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Chapter Five)

교회성장 (Church Growth)

당신이 목사라면 당연히 자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은 목회자들 사이에서 매우 일반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당신은 왜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마음속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교회가 성장함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존경받고 싶고 영향력 있다고 느끼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어서인가? 당신은 돈을 벌고 싶어서인가? 그것들은 모두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잘못된 동기들이다.

만일 당신은 교회가 성장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에 의해 변화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성장을 바라는 올바른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기가 실제로는 이기적이나, 순수한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진정한 동기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왕국을 지으려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다른 목회자들의 성공에 대한 우리 내면의 반응을 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다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그분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원하는데도 다른 교회의 성장을 들었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기나 질투를 발견한다면,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교회성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면 왜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동기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기적이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지역에서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을 때 우리 내면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보다 우리 자신의 왕국에 대해 더 관심이 있다는 표시이다.

대형 교회거나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도 이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동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들은 또한 자신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는 나의 교회가 작아질지라도 회중들 가운데서 주요 지도자들을 파견하여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교회를 구축할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대형 교회의 목사도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는지 자랑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자신한테 할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은 “나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가?” 또는 “나는 불과12~20명밖에 안 모이는 가정교회에서 목회할 의향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내 자존심을 너무 상하게 하는 것인가?”[1]

교회성장 운동(The Church Growth Movement)

미국과 캐나다 전역 기독교 서점에는, 교회성장에 관한 책들이 전반 선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진열되어 있다. 이런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은 전 세계에 퍼져가고 있다. 목사들은 교회의 출석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갈급해 있으며, 그들은 종종 교회건물의 크기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기에 성공적이라고 간주되는 미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의 조언을 채택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좀 더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출석인수와 건물 크기는 제자 삼는 사역의 질을 나타내는데 필수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일부 미국 교회들은 성경적인 진리를 왜곡하는 매력적인 교회로 말미암아 성장해 왔다. 나는 전 세계 많은 목사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들이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다고 선언하는 수많은 미국 목회자들에 의해 충격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미국 목회자들은 저렴한 은혜의 복음을 주장하며 사람들이 거룩함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꽤 많은 목사들은 번영신학을 주장하여 신앙을 이 땅에 더 많은 재물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탐욕만 부추긴다. 그런 목사들의 교회성장 기술은 절대로 모방애서는 안될 것이다.

나도 교회성장의 주제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들에 대한 내 느낌은 혼잡스럽다. 많은 책의 전략들과 조언들은 어느 정도, 그리고 성경적이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들은, 성경적인 교회모식이 아닌, 1,700년의 역사를 가진 제도적 교회 모식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제자와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이 아닌, 항상 큰 건물, 더욱 전문적인 교회의 직원들과 프로그램을 수요하는 개별적인 제도적 교회를 세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구조는 가족보다는 기업에 더 가깝다.

일부 현대적인 교회성장 전략은 숫자상으로 커지기 위해서는 교회 활동은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설교는 짧고, 긍정적이어야만 하고, 예배는 유형무실해야 하며, 많은 사회 활동을 벌리고, 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조언을 하고 있다. 이런것을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을수가 없다. 그것들은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지옥으로 향한 넓은 길에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들만 만들어 낸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려는 하나님의 전략 아니라 교회를 이기려는 사탄의 전략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이 아닌 더욱 “세속화” 되는 것이다.

구도자 맞춤형 모식(The Seeker-Sensitive Model)

가장 인기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전략은 종종 “구도자 맞춤형” 모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략에 의하면 주일 아침 예배는 (1)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을 편하게 느낄 수 있게끔 설계되어야 하고, 그리고 (2) 복음을 전할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또 관계있다고 느끼게끔 해야 한다. 주중 예배와 소그룹 모임들은 신자들을 제자훈련 시키기 위해 마련되어야 한다.

이 방법으로, 일부 개별 교회들은 매우 큰 성장을 이루었다. 미국의 제도적 교회들 중에서, 이런 교회들은 모든 사람이 소그룹모임에 소속되어 있고(종종 그렇지 않다) 제자훈련을 받는다면, 그리고 복음이 타협되지 않는다면(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 목표가 될 때에는 항상 복음과 타협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음은 인간의 자부심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전도하고 제자를 삼음에 있어서 가장 큰 잠재력이 있다. 적어도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은 대부분의 제도적 교회들에서 갖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가기 위한 전략들을 실천해가고 있다.

