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Chapter Eight)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제자를 삼고, 그들을 그리스도 모든 계명에 순종하게끔 가르치려는 소망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매우 깊은 관심을 둘 것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이며, 그분의 계명으로 가득 찼다. 제자 삼는 사역자라면 예수님이 설교 중 명령하신 모든 것을 자신이 순종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그 설교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나눌 것이다. 나는 사역자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강해식으로 가르치기를 권장한다. 바라건대, 내가 쓴 것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의 것은 산상수훈의 윤곽인데, 우리에게 전반적인 개관을 보여주고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I.)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5:1-2)

II.) 서론(5:3-20)

A.)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과 축복(5:3-12)

B.) 계속해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훈계(5:13-16)

C.)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5:17-20)

III) 설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라(5:21-7:12)

A.)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 사랑하라(5:21-26)

B.)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5:27-32)

C.)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5:33-37)

D.)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5:38-42)

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5:43-48)

F.)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6:1-18)

1.) 올바른 동기로 구제하라(6:2-4)

2.)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라(6:5-6)

3.)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6:7-15)

a.) 기도에 관한 지침(6:7-13)

b.) 용서의 필요성(6:8-15)

4.) 올바른 동기로 금식하라(6:16-18)

G.)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재물을 섬기지 말라(6:19-34)

H.) 형제의 작은 결함을 비판하지 말라(7:1-5)

I.) 감상할줄 모르는 자들과 진리를 담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7:6)

J.) 기도에 대한 격려(7:7-11)

IV) 결론: 설교의 요약

A.) 요약 문(7:12)

B.) 순종에 대한 훈계(7:13-14)

C.)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자를 알아내는 방법(7:15-23)

D.) 불순종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요약(7:24-27)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Jesus Gathers His Audience)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가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2).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와 산에 올라가심으로 그분의 청중들의 크기를 줄인 것 같다. 우리는 “제자가 나아왔다”는 것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도 그분의 말씀을 듣기에 굶주린 사람들만이 그분을 따라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7장 28절을 보면 그들을 “무리”라고 표현했다.

그 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셨는데, 처음부터 우리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어떤 특징을 소유하면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셨다. 왜냐하면, 그런 특징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한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것이 곧 그분 설교의 전반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5:3-12의 말씀을 팔복이라 하는 데 모두 이 주제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들의 부동한 특성들을 열거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구체적인 축복들을 약속하셨다. 무심한 독자들은 종종 각 그리스도인은 팔복중의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세심한 독자들은 예수님이 서로 다른 축복을 받게 될 부동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열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진정한 신자들이하나의 포괄적인 미래의 축복인 천국을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심을 인식한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다른 방법의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3-12).

축복과 성격특성(The Blessings and Character Traits)

먼저, 약속받은 모든 축복을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은 (1)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고, (2) 위로를 받을 것이고, (3)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고, (4) 배부를 것이고, (5)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고, (6) 하나님을 볼 것이고, (7)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8)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다(첫 번째 약속을 반복함).

예수님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셨을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지만, 둘 다 하나님이 나라는 상속받지 못할까? 화평케 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할까? 이것들은 분명히 잘못된 결론일 것이다. 따라서 오직 약속받은 많은 축복은 하나의 큰 축복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 안의 다양한 축복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이 안전하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묘사한 서로 다른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1) 심령이 가난하고, (2) 애통하고, (3) 온유하고, (4)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5) 긍휼히 여기고, (6) 마음이 청결하고, (7) 화평하며, (8)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한 사람이 마음은 청결하지만, 무자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실까? 한 사람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 없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들은 모든 복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분명히, 팔복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의 성격특성을 묘사한다. 그런 성격특성을 제자들에게 열거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은 구원받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복이 있는 사람들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현재, 그들은 받고 있는 고통 때문에 스스로 축복받았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은 그들에게 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묘사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천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제자 삼는 목사들은 그들이 목회하고 있는 무리 내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점을 알게 할 의무를 느껴야 한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The Character Traits of the Blessed)

복이 있는 사람의 8가지 성격특성은 해석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도덕적 미덕을 드러내는가? 나는 예수님이 구원받는 사람이 소유해야 할 첫 번째 필요한 특성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그는 반드시 자신의 영적 빈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구원받기 전에 반드시 구주에 대한 그의 필요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청중들 사이에는 바로 그런 자신의 불쌍함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의 교만한 자들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복된 가!

첫 번째 특성은 모든 구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하나님께 드릴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기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누구도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아니, 만일 사람들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천국의 축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이룩하신 일 때문이다. 매번 내 삶 속에 있는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볼 때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이룬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내안에서 이루신 일을 생각나게 한다.

