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Chapter Sixteen)

예수님의 치유사역(The Healing Ministry of Jesus)

사람은 종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거나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확실히 신성을 지니셨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분명히 자기 제한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은 어느 한 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자기 제한적이고 그분의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으로 되셨을 때 자기를 비우셨으며, 그분이 비우신 것은 전에 하나님처럼 소유하셨던 것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5-7, 강조 추가).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신성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거룩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음이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그분은 더는 무소부재하시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더는 전지하시지 않으며 전능하시지 않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분의 사역 속에서, 그분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람으로 활동하신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분이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왜 성령세례가 필요했는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왜 하나님하나님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분명히 예수님은 사역을 위한 성령세례가 필요하셨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세례 받으신 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강조 추가).

그것은 베드로가 아래와 같이 설교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강조 추가).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30세에 성령세례를 받기 전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분이 25세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을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왜 그분은 30세 때까지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가지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자기에게서 비우셨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사람으로 사역하셨다는 더 많은 증거들(More Proof that Jesus Ministered as a Man Anointed by the Spirit)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지셨을 때와 그렇지 않으셨던 때가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예수님은 종종 정보를 얻으시기 위해 질문을 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에게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17-18을 보라).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그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일까? 아니, 만일 그 경우라면, 예수님은 일관성 있게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비록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예수님은 사람으로 되실 때 전지의 자기를 비우셨다. 예수님이 우물가 여자의 결혼사를 아는 것은 그 순간에 성령님이 그분에게 “지식의 말씀”(고전 12:8)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또는 과거의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자세히 다룰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아니,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시고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막 5:30 하)라고 물으셨다. 마가복음 11:13에서 예수님이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을 때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서 보셨다.”

왜 예수님은 누가 그분을 다쳤는지 모르셨을까? 왜 그분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혔는지 여부를 모르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어진다(고전 12:11; 히 2:4을 보라). 예수님은 성령님이 뜻하시고 그분께 “지식의 말씀”을 주지 않으면 초자연적으로 무언가를 아실 수 없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예수님이 아무 때나 누구든지 치유할 수 없다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그분이 원하셨던 일을 아무것도 이루실 수 없었음을 읽게 된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막 6:1-6, 강조 추가).

마가는 예수님이 거기에서 권능을 행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하실 수 없었다고 했음을 주목하라. 왜서일까? 왜냐하면, 나사렛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동네 목수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 6:4)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았다. 그 결과로, 그분이 성취하신 일은 다만 소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시는 것뿐이었다. 확실한 것은, 만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으셨던 곳이 있었다면, 그곳은 분명히 그분이 삶 대부분을 사셨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곳에서 그분은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말씀한다.

누가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More Insight from Luke)

예수님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치유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병든 자들이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셨다. (2) 성령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치유의 사역을 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 요인의 제한을 받으셨다. (1) 병든 자들이 믿지 않는 것과 (2) “치유의 은사”를 통해 그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님의 뜻인지 여부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다른 도시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것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분이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분은 그들을 치유할 수 없으셨다. 또한, 성령님은 나사렛에서 예수님께 “치유의 은사”를 명백히 주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는 예수님이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가보다 보다 자세히 기록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16-22).

예수님은 그분이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임을 청중들이 믿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그분의 기름 부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믿고 받을 수 있기를 원하셨는데 이사야에 의하면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된다.[1]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고, 비록 그들이 그분의 말씀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요셉의 아들이 특별하다고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에 의심을 품은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3-24).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던 일을 하실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적이었다. 그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하여 예수님을 어떤 기적이나 치유도 행하실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받은 다른 제한성(Jesus’ Other Limitation in Nazareth)

나사렛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분께서 또한, “치유의 은사”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게 하는 성령님의 뜻에 제한받음을 보여준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 4:25-27).

예수님의 요점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3년 기근 동안 어떤 과부든지 그가 원하면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왕상 17:9-16을 보라). 비록 그 당시 이스라엘에 수많은 고통 받는 과부가 있었지만, 성령님은 엘리야가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한 명의 과부만 도와주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엘리사도 그가 원하면 어떤 나병환자든지 깨끗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나아만이 깨끗게 함을 받을 당시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그것이 순전히 엘리사 자신의 선택이었다면, 그가 우상 숭배자인 나아만을 깨끗게 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다른 나병환자들도 깨끗게 하였을 것이다(왕하 5:1-14을 보라).