하지만 교회성장에 있어서 미국의 구도자 맞춤형 교회모식은 성경적인 모식과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른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표적과 이적이 함께 있었는데 이것은 불신자들의 주의를 끌었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고, 정기적으로 집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영적인 은사들을 행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하고, 함께 기도하였는데 모두 장로/목사/감독들의 인도하에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사들과 선지자들은 교회들을 돌아다녔었고, 모든 사람들은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나눴다. 교회의 성장을 늦추고,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쓰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빼앗는 건물은 어디에서도 짓지 않았다. 지도자들은 신학원에 보내지지 않아도 재직 중에 훈련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빠른시간내에 해당 지역의 모든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파되기까지 급속한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비교해보면,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일반적으로 표적과 이적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적인 전파방식, 흡인력과 확신이 결여되었다. 그것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건물에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자연적인 방식인 홍보 및 광고에 크게 의존한다. 설교자의 웅변 기술과 설득력은 사람들이 결단할 수 있는 관건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바울의 방법과는 어떻게 다른지 보자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더 많은 차이점들 (More Differences)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일반적으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없는데 그것은 목사가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복음전파의 역할에서 제거하고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교회성장을 이루는데 있어서 과연 더 좋은 방식일까?”[2]

구도자 맞춤형 목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격려하는 교회에서 매주 한 번씩 설교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아서는, 교회 속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복음을 한 번밖에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를 원해야 하고 또한 그들은 그들을 교회로 초대할 의향이 있는 교인들에 의해 초대받아야 한다. 성경적인 모식에서는,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공중장소에 및 개인적인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과 복음에 대해 나눈다. 이 두 가지 모식중, 어느 모식을 통하면 더 많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을까?

구도자 맞춤형 모식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초대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방문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수락할만한 교회건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항상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필요로 한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수락할만한 건물을 반드시 취득하거나 또는 건설해야 한다. 미국에서 그 건물은 반드시 부유한 교외의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 대조적으로, 성경적인 모식은 특별한 건물, 특수 지역이나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복음 전파는 주일날 특별한 건물이 용납할 수 있는 사람 인수에 제한되지 않는다.

아직도 더 많은 차이점들(Still More Differences)

일부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을 성경적인 모식들과 비교해보면, 심지어 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즉시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들은 회심과 함께 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33과 요한복음 8:31-32에서 말씀하신 제자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을 예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굉장히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분의 말씀안에 거하였고, 그들의 십자가를 졌으며, 그들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였으며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청지기가 되었다.

구도자 맞춤형 교회에서 자주 선포되는 복음은 다르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분이 어떻게 그들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임므로써”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 듣게 된다. 그들이 짧게 “영접기도”를 한 후에는,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며, 그들은 종종 자기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수 있는 단계를 밟았다고 확신한다. 만일 그들이 진짜 이런 단계에 가입한다면(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더 순종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종종 교회의 특정 교리에 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에 초점을 두고 체계적인 학습 과정을 밟는다. 이런 “제자훈련”프로그램의 절정은 신자가 결과적으로 교회에 자신의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바치기 시작할 때이며(헌금은 주요하게 은행 대부금 및 비 성경적인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고,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지원하고, 하나님이 정작 지원하시고자 하는 일들은 박탈하면서 청지기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가 제도적 교회에서 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한적이 없는 일부 지원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자신의 사역을 발견”했다고 믿게 될 때이다.

만일 당신의 나라에서 군대에 입대하려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려하고 있을 때 정부에서 “구도자 맞춤형”방식으로 대처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정부가 만약 누구든지 참군 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고 상상해보라 – 그들의 봉급은 공짜 선물이고, 노력 없이 받은 것이고, 공이 없이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 자신이 원할 때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은 군사훈련에 참가할 수도 있지만, 원한다면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도 있다. 만일 전쟁이 발발하면, 그 전투에 참여하거나, 원한다면 해변에 갈 수도 있다. 이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할까?

의심의 여지가 없이 군대의 인수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며, 그 사명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이 맞이할 결과이다. 기준을 낮추면 주일 출석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제자도와 순종은 좀 먹을 것이다. 구도자 맞춤형 교회들은 주일에는 “복음을 전파”하고 주중에는 “제자훈련”을 시키려고 시도하지만, 주중 모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들은 한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사람들은 주일 오전 예배에서 기편 당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들은 주중 모임의 사람들도 반드시 속여야 하는데, 바로 제자도와 순종은 천국에 가는 요구조건보다는 선택사항일 뿐이라고 말이다.[3]

나는 일부 제도적 교회에서 다른 제도적 교회와 달리 성경적인 모식의 측면을 통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관계없이, 성경적인 모식은 제자들과 제자 삼는 자들을 배가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왜 오늘날에는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지 않을까? 그에 대한 변명은 끝이 없지만,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전통, 불신앙, 그리고 불순종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모식이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성경적인 모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에서의 폭발적인 교회성장은 신자들이 성경적인 모식을 단순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하나님이 다른 곳에서는 다를까?