애통하는 자(The Mournful)

만일 첫 번째 특성이 제일 먼저 나열된 이유가 그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제일 필요한 특성이라면, 아마도 두 번째 특성도 의미 있게 나열된 것 같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예수님께서 진심의 회개와 양심의 가책을 묘사하고 계셨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7:10을 보라).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말씀하신 슬픔에 잠긴 세리가 바로 이런 종류의 복이 있는 사람의 예이다. 그는 성전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울부짖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하나님께 자랑하스럽게 기도하던 인근의 바리새인과는 달리, 그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야기에서 세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바리새인은 아니었다(눅 18:9-14을 보라). 나는 예수님의 청중들가운데 성령님의 질책을 받고 애통하는 자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곧 성령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분께 나아오는 회개 한 사람들이 처음 느끼게 되는 애통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분은 진정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지속적으로 대면하면서 느끼는 슬픔을 설명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2)고 표현하였다.

온유한 자(The Gentle)

세 번째 특성인, 온유함은 성경에서 또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었다(갈 5:22-23을 보라). 온유함은 자체생성 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온유하게 변화 받도록 축복받았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의인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새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고, 폭력적인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 중 속하지 않는다.

의에 주린 자(Hungering for Righteousness)

네 번째 특성인,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것은 모든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이 소유한 하나님이 주신 내적 갈망이다. 의에 주린 자는 이 세상과 자신한테 남아 있는 모든 불의를 슬퍼한다. 그는 악을 미워하고(시 97:10; 119:128,163) 의를 사랑한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정의란 단어를 읽을 때마다, 자주 즉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한 법적인 입장”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게 살아가려는 소질”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분명히 그러한 의도로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굶주려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를” 확신이 있는데(마 5:6), 그것은 그들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빌1:6).

여기서 예수님은 “의가 있는 곳인”(벧후 3:13) 새 땅의 시간을 예견하셨다. 그때가 되면 죄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 우리는 배부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진심으로 된 기도는 모두 응답받을 것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마 6:10).

긍휼히 여기는 자(The Merciful)

다섯 번째 특성인 긍휼도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그들안에 살아계시는 자비의 하나님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유하고 있는 미덕이다. 긍휼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했고,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사도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라고 말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면, 당신은 그가 가야 할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가?[1] 답은 분명하다.

어느 한 번, 예수님은 주인에게 큰 긍휼을 받은 하인이 그의 동료 하인한테는 긍휼을 베풀지 않은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주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모든 이전에 탕감받은 빚은 다시 계산되었다. 그 후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처럼 하시리라”(마18:35)고 그분의 제자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용서받은 죄를 다시금 계산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을 때까지 고문당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The Pure in Heart)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의 여섯 번째 특성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단지 겉으로만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은 청결해졌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은 자신의 묵상과 동기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을 약속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하고도 천국에 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실까? 아니, 분명히 모든 진정으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이라면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s)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모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갈 3:26),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다.

첫째로, 전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을 보라).

둘째로, 그들은 될수록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그들에게는 분쟁과 싸움이 적다. 바울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갈 5:19-21을 보라). 진정한 신자들은 싸움을 피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십 리를 더 걸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형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마 5:23-24; 요일 4:20을 보라).

셋째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화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마도 산상수훈의 이 말씀 때문에 야고보가 이렇게 썼을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박해를 받은 자(The Persecuted)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은 자들을 축복하셨다. 물론, 그분은 단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들에게 전가 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불신자들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박해를 말씀하셨을까? 고문? 순교? 아니, 그분은 특별히 그분의 연고로 모욕당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시 한 번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신자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그들을 향해 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소위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하나도 구별되지 않음으로 하여 한 명의 불신자도 그들을 대적하여 말하지 않을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처럼 하였느니라”(눅 6:2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가짜 신자임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요 15:18-21; 갈 4:29; 딤후 3:12; 요일 3:13-14).

소금과 빛(Salt and Light)

일단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확실히 천국을 상속받을, 변화 받고 축복받은 사람들에 속한다고 보증하셨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 대한 경고이다. 영적 염소들에게 그들은 영원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보증하는 수많은 현대적인 설교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복이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자신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의 제자들을 충분히 사랑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소금이 되거나 빛이 되라고 훈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소금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맛을 잃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빛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빛을 숨기지 말고, 계속하여 비추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했던 수많은 설교와 다르다. 만일 한 사람이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시대에, 소금은 고기의 방부제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을 완전히 썩어가고 부패해지는 데로부터 보존해 준다. 하지만, 우리의 행함이 이 세상과 같아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 쓸데없어”(13절)질 것이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자들에게 맛을 잃지 말고 자신의 유일한 특성을 보존하기를 경고하셨다. 그들은 반드시 주위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맛을 잃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들이 뒤로 후퇴하지 말라는 신약 성경의 여러 분명한 경고 중의 하나이다. 만일 소금이 진짜라면, 짠맛을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답게 행동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도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는 또한, 세상의 빛이다. 빛은 항상 빛난다. 만일 빛을 낼 수가 없다면 빛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빛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상징한다(마 5:16). 예수님은 착한 행실이 없는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억지로 짜내라는 뜻이 아니라, 착한 행실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들안에서 행하셨기에 그들이 착한 행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하심과 우리의 그분과의 동역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구든지 거룩하여지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The Law’s Relationship to Christ’s Followers)