엘리야와 엘리사는 모두 성령님의 뜻대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쓰임 받은 성령님께 기름 부음 받은 선지자들이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른 과부에게 보내시지 않았을까? 나는 모른다. 왜 하나님은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다른 나병 환자들을 치유하시지 않았을까? 나는 모른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익숙한 구약 성경 이야기는 모든 과부의 필요를 제공하거나 모든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하지 못한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사악한 왕(아합)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만 했어도 자신들의 기근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기근은 하나님 심판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나병 환자들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육체적인 치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더라면 치유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청중들에게 엘리야와 엘리사가 제한 받았던 것처럼 그분도 같은 제한을 받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성령님은 나사렛에서 모종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어떤 “치유의 은사”도 주지 않았다. 그 사실과 나사렛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고향에서 큰 기적을 행하시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은사”를 보다(A Look at One “Gift of Healing” Through Jesus)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다양한 치유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치유받은 사람은 “치유의 은사”가 아닌 그들의 믿음 때문에 치유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치유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각자의 예를 통하여 살펴보자. 먼저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닌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은 베데스다 못의 다리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연구해보자.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 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2-9).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람이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닌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았는지를 알 수 있을까?

첫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 사람이 못가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면,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셨을 때처럼 그 사람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치유하였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셋째로,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한 사람이 누군가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그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사”를 통하여 치유받은 명확한 사례이다.

또한, 많은 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만 치유하셨고 나머지 사람은 병든 채로 남겨 두셨음을 알 수 있다. 왜서일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떤 사람은 병든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 병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고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다. 사실,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것은 병든 사람들을 그들이 믿기만 하면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께 집중시키기 위함일 수 있다.

많은 경우, “치유의 은사”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해 설계된 “표적과 기사”의 범주에 속한다. 때문에 빌립과 같은 신약 성경 속의 복음 전도자는 다양한 “치유의 은사들”로 장비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한 표적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행 8:5-8을 보라).

그리스도인이 병들었을 때,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와서 치유해주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과 은사는 결코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받는 것은 가능하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는 있다. 교회에 치유의 은사를 주신 것은 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치유받음으로 인해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치유받기를 기대하신다.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은 사람의 한 예(One Example of a Person Healed By His Faith)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 받은 한 맹인이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그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46-52).

우선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찾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베데스다 못가의 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과는 정반대이다). 사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스쳐 지나가고 계셨다. 그리고 만일 바디매오가 부르짖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계속하여 걸어가셨을 것이다. 즉, 바디매오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아래의 가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 앉아 “그래, 내가 치유받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면, 그분은 나에게로 오셔서 나를 치유하여 주실 거야”라고 자신한테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비록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바대매오를 치유하시기를 뜻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행동은 곧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에 의해 좌절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사람들이 그를 잠잠하게 하려고 할 때,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막 10:48). 그것은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최초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물론,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최초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셨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들으셨다 할지라도 응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이 시험받게 하실 수 있다.

만일 바디매오가 한 번만 부르짖고 포기했다면, 그는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때로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믿음은 시험받게 되며, 우리는 계속하여 굳게 서야 하여 역경 때문에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바디매오의 믿음에 관한 추가 암시(Further Indications of Bartimaeus’ Faith)

예수님이 마침내 그를 부르셨을 때, 성경은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렸다”고 말씀한다. 나의 이해에 의하면 예수님의 시대에 맹인들은 대중들이 맹인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특별한 겉옷을 입었다. 확인 망토의 특정 종류를 착용 한 나의 이해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버린 것은 그가 더는 맹인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라면, 그의 믿음은 다시 한 번 분명해진다.

또한, 바디매오가 자신의 겉옷을 내버렸을 때, 성경은 그가 “뛰어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흥분된 기대감을 표시한다. 치유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때 흥분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치유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그분 앞에 섰을 때 그의 믿음을 한 번 더 시험하셨음을 주목하라.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으신 예수님께 드린 바디매오의 대답으로부터 보아, 그가 예수님이 그를 능히 치유하실 수 있으며 또 치유하여 주시리라는 것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바디매오가 믿음으로 치유받을 수 있었다면, 누구든지 다 치유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일보된 연구(For Further Study)

아래에 나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21가지 치유의 사례들을 나열하였다. 물론, 예수님은 21명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셨지만, 아래의 경우에서 우리는 병자 개개인과 그들이 어떻게 치유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례들을 믿음으로 치유된 사람과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된 사람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치유받은 경우, 예수님은 그들에게 치유받은 것에 대해 잠잠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진일보 그들이 치유받은 것이 “치유의 은사”에 의한 것이 아님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병든 자들이 예수님이거나 복음을 선전하기 위해 치유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이나 믿음으로 치유받았다고 언급한 사례들:(Cases Where Faith or Believing is Mentioned as the Cause of Healing:)

1. 백부장의 하인(또는 종): 마 8:5-13; 눅 7:2-10 “네가 믿는 대로 될지어다.”

