 “주를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우리가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을 예배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예배는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대상이 오직 주님일 때에만 성립된다.

예배 드리는 방법(Ways to Worship)

이스라엘의 찬송가라고도 할 수 시편은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도록 권면한다. 예를 들어, 시편 32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하, 강조 추가).

조용하고 공손하게 예배를 드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 즐겁게 외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시 33:1-3, 강조 추가).

물론, 우리는 예배 때 주님을 찬송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는 즐거워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반영하는 또 다른 외적인 표시이다. 우리는 또한 다양한 악기로 즐거운 노래를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많은 교회 모임에서, 전기 악기들이 종종 너무 높게 연주되어 노랫 소리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있음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그런 악기 소리는 낮추거나 꺼버려야 한다. 시편 기자들은 종래로 그런 문제가 없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 63:4, 강조 추가).

항복과 존경의 표시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손을 들 수 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시 66:1-4, 강조 추가).

우리는 주님께 그분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이신지를 말해야 하며 그분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해야 한다. 시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우리는 “주님,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라는 반복적인 고백보다 훨씬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강조 추가).

심지어 우리의 자세까지도 예배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서 있든지,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허리를 굽히든지 다 가능하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시 149:5, 강조 추가).

그러나 우리는 서 있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침상에 누워서도 예배 드릴 수 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강조 추가).

감사 드리는 것은 마땅히 우리의 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시 149:3, 강조 추가).

우리는 심지어 춤을 추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육적이고, 관능적이거나 순전히 오락적인 춤은 추지 말아야 한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3-6).

음악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악기를 연주한다면 그들의 은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임 받을 수 있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시 98:1 상, 강조 추가).

옛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의식적이만 않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만일 그런 경우 라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온 새 노래가 필요하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도록 도와주심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8-20).

바울은 우리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해야 한다고 썼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서로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헬라어 원어에 대한 공부가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시”는 아마도 악기의 연주에 따라 성경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찬송”은 교회의 여러 신자에 의해 만들어진 일반적인 감사의 노래들일 것이다. “신령한 노래”는 성령님에 의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며, 불러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예언의 은사와 비슷하다.

찬양과 예배는 우리가 교회에서 모일 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 하루를 통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다.

찬양 – 믿음의 행동(Praise–Faith in Action)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정상적인 표현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한 즐거운 사람이 될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소리쳐야만 했었다. 그러자 벽이 무너졌다. 성경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빌 4:4),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상)라고 훈계한다.

역대하 20장에는 찬양의 능력에 관한 가장 뛰어난 사례 중 하나가 기록되었으며, 때는 유다가 모압과 암몬 군대의 침략을 받을 때였다. 여호사밧 왕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래와 같이 지시하셨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대하 20:15 하-17).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대하 20:20-25, 강조 추가).

믿음으로 가득한 찬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한다!

찬양의 능력에 관한 주제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위해 빌립보서 4:6-7(찬양은 평화를 가져온다), 역대하 5:1-14(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 사도행전 13:1-12(찬양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보게 한다), 사도행전 16:22-26(찬양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탈옥을 경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