이제 우리는 새로운 단락을 보도록 하겠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의 대부분의 나머지 설교말씀에 대한 서론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는 그분의 청중들을 경고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분의 청중 중 일부가 확실히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왜 이러한 가정을 했는지를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일부 사람들을 미혹하여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게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격한 질책일 것이다.

어쨌든지,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이러한 가정의 오류를 인식하기를 명확하게 원하셨다. 그분께서 전체 구약 성경을 묵시하셨기에, 그분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절대로 폐할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까? 일부는 예수님께서 단지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성취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확실히 모든 메시아의 예언을 성취하셨지만(또는 하실 것이지만), 그분께서 뜻하신 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맥을 보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모든 율법과 선지서에 의해 쓰인 “일점 일획”(18절)과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19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

기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적인 삶과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다고 추측한다(롬 8:4을 보라).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참조점으로써 그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그분은 율법은 적어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우리와 관련이 있으며, “다 이루어 질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참조 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에 비해 훨씬 후의 일이다. 그 후 그분은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심지어 그들의 천국에서의 위치에도 영향을 미친며(19절),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20절).

물론, 메시아 예언, 유형, 율법의 그림자,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성취하는 것 외에도,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들이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선지자의 말씀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고 원래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완전하게 하고, 율법을 완전하게 긍정하고 해석하며, 율법에 대한 청중의 부족한 이해를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2] 17절에서 완전하게 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온전하다, 이루다, 충만하다, 다 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시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네 구절 뒤부터 실현하시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충만할 때까지 완전하게 하셨다.” 내가 산상수훈의 이 부분을 가르칠 때, 종종 사람들에게 물이 절반 담긴 컵을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의 예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이 말을 할 때, 나는 물이 절반 담긴 컵의 물을 쏟아 버릴 것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그분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위해 오셨다(이때 나는 물 한 병을 가져다가 그 컵이 찰 때까지 물을 붇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뜻하셨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Keeping the Law)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더는 강하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가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셨다. 그것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사실, 사람들이 계명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천국에서의 그들의 상태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19).

그리고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이전 구절과 연결된 결론적인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할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견지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다면 그의 구원을 보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의를 말씀하셨을까?(Of What Kind of Righteousness Was Jesus Speaking?)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는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법적인 의를 말씀하셨을까? 아니,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키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이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이 말씀의 전후 구절(그리고 전체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의롭게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기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죄하시면서 같은 죄를 지은 그분의 제자들은 정죄하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구원받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3]

우리의 문제는 율법주의자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의 명백한 의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가한 의와 우리의 행위상의 의가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해했으며 이렇게 썼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요일 3:7). 또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과 의롭게 사는 사람의 상호관계를 몰랐지만, 요한은 알고 있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예수님은 5장 20절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추가하실 수 있었다, “만일 너희가 회개하고,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산 믿음으로 내가 주는 의를 받게 되며, 네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역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거룩해질까?(How to be Holier than the Scribes and Pharisees)

5장 20절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확히 어느 정도로 의로운가? 그 대답은, 별로이다.

다른 한 번, 예수님은 그들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하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잘 지키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종종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말씀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고치기까지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본질적인 결함은 실제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남은 부분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잘 알려진 계명들을 많이 인용하셨고, 인용하신 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영적으로 순종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반복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가르침과 위선을 폭로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향한 진실한 기대를 밝히셨다.

예수님은 매번 예를 드시기 전마다 “너희가 들었으나”란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구약성경을 가능하게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단지 회당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듣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분의 청중들이 모든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만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만 들어왔고, 그들의 거짓된 삶만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를 사랑하라(Love Each Other,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의 여섯 번째 계명을 시점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와 동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먼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경고하신 점을 유의하라. 그것은 그분의 주제인데 바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섯 번째 계명을 인용하며 살인을 반대하였는데, 살인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함을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식하지 못한듯한 “작은” 위반도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게 하고 싶으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두 번째 큰 계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화를 낼 때에는 우리 자신이 벌써 하나님의 법정에서 정죄당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형제에게 악한 말을 하여 분노를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죄는 더욱 심각해지며, 하나님의 최고 법정에서 봤을 때 자신은 이미 유죄 선언을 받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보다 더하여, 재차 악한 말로 형제에게 증오를 뿜어 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지옥에 던져질만큼 충분히 죄를 지은 것이다.[4]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우리와 형제와의 관계에 의해 보아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요한은 이렇게 썼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자와 화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마 18:15-17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 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것은 우리가 형제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3-2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것은 사소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서로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의 중요성은 무시한다. 예수님의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을 경고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 심판의 엄중성을 말씀하셨다.

