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Chapter Fifteen)

신유(Divine Healing)

비록 신유의 주제가 다소 논란이 있지만, 성경은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사실, 사복음서의 기록 중 십 분의 일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관한 것이다. 구약 성경, 사복음서, 신약 서신 모두에 신유에 대한 약속이 있다. 병든 사람은 믿음 위에 세워진 말씀 속에서 큰 격려를 받을 수 있다.

전 세계의 교회들에 대한 나의 관찰에 의하면, 헌신적인 신자(진정한 제자)가 많은 교회일수록 신유가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교회가 미지근하고 순전하지 않을수록 신유가 드물게 일어난다.[1] 이런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아지는 표적이 따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 16:18을 보라).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교회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많은 교회가 불신자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5-18).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본받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이 영향 줄 수 있는 영역에서 신유의 사역을 촉진하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당연히 사용할 것이다. 그는 신유가 적어도 두 가지 방면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첫째로, 복음서 또는 사도행전을 읽어본 아이들은 다 이해할 수 있듯이(그러나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역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치유의 기적은 복음을 위한 훌륭한 광고이다. 둘째로, 건강한 제자들은 사역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질병으로 인한 방애를 받지 않는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또한, 치유받기를 원하지만, 치유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들은 종종 부드러운 가르침과 온유한 격려가 필요한데 특히 그들이 어떤 치유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면 말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 그는 신유의 주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피함으로 아무도 거스르지 않거나 아무도 치유받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또는 그 주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으로 하여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하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거스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번째를 선택할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십자가에서의 치유(Healing on the Cross)

신유에 대해 연구하기 가장 좋은 곳은 보편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되는 이사야서 53장이다. 성령님을 통하여, 이사야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질고를 담당하셨다고 선언하였다. 히브리어 본문의 뜻을 더 잘 번역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담당하신 것이 된다. 많은 신뢰할 수 있는 성경 번역본에서도 이 부분을 주석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사야서 53:4에서 질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choli 란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명기 7:15; 28:61; 열왕기상 17:17; 열왕기하 1:2; 8:8과 역대하 16:12; 21:15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경우에서 그 단어는 으로 번역되었다.

슬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makob는 욥기 14:22과 33:19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경우에서도 그 단어는 아픔으로 번역되었다.

이 때문에, 이사야서 53:4을 “그는 실로 우리의 아픔을 지고 우리의 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사실은 마태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직접 인용한 이사야서 53:4을 통해서도 보증된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

이러한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일부 사람은 이사야가 우리의 “영적 질병”을 언급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이 인용한 이사야서 53:4은 이사야가 말 그대로 육체적인 질병을 언급하였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이 보여준다. 그 성경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강조 추가).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육체적인 병의 치유가 이사야서 53장 4절 말씀의 성취라고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사야서 53:4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증거임이 틀림없다.[2]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성경 말씀처럼(사 53:11을 보라),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육체적 인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셨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마땅히 기뻐해야 할 소식이다. 예수님은 속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치유를 주셨다.

제기된 한 가지 질문(A Question Asked)

그러나 일부 사람은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지 못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 질문은 “왜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장 잘 대답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었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의 믿음에 합당한 치유를 받게 된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담당하신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들어보았지만 거절했다.

병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태도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본체의 형상”(히 1:3)이심을 읽게 된다. 따라서, 병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가 아버지께서 병을 향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의 태도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라도 자신한테 나아와서 치유를 간구한 사람은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치유받기를 갈망하는 병든 사람에게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안돼, 당신이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당신은 계속 병을 앓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한테 온 병든 사람들을 항상 치유하여 주셨으며, 그들이 일단 치유되면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치유하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은 절대 변하시지 않으며(말 3:6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고 선언한다.

선포된 치유(Healing Proclaimed)

불행하게도, 오늘날 구원은 단지 죄의 용서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구원”으로 가장 자주 번역되는 헬라어는 용서뿐 아니라 완전한 해방과 치유의 의미도 나타낸다.[3]이러한 의미에서의 구원을 경험한 성경 속의 한 인물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치유되었다.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행 14:6-10).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그 사람은 육체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무언가를 들었다. 최소한, 그는 바울이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며, 예수님께 치유받게 해달라고 믿음으로 간구한 사람들이 어떻게 치유받았는지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도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말했을 수 있다. 우리가 모르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롬 10:17) 때문에, 그 병자가 마음속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 무언가를 들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이 한 말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가 계속 마비상태에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음을 확신하게 하였다.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치유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할 수가 없으며, 바울도 그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했을리가 없다. 만일 바울이 많은 현대 설교자들이 하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그가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설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치유받지 못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할 설교자들이 정작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되었음을 주목하라. 비록 그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믿지 않았다면 여전히 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날 거기에 있던 무리 중에 그 사람 외에 아픈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터이나, 그들 중 누구도 치유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왜 치유받지 못했을까? 그날 무리 속에 있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은 같은 이유 때문에 거듭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치유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거듭나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과 같다. 구원받으려는 사람마다 반드시 복음을 믿어야 하며, 치유받으려는 사람마다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마다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진일보 증거하다(Further Proof of God’s Will to Heal)

구약에서, 육체적인 치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한 후 며칠 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정직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치유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에 포함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덧붙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7-31에서 신약에서의 육체적인 건강도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강조 추가).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신 7:14-15, 강조 추가).

