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장 (Chapter Twenty-Six)

금식(Fasting)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 또는 음료를 먹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성경은 금식한 사람들의 많은 사례를 기록했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 기간에 모든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특정 음식만 먹지 않았다. 후자의 예는 다니엘의 3주 동안의 금식이 될 것이다. 그는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단 10:3).

성경에는 또한 음식과 물을 모두 금식한 사람들의 예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금식은 매우 드물며 3일 이상 지속하는 경우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세가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아래에 있었으며 자신의 얼굴이 광채가 나기까지 하였다(출 34:28-29을 보라). 그 번의 금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번째 사십 일 금식을 반복하였다(신 9:9, 18을 보라). 그가 했던 두 번의 금식은 매우 초자연적이기에 아무도 이 점에서 모세를 모방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이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않고 며칠 이상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수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몇 주 동안은 생존할 수 있다.

금식하는가? (Why Fast?)

금식의 주요 목적은 기도와 주님을 구하는 데 여분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통해 제공되는 혜택을 얻기 위함이다. 성경은 기도를 떠난 금식을 언급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금식만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1]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두 번의 금식은 모두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행 13:1-3).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단순히 “주를 섬겨 금식하였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예언과 계시를 받고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의 첫 선교여행에 보냈다.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의 새로운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

아마도 이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하신(눅 6:12을 보라) 모범을 따라 했을 것이다.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한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할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데 금식은 이런 기도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줄 수 있다. 만일 신약 성경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잠시 동안 분방할 것을 권하였다면(고전 7:5을 보라), 우리는 잠시 동안 금식하는 것이 똑같은 목적을 위함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2]

따라서 우리가 영적인 의사결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금식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많은 다른 필요를 위한 기도를 위한 금식은 상대적으로 짧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도하심을 위한 기도는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왜나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종종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잘못된 욕망이나 동기, 또는 헌신의 부족과 싸우기 때문이다.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연장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경우 금식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냥 좋은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 준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금식이 기도와 결합되어 있는 한, 그것을 우리의 영적인 힘과 효과성을 위한 훌륭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초기의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음”(행 6:4)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그들의 영적인 힘과 효과성의 비밀의 일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부 잘못된 금식 이유(Wrong Reasons to Fast)

우리가 새 언약에서 금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적 이유를 확립한 이상, 금식에 대한 몇 가지 비성경적인 이유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실 가능성을 높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 응답의 주요 방법은 금식이 아닌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1:22을 보라). 금식은 “하나님의 팔을 비트는” 수단이거나 하나님께 “당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굶어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금식이 아니라 단식 투쟁이다! 다윗이 밧세바가 낳은 그의 아픈 아기를 살려 주시기를 며칠 동안 기도하였으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금식은 그의 상황을 개변시키지 못했다. 다윗은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가 살 것이라는 아무런 약속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보여주듯이, 실제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도와 금식을 하였다.

금식은 부흥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 아무도 부흥을 위하여 금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사도들은 단순히 예수님께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만일 한 성이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께 순종하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갔다(눅 9:5; 행 13:49-51을 보라). 그들은 그곳에 머물며 “영적인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흥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나 금식 기도가 복음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유익이 되며 그들로 하여금 부흥을 위한 효과적인 일꾼이 되게 한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의 영적 거인들은 모두 기도와 금식의 습관을 가진 사람들임을 볼 수 있다.

금식한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먹으려는 욕구는 갈라디아서 5:19-21에 나와 있는 명백한 “육체의 소욕”과는 달리 합법적이며 죄가 아닌 욕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금식은 자기를 다스리는 훈련이며, 이 같은 미덕은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데에도 필요하다.

자신의 영성을 증명하거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광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금식은 시간 낭비이며 위선의 표시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이유이며,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비난하셨다(마 6:16; 23:5을 보라).

어떤 사람들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금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사탄을 대적하면, 그들은 우리를 피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약 4:7, 벧전 5:8-9을 보라). 금식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귀신들은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이 말씀은 단지 귀신 들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 사탄의 개인적인 공격에 대적함으로써 승리를 얻어야 할 모든 신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금식으로 마귀에 대해 더 큰 권한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능히 고치지 못함을 들으신 후, 처음 하신 일이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신 것임을 기억할 것이다(마 17:17을 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자기들이 실패했는지를 물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마 17:20을 보라). 그분은 또한 각주로 “이런 종류의 귀신들은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쫓아낼 수 없다”(마 17:21)라고 추가하셨을 수 있다. 내가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각주의 방식으로 추가하셨을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이 마태복음의 원문에 포함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성경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 the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높이 평가받고 있는 영문 번역본)의 여백에는 대부분의 마태복음 원문에는 그런 말씀이 없다고 씌어 있다. 그 뜻인즉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귀신들은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쫓아낼 수 없다”라는 말씀을 가능하게 하신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영어권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의 여러 가지 번역본을 읽을 수 있는 혜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언어로 된 많은 성경 번역본은 원래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을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400여 년 전에 번역된 킹 제임스 버전을 번역한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의 여백에는 많은 사본에는 “그리고 금식”이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 말씀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한 사람이 모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신 것처럼(마 10:1을 보라) 한 사람에게 그런 권능을 주셨다면, 그 사람은 이미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식하는 것이 자신의 권능을 더 늘려줄 수 없다. 물론, 금식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함으로써 영적인 민감성을 높아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 안에서 아마 믿음도 커가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실제로 종류의 귀신들에 대해서만 그러한 말씀을 하셨음을 명심하라.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특정 종류의 귀신들을 쫓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은 성공적으로 다른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눅 10:17을 보라).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에 대한 사탄의 공격을 이기기 위해서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금식에 관한 지나친 강조(Overemphasis Regarding Fasting)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게도 금식을 하나의 종교로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지배적인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 서신에서는 단 한 번도 금식을 언급한 적이 없다.[3] 신자들에게 금식을 어떻게 하고 언제 해야 할지에 대해 가르친 적이 없으며 금식할 것에 대한 격려도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금식이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금식은 더 자주 언급되었다. 가장 많이는 한 사람이 죽었을 때와 같이 애도의 기간이거나 회개하는 기간, 혹은 국가적인 또는 개인적인 위기 때 하는 절박한 기도와 연결되었다(삿 20:24-28; 삼상 1:7-8; 7:1-6; 31:11-13; 삼하 1:12; 12:15-23; 왕상 21:20-29; 대하 20:1-3; 스 8:21-23; 10:1-6; 느 1:1-4; 9:1-2; 에 4:1-3, 15-17; 시 35:13-14; 69:10; 사 58:1-7; 단 6:16-18; 9:1-3; 요 1:13-14; 2:12-17; 욘 3:4-10; 슥 7:4-5을 보라). 나는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금식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구약 성경은 또한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더 중요한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금식에만 치중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8:1-12; 슥 7:1-14을 보라).