너는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하나님의 법정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형제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우리에게 화를 냈을 때, 우리가 “법정으로 가는 길” 곧 하나님의 앞에 설 때까지, 삶 속에서 그들과 화해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23-35에서 나오는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종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용서받았지만, 용서하기를 거부한 그 종은 빚을 다시 갚도록 되었으며, 그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겨졌다(마 18:34). 여기서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서운 영원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Be Sexually Pure,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일곱째 계명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예의 주제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성적으로 더 순결하기를 바라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7-30).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유의하라. 그분은 지옥과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해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곱 번째 계명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겉으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한 척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한다. 그들은 시장에서 여자들을 보면 옷을 벗은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간음했으며, 따라서 일곱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어겼다. 오늘날 교회 안의 상황은 얼마나 다를까?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완전히 순결하기를 바라신다. 분명한 것은, 만일 이웃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의해 요구된 것에 더 엄격한 법을 추가하지 않으셨다. 열 번째 계명은 명확하게 정욕에 대한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예수님의 청중 중에 정죄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아마 있었을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했야 했는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그들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정욕에 빠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음행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음욕을 품은 사람들의 눈을 뽑아 내버리거나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음욕을 품어 한눈을 뽑힌다 해도 그는 애꾸눈인 호색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극적이고 엄숙하게 일곱 번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셨다. 영생은 그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찍어 내버리라고 훈계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케이블 TV라면, 케이블 연결을 끊어야 하고, 그것이 일반TV라면, 텔레비전을 제거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구독하고 있는 잡지라면, 구독을 취소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인터넷이라면, 인터넷 접속을 끊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열려 있는 창문이라면, 닫아야 한다. 그런 일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야 할 가치가 없으며,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양 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경고할 것이다.

간음의 또 다른 방식(Another Way to Commit Adultery)

예수님의 다음 예는 우리가 금방 고려했던 내용과 많이 관련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다음 순서에 언급했을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주제보다 오히려 앞의 주제에 대한 진일보 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방식의 간음”이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

다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하여 자기들의 죄로 물든 삶의 방식에 부응시킨 예이다.

예수님 시절의 바리새인을 상상해보자. 길 건너편에 그가 음욕을 품은 매력적인 여자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 그녀를 볼 적마다 그녀와 새롱거린다. 그녀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고, 그녀를 향한 그의 정욕은 날로 불타오른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어하고, 정기적으로 그녀에 대한 성적환상을 한다. 오, 그가 그녀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는 결혼했고, 그의 종교는 간음을 금지한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고 싶지 않다(비록 그가 매번 음욕을 품을 적마다 이미 계명을 어겼지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만일 그가 현재의 배우자와 이혼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연인과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을 하는 것이 합법적일까? 동료 바리새인은 그에게 “합법적이다“고 말해준다. 그것에 대한 성경 말씀도 있다! 신명기 24:1을 보면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혼은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은 무엇인가? 그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본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아! 그는 아내에게서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그녀는 길 건너편의 여자만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억지스러운 예가 아니다. 예수님 시절 이혼에 대해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을 주었던 랍비 힐레에 따르면, 한 남자는 자기의 아내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합법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다른 매력적인 여자가 현재 아내로 하여금 그의 눈에 “수치스럽게” 보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랍비 힐레는 또한, 만일 아내가 그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거나,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면, 그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음욕을 품은 바리새인은 아내에게 필요한 증서를 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으며 환상 속의 여인과 빨리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한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부동한 관점(A Different View)