이 모든 것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미국의 교회성장 방법에 대해 미국 외의 목회자들이 조심해야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성경적인 모식을 추구했었다면 제자를 삼는 그리스도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여파 (The Aftermath)

나의 관찰에 의하면, 현대적인 교회성장 기법의 지지자들은 전 세계 일반적인 목회자들과 이탈되어 있다. 대다수 목사들이 목회하고 있는 회중 수는 백 명 미만이다. 그리고 이런 목사들은 그 교회성장 기법을 시도해보지만 효과 없거나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닌 역효과를 경험하면서 마음이 식어가고 있다. 아무도 목회자의 통제를 벗어난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요인들의 일부를 지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교회성장은 지역 인구의 크기에 제한 받는다. 가장 큰 제도적 교회들이 대도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종종 교회 회원으로 모을 수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숫자로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면, 교회의 크기가 아닌, 그 교회 회중들이 지역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판단해야할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열 사람을 가진 일부 교회는 만 명을 가진 교회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다. 오십 명이 사는 마을에는 열 명의 교인을 둔 교회는 오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에 있는 십만 명의 교인을 둔 교회보다 더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 열 명의 교인을 둔 목회자는 교회성장 대회에서 연설하도록 종래로 요청되지 않을 것이다.)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두 번째 요인(A Second Limiting Factor to Church Growth)

 

둘째, 교회성장은 특정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 속의 구도자들의 포화 정도에 의해 제한받는다. 어떤 특정 시간에, 한 지역에서 복음에 마음을 연 사람들의 인수는 어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일단 그 구도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이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른 교회로 옮기지 않는 이상(이것이 바로 많은 대형교회들이 그 지역 내의 다른 교회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성장하는 방식이다), 어떠한 교회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때는 복음을 거부했었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받아 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들이 받아들일 때면, 교회가 커질 수 있다. 복음을 거부하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여도 똑같이 부흥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작은 규모일 뿐이다. 모든 큰 부흥은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자게 시작하는 그날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한 성으로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실 때 그곳에서는 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을 줄을 이미 아셨다(눅 9:5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셨다. 그렇다면 그 제자들은 실패한 것일까? 아니, 비록 회심자가 없었지만(그리고 교회성장도 없었고), 그들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전히 마을, 도시, 그리고 교외로 목회자들을 보내시는데 그분은 그곳에서 작은 비율의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알고 계신다. 자신의 작은 교회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목회자들은 일부 교회성장 전문가들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공적이다.

모든 지역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그리고 그분의 사람들의 중보에 대한 응답으로, 그분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하신다는 사실에 의해 격려 받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들의 양심, 그분의 창조, 주위 환경, 그분의 일시적인 심판, 교회의 생명력 있는 증언,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질책을 통하여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심지를 굳건히 하여야 한다. 계속하여 순종하고 기도하며 설교하여야 한다. 모든 대규모 부흥이 있기 전에는 먼저 부흥에 대한 큰 수요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부흥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계속하여 꿈을 꾸라!

교회성장을 제약하는 세 번째 요인(A Third Limiting Factor to Church Growth)