물론, 예수님은 금식을 지나치게 조장시켰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금식하지 않는다고 바리새인들에게 비난 받으셨다(마 9:14-15을 보라). 그분은 그들이 더 중요한 영적인 일들보다 금식을 더 중히 여김을 꾸짖으셨다(마 23:23; 눅 18:9-12을 보라).

반면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금식할 것을 분부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그들이 정기적으로 금식할 줄을 예상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분은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금식에 대해 보상하심을 약속하셨다. 그분 자신도 어느 정도 금식하셨다(마 17:21을 보라).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올 것이며 그 때는 바로 그분이 그들을 떠나실 때라고 말씀하셨다(눅 5:34-35을 보라).

얼마나 오랫동안 금식해야 하는가?( How Long Should One Fast?)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성경에 기록된 사십 일 동안의 금식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모세가 두 번 사십 일 동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금식한 것을 살펴보았다. 엘리야도 사십 일 동안 금식하였으나 그는 미리 천사가 주는 떡을 먹었다(왕상 19:5-8). 예수님 사십 일 동안의 금식에도 매우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초자연적으로 성령님에 의해 광야로 인도받으셨다. 그분의 금식이 끝날 무렵 사탄의 초자연적인 유혹을 경험하셨다. 또한, 금식이 끝날 때에 천사들이 그분의 수종을 들었다(마 4:1-11을 보라). 사십 일 금식은 성경의 규범이 아니다.

만일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한 끼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그는 금식한 것이다. 금식을 단지 금식한 날 수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두 번의 금식은 분명히 긴 시간의 금식이 아니었다(행 13:1-3; 14:23을 보라). 그것은 단지 한 끼의 금식일 수 있다.

금식은 주님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하므로 나는 당신이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금식하여 당신이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받을 때까지 하기를 권장한다.

금식은 하나님이 당신께 말씀하시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금식은 단지 성령님에 대한 당신의 민감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당신이 금식하는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어려움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분별해내는 것이다.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Some Practical Advice)

금식은 일반적으로 인체에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금식함으로써 사람들은 연악함, 피로, 두통, 메스꺼움, 현기증, 복부 경련 등을 경험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커피, 차 또는 다른 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면, 이러한 증상 중 일부는 카페인 섭취를 중단한 데 있다. 이런 경우에 속한 사람들은 금식하기 며칠 전부터 그런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만일 한 사람이 정기적 또는 반 정기적으로 금식하다 보면, 그는 보통 적어도 처음 두 주에 어느 정도 연약함을 경험하게 되지만, 점차 자신의 금식이 쉬워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금식할 때 탈수하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금식을 멈출 때에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금식했을수록 멈출 때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의 위장이 사흘 동안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지 않았다면,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을 섭취하여 금식을 멈추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다. 그는 소화하기 쉬운 음식과 과일 주스로 시작해야 한다. 긴 시간의 금식은 소화기계통이 다시 먹는 것을 조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하게 하지만, 한 두 끼의 금식은 특별한 조정 기간이 필요 없다.

일부 사람들은 적당한 금식은 실제로 우리 몸의 건강을 증진하는 수단임을 확신하는데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 나는 아픈 사람들이 금식하면서 치유받았다는 증언을 많이 들었다. 금식은 몸을 휴식시키고 정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아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첫 번째 금식 때 가장 힘들어 할 것이다. 금식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인체 내의 정화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할 수 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2~4일 동안 금식하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배고픔이 다시 시작하는 것은(보통 몇 주 후), 조심스럽게 금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체가 저장된 지방을 다 활용하고 이제는 필수적인 세포를 활용하는 기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 주리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마 4:2을 보라).

 


[1]나는 이레 동안 금식했지만 아무런 영적인 혜택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영적인 목적이 없었고 기도하는데 여분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킹 제임스 버전의 고린도전서 7:5에서는 부부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구절을 번역한 대부분의 현대 영어 번역본은 금식을 언급하지 않고 기도만 언급했다.

[3]유일한 예외는 고린도전서 7:5에서 결혼한 부부의 금식에 대한 바울의 언급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영어 번역본 중에서 이것은 다만 킹 제임스 버전에서만 발견된다. 비자발적인 금식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 27:21, 33-34, 고린도전서 4:11과 고린도후서 6:5; 11:27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