물론, 하나님은 사물을 부동한 관점으로 보실 수 있다. 그분은 결코 신명기 24:1-4에 언급된 “수치되는”일이 실제로 무엇이며, 심지어 그것이 이혼을 위한 정당한 이유인지 여부를 규정하신 적이 없다. 사실, 그 단락은 이혼이 합법적인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 단락에는 두 번 이혼하거나 한 번 이혼한 과부가 그녀의 첫 남편과 재혼하는 것에 대한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단락의 말씀만 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되는”일은 이혼을 합법화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강제적으로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가 금방 묘사한 가상의 사람은 간부와 차별이 없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었다. 사실, 그는 일반적인 간부보다 더 간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중간음”을 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먼저, 그는 자신한테 간음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나중에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라”(마 19:9)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의 이혼당한 아내는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남편을 찾아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께는 바리새인이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게끔 강요한 것으로 보이신다. 따라서, 그는 그녀가 “간음”[5]하게 한 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마5:32,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그의 전 부인의 새 남편이 범한 “간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6]예수님은 그 음탕한 바리새인을 “삼중 간음”으로 고소하실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시절에 이것이 뜨거운 논쟁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혼에 대한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 반드시 더 말해야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직 거듭나기 전에 이혼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훌륭한 짝을 찾아 결혼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간음에 해당되 않는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면, 죄인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더는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지금부터 우리는 이렇게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혼 했다면, 당신은 재혼하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간음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간음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만일 당신이 이혼한 재혼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한 번 더 죄를 범하고 현재 배우자와 이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하여 간음하며 살게 되고 간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7]이것이 복음이란 말인가?[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Be Honest,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세 번째 예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의한 행위 및 성경 말씀에 대한 오용은 진실을 말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마태복음 23:16-22에서 보다시피 그들은 성전으로, 제단으로, 하늘로 맹세하면 자신의 맹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전의 이나, 제단 위의 예물이나 하늘 위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그들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들같이 손가락을 끼고 뒷짐을 지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신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33:37).

맹세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 계명을 보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라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항상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셨기에, 따라서 맹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맹세는 서약이나 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맹세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맹세는 아주 좋다. 구원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맹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그들이 거짓말한다는 간접적인 시인이다.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거짓말쟁이로 가득하며, 사역자들은 종종 거짓과 기만의 선두 주자들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정직한 모범을 보이고, 그의 제자들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는 요한의 경고를 알고 있다(계 21:8을 보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Don’t Take Revenge,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불만목록 중의 다음 항목은 구약 성경의 매우 잘 알려진 구절에 대한 바리새인의 남용이다. 우리는 이미 이 구절을 성경적 해석에 관한 장에서 살펴보았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모세의 율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면, 그는 그 피해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숴버렸다면, 공정성과 정의에 의해, 그의 이도 부서져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법정에서 주요 범죄에 대한 정의를 확보하기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라 법정과 재판관의 제도를 만드셔서 범죄를 억제하고, 정의를 확보하고, 원수를 갚는 것을 막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재판관은 공정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계명을 따르지만, 그 문구와 계명은 항상 법정에서 정의에 관한 구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한 번 계명을 왜곡하여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만들어 버렸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관용이라곤 전혀 없이,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원수를 갚으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항상 더 많은 걸 기대하신다. 원수를 갚는 것은 그분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신 것이다(신 32:35을 보라).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원수에게 자비를 보여줘야 한다고 가르친다(출 23:4-5; 잠 25:21-22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인을 상대할 때에는 한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대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갚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고, 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도록 허용하기를 기대하실까? 우리가 불신자들을 법정에 고소하고 우리에게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예수님은 법정에서 큰 범죄에 대한 정당한 정의를 취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침해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등을 찌른 사람에게 목을 졸라매도록 우리의 목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동차를 요구하면, 그 사람에게 집까지 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사소한 침해와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높은 수준의 관용과 자비를 보여줘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기를 원하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왜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쉽게 침해를 받는가? 왜 그들은 뺨을 맞는 것보다는 열 배나 더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이들은 과연 구원받았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다른 뺨을 돌려대는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Don’t Hate Your Enemies,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증오의 마음을 수용하기 위해 고쳐버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나열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고 말씀하셨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편리하게 이웃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은 다 원수라고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에 따르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응당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해야 함을 가르치셨다.[9]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위한 기준이며, 그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다. 그분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우리는 응당 그분을 본받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그같이 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마 5:45)임을 보여준다. 정통적인 거듭난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사랑은 감정이거나, 그들의 불의에 대한 승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대항하는 이들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배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정말 멋진 사람들이라고 거짓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고, 적어도 그들에게 문안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등 자원적인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를 강조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들이 모든 유대인의 보기에 지옥으로 갈 것 같은 두 부류의 사람인 이교도 이방인과 세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Do Good for the Right Motives,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거룩하기를 기대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거룩해지기를 기대하셨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도 만일 그의 순종이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면 여전히 그분을 매우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였기 때문이다(마 23:5을 보라).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은 다르기를 기대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기대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것을 명령하셨고(출 23:11; 레 19:10; 23:22; 25:35; 신 15:7-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팔을 불며 표면적인 구제를 하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모아 공개적인 배급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지 모른다. 그들은 구제해본 적이 없기에 그 동기를 점검해볼 필요조차 없다. 만일 이기심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제를 광고하게 했다면,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무시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3:10-15에서 되풀이한 것처럼, 우리는 잘못된 동기로 선행을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의 선행은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혔다(빌1:15-17을 보라).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처럼, 우리가 구제하는 동기가 순전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구제할 때에 될수록 은밀하게 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그들이 할 수 있다면) 가르치며, 그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조용하게 실천한다.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고 금식하라(Prayer and Fasting for the Right Reasons)