사람은 만일 육체적인 치유가 구약에 포함되었다면, 또한, 성경에서 주장한 것처럼 신약이 구약보다 더 좋은 약속이라면, 왜 신약에는 육체적인 치유가 포함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강조 추가).

더 진일보된 증거(Yet Further Proof)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세 가지를 나열하겠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1-3, 강조 추가).

어느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다윗의 선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 4:20-22, 강조 추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강조 추가).

이 마지막 약속은 모든 병든 자들에게 한 것임을 주목하라. 그리고 장로나 기름 때문에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로 치유받음을 주목하라.

이 믿음은 장로의 믿음일까 아니면 병든 자의 믿음일까? 이 믿음은 장로와 병든 자 모두의 믿음이다.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를 청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표현하였다. 병든 자의 불신은 장로의 기도를 폐할 수도 있다. 야고보가 쓴 이 기도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8:19에서 언급하신 “합심의 기도”의 좋은 예이다. 두 당사자는 이 기도를 함에 있어서 반드시 “합심”하여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은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합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의 여러 말씀에서 병의 이유를 사탄에게 돌린 것을 알고 있다(욥 2:7; 눅 13:16; 행 10:38; 고전 5:5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몸에 사탄이 일하는 것을 막아주실 거라고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보다도 그분의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마 7:11을 보라).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 자신의 자녀가 병들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동안, 행하신 치유의 역사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격려해준다. 예수님은 자주 그분께 치유받기를 구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으며, 그들의 믿음이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칭찬해주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람만 골라서 치유해 주시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어떤 병든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면 치유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치유하기를 원하시나 그들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몇 가지 보편적인 반론에 대한 답변(Answers to Some Common Objections)

아마도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닌 사람들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그런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암이 치유받기 위해 기도했던 훌륭한 그리스도인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바로 요단 강 건너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을 알고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것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음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했다(히 3:19을 보라).

지금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은 어떨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천국에 가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는 아픈 사람을 보고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없다. 한 그리스도인의 치유를 위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치유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일 그 그리스도인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는데도 치유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이다. 우리가 치유받지 못하고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믿음에 대해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에 대한 기도를 믿음을 파괴하는 “만일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란 문구로 부당하게 마무리한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가 보았 둣이, 치유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매우 명백하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만일 그것이 당신이 뜻이라면”이란 말을 치유의 기도에 추가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께 “주님, 나는 당신께서 저를 치유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압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거짓말을 하셨을지도 모르니까, 오직 그것이 당신의 뜻일 때에만 저를 치유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신자들을 훈계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질병을 허락하시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죽음의 변두리까지 가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신자들은 치유받기 전에 회개하는 것이 분명히 필요하다(고전 11:27-32을 보라). 또한,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을 홀시함으로 병든 신자들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먹고, 정기적으로 운동하고, 필요한 휴식을 취할 만큼 충분히 지혜로워야 한다.

두 번째 보편적인 반론(A Second Common Objection)

사람은 종종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시가 질병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신학 이론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고후 12:7-9, 강조 추가).

사자라고 번역된 그리스 단어 “aggelos”는 신약 성경에서 160여 곳에서 천사로 번역되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사탄이 바울을 타격하기 위해 보낸 천사이지 질병이 아니다.

또한, 바울이 치유받기 위해 기도를 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를 거부하셨다는 표시가 없었음을 주목하라. 세 가지 경우에, 바울은 단지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누가 바울에게 이 가시를 주었을까? 어떤 사람은 그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불려지기에 그것을 준 것도 사탄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은 가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가시로 인해 교만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도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했다.

킹 제임스 번역본은 이 구절을 조금 다르게 번역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를 “내가 자고하지 않도록”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지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는다. 사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낮추면 우리를 높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때문에 하나님은 높여주시는 분이시지만, 사탄은 바울이 어디로 가든지 교란시키는 사자를 보내어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그가 높임을 받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의 능력은 바울의 약한 데서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병든 바울을 하나님이 치유해주기를 거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왜곡이다. 육체의 가시에 대한 성경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질병도 언급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이 그를 치유해주시지 않았다는 언급도 한 적이 없다. 만일 정직한 사람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3-30에 열거한 모든 시련을 읽어보면, 그 가운데 질병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같은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An Elaboration on the Same Theme)

어떤 사람은 바울의 가시에 대한 나의 설명에 대해 “그러나 바울 자신이 처음으로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육체가 약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육체의 가시를 말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반대한다.

아래의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쓴 편지의 실제 내용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3-14).