2.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다. 마 9:2-8; 막 2:3-11; 눅 5:18-26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내가 네게 이르노니… 집으로 가라”

3. 야이로의 딸: 마 9:18-26; 막 5:22-43; 눅 8:41-5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

4. 혈루증으로 앓은 여자: 마 9:20-22; 막 5:25-34; 눅 8:43-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5. 두 맹인: 마 9:27-31 “너희 믿음대로 되라…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6. 맹인 바디매오: 막 10:46-52; 눅 18:35-4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7. 열 명의 나병 환자: 눅 17:12-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8. 왕의 신하의 아들: 요 4:46-53 “그 사람은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믿었다.”

다음 4가지 사례에서, 병든 자의 믿음이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보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10번째 사례에 나오는 두 맹인도 바디매오가 한 것처럼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 부르짖었다. 다음의 4가지 예에서 나오는 모든 병든 자들은 주동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믿음을 명확히 나타낸다. 다음의 4가지 사례 중 3가지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치유하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이들이 “치유의 은사”로 치유받은 경우가 아님을 나타낸다.

9.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병 환자: 마 8:2-4; 막 1:40-45; 눅 5:12-14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10. 두 맹인(아마 한 명은 바디매오였을 것이다): 마 20:30-34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1. 귀머거리와 벙어리: 막 7:32-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12. 한 맹인: 막 8:22-26 “마을에는 들어도 가지 말라.”

마지막 두 사례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기를 간구한 사람은 실제로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구원에 영향 줬다고 칭찬하셨다.

13. 귀신 들린 아이: 마 17:14-18; 막 9:17-27; 눅 9:3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14.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 마 15:22-28; 막 7:25-30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의 사례:(Cases of People Healed Through “Gifts of Healings”:)

아래의 7가지 사례들은 명백히 치유의 은사를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 3가지 사례에서는, 병든 자가 치유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특정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이러 경우에. 예수님은 치유받은 자들에게 치유받은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병든 자가 예수님을 먼저 찾은 적도 없다.

15. 손 마른 사람: 마 12:9-13; 막 3:1-5; 눅 6:6-10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네 손을 내밀라.”

16. 베데스다 못가의 남자: 요 5:2-9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17.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 9:1-38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18. 베드로의 장모: 마 8:14-15; 막 1:30-31; 눅 4:38-39

19. 열여덟 해 동안이나 꼬부라진 여자: 눅 13:11-16

20. 수종병 든 남자: 눅 14:2-4

21. 대제사장의 종: 눅 22:50-51

위의 스물하나의 모든 사례에서, 성인이 전적으로 다른 성인의 믿음으로 치유받은 경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치유 받았던 모든 경우를 보면, 그것은 항상 아이가 그 부모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은 경우였다(사례 1, 3, 8, 13, 14를 보라).

유일하게 가능한 예외는 백부장의 하인의 사례와 중풍 병자를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로 내려온 사례가 될 것이다. 백부장의 하인의 사례에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pais 인데 이 단어는 마태복음 17:18에서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강조 추가) 라고 번역된 것처럼 아이로 번역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가 백부장의 아이가 아니라 하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하인은 어린아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백부장은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로서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며,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아이를 대신하여 믿음을 행사할 수 있다.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경우에서, 중풍병자 자신이 반드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친구들이 그를 지붕을 통해 달아 내리게 허락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적으로 친구들의 믿음으로 치유 받은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만일 병든 성인 자신이 믿음이 없다면, 다른 성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치유되게 할 수 없다. 물론 한 성인이 치유가 필요한 성인과 함께 기도할 수는 있지만, 병든 성인의 불신은 잠재적으로 다른 성인의 믿음의 효과를 무효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아이들은 특정 나이까지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치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나이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주님의 치유에 대한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 위에 열거한 매 사례마다 자세히 공부할 것을 권장한다.

치유의 기름 부음(The Healing Anointing)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감지할 수 있는 치유 능력을 기름 부음 받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즉, 그분은 실제로 치유의 능력이 그분의 몸에서 나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치유받고 있는 병자도 그 능력이 자기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19은 이렇게 말씀한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라”

분명한 것은, 치유의 기름 부음이 심지어 예수님의 옷에도 흐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병든 사람이 그분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면, 치유의 기름 부음은 그 사람의 몸으로 흐를 것이다. 아픈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의 옷을 만진 경우, 기름 부음 치유 자신의 몸에 흐를 것이다. 마가복음 6장 56절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막 5:25-34을 보라)는 그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치유될 수 있기를 믿음으로 기대했으며 또 믿는 대로 치유받았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그의 사역의 후년에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1).

바울의 몸이 닿았던 옷은 모두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옷이 치유의 능력을 전달하는 좋은 도체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하나님은 예수님이나 바울의 시대 이후로 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바울에게 주셨던 치유의 기름 부음을 오늘날 그분의 일부 종들에게 부어주셨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은 새 신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일정 기간 동안 신실함과 이기적인 동기가 없음이 검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1]이 모든 것은 육체적인 치유로 볼 수 있으며 병도 눌린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