예수님은 또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기를 기대하시고, 그들이 그것을 하는 이유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기를 바라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지옥에 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유일한 이유는 매우 일시적인 보상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16-18).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금식해본 적이 없는지 모른다.[10]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잘못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기도와 용서의 주제로 돌아오다(A Digression Regarding Prayer and Forgiveness)

기도의 주제를 말씀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본제를 조금 벗어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한 것을 우리가 부정함으로 그분의 아버지를 모욕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간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의미한 반복을 할 이유가 없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진실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분이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함으로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거룩하여져서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범적인 기도에서 반영되는데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헌신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드러낸다.[1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9-11).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존경받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거룩해 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위선적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원을 반영한다.

모범기도의 두 번째 간구도 비슷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에 대한 생각은 그 나라를 지배하는 한 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제자는 그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땅을 지배하시는 그의 왕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 모든 사람이 순종의 믿음으로 왕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간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간구의 되풀이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진심으로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용 할 양식”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 이 네 번째 간구가 네 번째에 배치된 것은 그럴만 한 이유가 있다. 이 간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정확한 우선순위를 반영하며 탐욕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초점을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 네 번째 간구는 모범기도는 우리가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해야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모범기도는 계속하다(The Model Prayer Continues)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래로 죄를 짓지 않을까? 그들도 분명히 때로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2-15).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그들이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얼룩을 제거하려 하고, 고맙게도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용서를 구해야 하는 데 그것은 곧 주님의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이다.

그러나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조건으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용서받았기에 그들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해줄 의무가 있다(그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한다). 만일 그들이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인 간구도 분명히 진정한 제자가 거룩해지려는 소원을 반영하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거룩함을 추구하기에 하나님께 그가 유혹될 수 있거나 실족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빠질 수 있는 모든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악하고 유혹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왜 이 기도의 여섯 가지 간구가 적절한지를 이해한다. 그 이유는 기도의 마지막 줄에 공개되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왕이며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그분은 전능하시며 아무도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모든 영광은 영원히 그분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받을만한 분이시다.

주님의 기도의 지배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거룩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세워짐으로 하여 그분의 뜻이 모든 곳에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중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용서를 구한다.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른 사람도 용서해준다. 그들은 완벽하게 거룩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유혹을 피하기를 소원하는 데, 그것은 유혹은 그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커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자와 그의 물질적 소유(The Disciple and His Material Possessions)

산상수훈의 다음 주제는 물질의 축적을 삶의 주요동력으로 삼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보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보물은 보물 상자에 넣어서 어딘가에 보관되며 실제로 어떤 곳에도 사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것들은 좀벌레와 동록과 도둑을 끌어온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좀벌레는 우리가 자주 입는 옷이 아닌 옷장의 맨 끝 부분을 해한다. 동록도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해한다. 많은 선진국에서, 도둑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품, 보석, 비싼 장치, 그리고 저당 잡힐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들을 훔친다.

진정한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눅 14:33을 보라).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할 청지기이기 때문에 재물을 지출하는 모든 결정은 영적인 결정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면 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지를 보아낼 수 있다. 우리가 “보물”을 쌓아두며, 재물을 저축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주관하고 계시지 않음을 드러내는데, 만일 그분이 주관하셨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재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은 일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명령하셨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분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치를 잃고 쓸모없어지기 마련인 것들을 영원히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들에 투자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며, 그분 역시 제자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쁜 눈(The Bad Eye)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분의 말씀은 꼭 돈과 물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 후 구절에서 모두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장 23절에서 “나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악하게(부러워하는)”로 번역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한 주인이 한 품꾼에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또는 내가 후하니까 네 눈이 부러워하느냐)”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분명히 눈은 문자 그대로 부러워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러워 하는(또는 나쁜) 눈”이란 표현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6:22-23에서 의미하신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게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를 섬기며, 땅이 아닌 그의 마음이 있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닫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어둠으로 가득하며 거짓말을 믿는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있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며, 그의 삶의 목적은 자기만족이라고 믿는다. 돈이 그의 신이다. 그는 천국을 상속받지 못한다.

돈을 자신의 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할 자리에 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돈이 당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돈은 당신의 에너지, 생각과 시간을 소모한다. 돈만이 당신의 기쁨의 주요 원천이다. 당신은 돈을 사랑한다.[12]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은 탐하는 자와 우상 숭배자를 동일시하였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엡 5:5; 골 3:5-6을 보라).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라는 그분의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어둠으로 가득한 사람은, 돈을 신으로 삼고, 땅에 마음을 두고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고 있으며, 생명으로 통하는 좁은길로 가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탐욕스러운 가난한 자(The Covetous Poor)

사치품을 탐내는 것만이 사람들을 물질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기본 필수품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25-34).