갈라디아서 4:13에서 약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asthenia 이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약함”이다. 약함은 병 때문일 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강조 추가)고 썼다. 이 구절에서 약하심으로 번역된 단어도asthenia 이다. 번역가가 “하나님의 병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번역했다면 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마 26:41과 벧전 3:7에서 asthenia 는 모두 약함으로 번역되었으며 으로 번역될 수 없다).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바울이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가 병들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알고 내버려 두었으며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거나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는 언급은 있다(행 14:5-7, 19-20을 보라). 돌로 친 후 죽은 줄로 알고 내쳐둔 바울의 몸은 분명히 온통 상처로 뒤덮인 끔찍한 상태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병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청중들에 대한 시험이었다. 오히려, 그의 몸이 약해진 것은 돌에 맞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갈라디아에서 받았던 박해로 인한 몸의 상처를 여전히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서신을 이렇게 마무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또 다른 반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 받는다”(Another Objection: “I’m Suffering for the Glory of God”)

이 반론은 나사로가 부활한 이야기 중의 한 말씀을 가지고 그들이 병을 앓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다. 예수님은 나사로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사로의 병의 결과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치유받고 죽음에서 일어나므로 인해 영광 받으신다고 하셨다. 즉, 병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 때문에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 때문에 영광 받으신다(마 9:8; 15:31; 눅 7:16; 13:13; 17:15을 보라. 거기서 사람은 치유받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 다른 반론: “바울은 그가 밀레도에 드로비모를 병든채로 남겨두었다고 했다” (Another Objection: “Paul Said He Left Trophimus Sick at Miletum”)

내가 이 부분을 쓰고 있을 당시 마침 독일의 한 도시에 있었다. 지난주 내가 미국의 고향을 떠날 때에, 많은 아픈 사람들을 남겨뒀다. 나는 병원에 수많은 병든 자들을 남겨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바울이 방문한 도시에 병든 사람 한 명을 두고 떠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치유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없다. 바울은 또한, 많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두고 떠났는데 그 사람은 어떠한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절대 할 수 없다.

또 다른 반론: “나는 욥과 같다!”(Another Objection: I’m Just Like Job!”)

 

주님을 찬양하라! 당신이 욥기를 끝까지 읽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그가 치유받았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욥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당신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욥의 이야기는 치유가 하나님의 뜻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또 다른 반론: 바울이 디모데의 위장에 대해 한 조언(Another Objection: Paul’s Advice to Timothy About His Stomach)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딤전 5:23을 보라).

사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을 마시는 것을 중지하고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했다. 이것은 물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만일 당신이 오염 된 물을 마셨다면, 당신은 그 물을 마시기를 중지하고 다른 뭔가를 마시기 시작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아마 디모데와 같은 위장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반론: “예수님은 단지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치유하셨다”(Another Objection: “Jesus Only Healed to Prove His Deity.”)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이 치유하신 유일한 이유는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믿기를 원한다. 지금은 그분의 신성이 이미 확립되었기에, 그분은 더는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그분의 신성을 입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치유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마 8:4; 9:6, 30; 12:13-16; 막 5:43; 7:36; 8:26을 보라). 만일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한 목적이 단지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라면, 그분은 치유받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말하도록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신 동기는 무엇일까?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씀한다(마 9:35-36; 14:14; 20:34; 막 1:41; 5:19; 눅 7:13을 보라). 예수님이 치유하신 이유는 그분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이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적어졌는가? 그분의 사랑이 적어졌는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반론: “하나님은 모종 이유 때문에 내가 병들기를 원하신다”(Another Objection: “God Wants Me to be Sick for Some Reason.”)

그것은 우리가 고려했던 모든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지속적으로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당신의 병을 허용하실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병든 상태로 있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그분은 당신이 회개하고 치유받기를 원하신다.

또한,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병들게 하시고자 한다면, 왜 당신은 의사에게 가서 약을 복용하고 치유받기를 원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려는가?

마지막 반론: “우리가 질병의 고통이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A Final Objection: “If We Never Suffer Disease, How Will We Die?”)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부패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후 4:16을 보라). 우리가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몸이 늙어가는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국,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좋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젊었을 때처럼 빨리 달리지 못하고 우리의 심장도 튼튼하지 못하다. 우리는 천천히 낡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병으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완전히 낡아질 수 있으며, 그때가 되어 하나님이 천국의 본향으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의 영은 우리의 몸을 떠나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왜 당신이라고 안 되겠는가?

 


[1]북미의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이 주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소위 신자들에 의해 큰 저항을 받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그분의 치유사역에 대한 저항과 불신을 만나셨다(막 6:1-6을 보라).

[2]일부 사람들은 불신에 매달리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잡으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저녁에 사람들을 치유하심으로 이사야서 53:4의 말씀을 완전히 성취하셨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사야는 예수님이 상하신 것이 우리의 죄악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말하였다(사 53:4, 5을 비교하라). 예수님은 질고를 지신 사람들의 죄악때문에 상하셨다. 따라서, 마태는 가버나움에서의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그분이 우리의 죄악과 질고를 담당하실 이사야서 53장의 메시야임을 입증한다는 것만 나타냈다.

[3]예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이 치유하신 혈루증에 걸린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막 5:34)고 말씀하셨다. “구원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sozo)는 신약성경에서 열 번 나타나는데 그 중 여덟 번은 “구원” 또는 “구원받았다”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5에서 같은 단어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번역되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인 치유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장 많이 번역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