개별적인 교회의 성장을 제약하는 세 번째 요인은 목회자의 능력이다. 대다수 목회자들은 대형교회를 감독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대형교회가 필요로 하는 조직력, 행정력, 설교기술과 교육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분명, 이러한 목회자들은 대형 교회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며, 그들은 평균 크기의 제도적 교회거나 가정교회 외의 다른 것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나는 최근에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를 목회하고 있는 담임목사가 쓴 지도력 주제에 관한 인기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현대 목회자들에 대한 조언들을 읽었을 때, 나의 머리를 제일 먼저 스쳐 지나간 생각은 “그는 우리에게 목사가 되는 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대형 제도적 교회 담임목사들에게는 다른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량의 동역자가 필요하며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모든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내가 읽었던 책의 저자는 대형 세속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되기에 충분히 숙련되어 있다(실제로, 그의 책에서 그는 종종 유명한 대형 기업관리 고문들을 조언을 인용하여 목회자독자들에게 적용하였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만일 대부분이 아니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리더십과 관리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큰 교회를 세우면서 그의 가족과 사역의 미래를 망칠 뻔 했던 치명적인 실수들을 여러 번 저질렀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똑같은 종류의 성공을 위해 애쓰다가 비슷한 오류를 범함으로 파선을 맞은 많은 다른 제도적 교회 목사들이 생각나게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교회에 자신을 헌신하였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잃었거나 결혼을 망쳤다. 일부는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사역에 있어서 심각한 저조기를 맞았다. 기타는 환멸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역을 포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그들의 초인간적인 희생에 의문을 품고 조용히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책을 읽을수록, 나의 마음속에는 현대적인 제도적 교회와 달리 한 목회자가 25명 이상의 양 떼를 담당하지 않는 초대교회의 지혜가 점점 강화되었다. 내가 이전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교회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역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만일 회중 수가 50명이 되면, 그들의 교회는 실제로 너무 커져 있을 수 있다. 만일 그들 중에 가능한 지도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제자를 삼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 건물을 팔고 교회를 세 개의 가정교회로 나누는 것을 기도하면서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급진적으로 보이면, 그들은 적어도 미래의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제자를 삼고, 소그룹을 시작할 수 있다. 만일 이미 소그룹들을 갖고 있다면, 그들 중 일부를 자율적인 가정교회로 풀어놓아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기타 현대적인 교회성장 기술(Other Modern Church-Growth Techniques)

구도자 맞춤형 교회모식외에 오늘날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홍보되고 있는 다른 기술들이 있다. 다른 기술의 대부분은 이 비 성경적이며 “영적 전쟁”에 분류된다. 그들은 “요새를 무너뜨리고”, “전쟁의 기도”, 그리고 “영적 지도”와 같은 이름들을 사용하여 선전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 중 일부를 영적 전쟁에 대해 이후 장에서 파헤쳐볼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했던 이러한 활동들이 왜서 오늘날에는 교회성장에 필수적이라고 간주되는지에 대해 궁금할 수 있다.

많은 새로운 교회성장 방법들은 “내가 이렇게 해보니까 내 교회가 성장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당신의 교회도 꼭 성장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몇 명의 목회자들의 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부인하겠지만, 교회의 성장과 그들이 했던 특정 일들 사이에는 실제 연결이 없었다. 이 점은 다른 목회자들이 그 독특한 가르침을 따르고, 똑같은 일을 한다 해도 그들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교회성장을 이룬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우리가 도시 안의 귀신들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기 시작했을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큰 소리로 귀신을 향해 꾸짖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왜서 도시 속의 귀신들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은 적이 없는데도 교회 역사를 보면 과거 이천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놀라운 부흥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목사가 부흥은 귀신을 큰 소리로 꾸짖어서 일어났다고 생각할지라도,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그보다도 교회가 연합하여 기도한 결과로 그 도시의 사람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마침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성장은 교회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만일 도시 안의 귀신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 특정 목사의 교회에 부흥을 갖다 준다면, 왜서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부흥은 느려지다가 중단되는가? 귀신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이 관건이라면, 우리가 그냥 귀신을 향하여 꾸짖기만 하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올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리를 명확해진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유일한 성경적인 방법은 기도, 설교, 가르침, 제자 삼기, 성령님의 도우심 등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성경적인 방법도 교회가 꼭 성장할 수 있다고 보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회개하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도 어떤 때에는 방문한 도시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직 성경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함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시간 낭비이며 그런 공적들은 나무, 풀, 짚으로 만든 것이기에 마지막 날에 불에 타버릴 것이고 아무 상도 받지 못할 것이다(고전 3:12-15을 보라).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표를 단지 숫자적인 성장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제자를 삼음에 따라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면 곧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1]가정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교회의 크기가 집의 크기에 의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목사들은 잘못된 동기로 큰 교회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이것은 오늘날 왜 그토록 많은 복음 전도자, 교사, 선지자, 심지어 사도들이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사역들이 제도적 교회의 구조 내에서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비 목회 사역자들이 교회를 목회함으로 인해 성경적인 교회구조내에서 더 많은 지체들이 받을 수 있는 큰 축복을 빼앗아 간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소명과는 관계없이, 제도적 교회의 모식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다. 왜냐하면 목사들은 “그들의 사람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내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십일조는 건물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비목회사역자들은 자신이 실제로 부르심을 받은 사역을 위한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교회를 목회하는데 의존한다.

[3]누가복음 14:26-33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한 요구조건을 열거하신 것은 이미 신자가 된 사람에게 영적 성장의 두 번째 단계를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오히려, 그분은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제시한 유일한 단계이며 그것은 구원을 받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부분의 구도자 민감형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현저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