이 책의 많은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당신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 마지막으로 염려해본 것은 언제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확실히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생활 필수품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쓰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필수품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은 얼마나 더 잘못된 것일까?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두 가지 일을 추구하는 데에 집중하기를 바라셨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자칭 그리스도인이 십일조(구약의 계명임)는 낼 수 없지만, 많은 필요하지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살수 있다면, 그는 과연 그리스도의 기준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계명대로 살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흠잡는 사람이 되지 말라 (Don’t be a Fault-Finder)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다음 계명은 비판과 흠 잡는 죄에 관한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록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은 확실히 그런 죄를 짓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 하였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경고는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그분의 뜻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자. 그분은 우리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을 하고 분별하지 말아야함을 의미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지시하셨다(7:6을 보라). 그분은 분명히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돼지와 개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들이 받은 “진주”와 같은 거룩한 것들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함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려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돼지나 개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거짓 교사(7:15을 보라)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검토하고 우리의 관찰을 근거로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누가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했는지가 분명하다(요일 3:10을 보라).

이 모든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니면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고 분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비판하는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형제의 작은 결함, 얼룩을 찾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예수님은 이 단락에서 형제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는다는 점을 유의하라).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명백한 결함을 관찰함으로 그들이 불신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지 않았다(왜나하면 그분은 그 부분에 대해 바로 이 설교에서 우리에게 곧 지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들은 서로의 흠을 잡으려 해서는 안되는데, 특별히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위선적이 된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위선적인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사도 야고보의 서신서는 산상수훈과 아주 유사한데, 그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아마도 이것 또한, 우리가 신자끼리 서로 흠을 잡고, 그것에 대해 서로 원망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것은 교회 속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죄 중 하나이며,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판단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동료 신자들을 비판하며,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한다면, 우리는 황금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없을 때 우리의 나쁜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료 신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데, 오직 우리가 위선이 없고, 우리가 대면하는 사람과 같은 죄(또는 더 심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와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마찬가지로, 잠언을 보면,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한다. 예수님은 딴 때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가 일단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개”들임을 분별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도 아직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분의 종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기도에 대한 격려(Encouragement to Pray)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데 그것은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으로 시작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 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 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아!” 어떤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산상수훈 중 이 부분의 말씀은 거룩함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중에 무엇을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지에 달려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기를 원하며, 그 갈망은 우리의 기도에도 확실히 반영된다. 사실 예수님께서 전에 이 설교에서 하신 모범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처럼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약속 하실 때 고급스러운 것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마음속으로 성령이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해 지게 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도와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

다른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의 뜻과 그분의 나라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쓰임받기 위해 하는 기도는 항상 응답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맺음말(A Summarizing Statement)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시점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요약하는 구절에 도착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놓치지만,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분명히 맺음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전의 가르침과 연결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들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얼마만큼 요약하고 있는가? 한 번 읽어보고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구절은 단지 그 전의 기도에 관한 몇 구절의 말씀에 대한 요약이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다.

예수님께서 설교 초기에 그분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기억하라(마 5:17을 보라). 그 시점부터 지금 도착한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약 성경의 계명들을 긍정하고 해석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지금 자신의 모든 명령을 요약하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란 문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7부터 7:12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연결시켜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설교를 마무리 짓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되풀이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분명히 찾는 자가 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구원의 상징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찾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은 지옥의 상징이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 전에 한 모든 말씀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고, 이 설교가 논리적으로 전개되었고, 예수님이 이성적으로 의사전달을 했다면, 좁은 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길을 의미할 것이다. 넓은 길은 정 반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 설교에서 묘사한 좁은 길에 서 있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당연히 좁은 길에 서 있으며, 그는 자기의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설교가 자칭 그리스도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구원과 멸망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믿음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설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믿음을 보여준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변화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인즉 그분의 거룩함이다.

거짓 종교 지도자를 분별하는 방법(How to Recognize False Religious Leaders)

예수님은 그분의 결론 발언을 계속하시면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이 분별없는 자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여 멸망에 이르게 함을 경고하셨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그런 것처럼 위장하지만 말이다. 모든 거짓 교사들과 지도자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5-23).

분명히 예수님은 거짓 교사가 매우 기만적임을 지적하셨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진실해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부르고, 선자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권능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탐욕스러운 이리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양이 아니다.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의 진정한 신분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권능의 열매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열매이다. 진정한 양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것이다. 가짜는 “불법을 행한다”(7:3).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그들의 삶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명령하신 것에 비교해 보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오늘날 교회 속에 편만해 있으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놀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가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이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해야 함을 미리 경고하셨다(마 24:11; 딤후 4:3-4을 보라). 우리 시대의 가장 널리 알려진 거짓 선지자는 천국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명이 영원한 지옥살이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존 웨슬리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하나님의 대사가 마귀의 대리인이 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만약 누군가 나에게 “왜,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수만 명의 현명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들은 교파를 불문하고 교만한 자, 빈들거리는 자, 정욕에 빠진 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의하거나 박정한 자, 안일하고, 부주의하고, 악의 없고, 쓸모없는 존재,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한, 사람을 배신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어두움의 세계로 끌어간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간 자들은 불쌍한 영혼마저 파멸된다. “지옥이 땅 밑에서 올라와 이들을 삼켜 버렸으면 좋겠다!”[13]

흥미롭게도, 웨슬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마태복음 7:15-23에서 경고하신 거짓 교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거짓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7:19을 보라). 또한, 이 말씀은 교사와 선지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제이다–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유의하라.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열매의 원천은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본성을 변화시켰다.[14]

마지막 경고 및 요약(A Final Warning and Summary)

예수님은 마지막에 하나의 경고 및 요약의 예로 그분의 설교를 결론 지었다. 당신이 예상한 것처럼, 그것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에 대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예수님의 마지막 예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에 대한 공식이 아니다. 문맥을 보면 그분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시기에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물질적인 번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행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살후1:9).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 to an Question)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그분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전에 살았던 그분의 추종자들에게만 적용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들은 율법아래 있음으로 임시적으로 구원 받았다가,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은 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설교의 주제를 폐하여도 되지 않을까?

이런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행위로써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구약 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항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구약 전)과 다윗(구약시대)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로써 의롭게 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청중들 중 아무도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 3:23).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계명을 단지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만으로 여김으로써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지금 우리가 “복음을 들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는 그분의 대부분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다시 꺼내서 사람이 얼마나 죄악스러운지를 보여주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 세계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고 일단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면, 내 계명은 그들의 삶에서의 목적을 다 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강조 추가).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로 그 일을 행한다.

 


[1]흥미롭게도, 야고보서의 그 다음 구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이다.

[2]비록 예수님이 의식법을 이루신 것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사람들이 “율법의 도덕적 측면”과 “율법의 의식적 측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약에서 왜 동물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선언 하셨기에 구약의 음식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막 7:19을 보라). 우리는 지상의 대제사장의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대제상장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의식법과는 달리, 도덕법의 어떠한 부분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전후에 예수님에 의해 변경된 것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덕법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또 긍정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행하였다.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은 모두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5:17-20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된 그분의 지속적인 계시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3]또한, 만일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선물로 전가 받게 되는 율법적인 의를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왜 그것에 대해 암시조차 하시지 않았을까? 그분은 왜 교육받지 못한 청중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들은 그분께서 전가한 의에 대해 말씀하실 줄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4]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예수님은 성경이 보편적으로 말씀하듯이(잠 1:7; 13:20을 보라)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다(마 23:17을 보라).

[5]물론, 하나님은 그녀가 재혼 할 때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지 않으셨다. 그녀는 단지 남편의 죄로 인한 피해자였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재혼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6]다시 한 번, 하나님은 그녀의 새로운 남편이 간음을 범했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이혼 당한 여자와 재혼하고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가 자기와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남편과 이혼하도록 부추긴다면, 그는 간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도 그런 죄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7]물론, 다른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원받지 못한 남편에게서 이혼 당한 그리스도인 여자가 그리스도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을 범한 것이 아니다.

[8]이혼과 재혼에 관한 장에서,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철저하게 다룰 것이다.

[9]어떤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물었다. 당신은 그가 이미 정답을 아는 줄로 생각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미움 받는 종족인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유대인에게 자신이 이웃임을 증명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에게 답하셨다(눅 10:25-37을 보라).

[10]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는 금식의 주제에 관해 전체 장을 통하여 다루었다.

[11]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적용하면,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기록 된 사도들의 많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12]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해 같은 말씀을 하셨으며 누가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눅 16:14)고 썼다.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바리새인들의 행함과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하게 폭로하셨다.

[13] The Works of John Wesley (Baker: Grand Rapids, 1996), by John Wesley, reprinted from the 1872 edition issued by the Wesleyan Methodist Book Room, London, pp. 441, 416.

[14]나는 이 기회에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변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과는 상반되게, 예수님은 여기에서 외적으로 들어나는 것이 내면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곳에서, 그분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 12:34)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미워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또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막 7:21-22)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한 사람이 간음을 범했을 때 우리는 그가 마음속으로도 간음을 범했음을 분명히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