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사역자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적이 되려면 반드시 그의 앞에 놓인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한다. 만약 그가[1]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큰 비극이다. 그는 마치도 일류 달리기 선수처럼, 기뻐하며 전력 질주하여 800미터 경주의 결승선을 넘으면서,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자신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으나 자신이 실제로 1,600미터 경주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목표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실패를 낳기에 승리했다고 생각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은 더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 사역자에게는 “비전”이라 일컫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분명한 부름심과 은사에 따른, 애써 성취하려고 하는 독특한 것들이다. 어느 특정도시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된다든지, 어느 특정지역에서 전도한다든지, 어떤 특정 진리를 가르친다든지 매 개인마다의 은사와 부름심은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는 보편적이며 매 사역자에게 적용되는 비전이며 매개 독특한 비전 뒤에 있는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많은 사역자의 독특한 비전은 하나님의 큰 비전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큰 비전에 대적할 때도 종종 있다. 나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다. 인수가 부단히 성장하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에 말이다.

그럼, 하나님이 매 사역자에게 주신 큰 목표 또는 비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먼저 마태복음 28:18-20에서 찾아보자.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자주 요점을 놓치는 말씀이다. 말씀을 한 구절씩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예수님은 그의 제자가 하나님 아버지가 그에게 최고의 권세를 주셨음을 알기를 바랐다. 물론, 아버지의 의도는 언제 누구에게 권세를 주시든 간에 우리가 그에게 순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이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유일무이는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주신 제한적인 권세와는 달리 예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이시다. 그 때문에 신약전서에 600번도 넘게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나온다. (예수님이 구주라고 나온 것은 15번에 그친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가 되려 하심이라”(롬14:9)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만인의 주님으로서 우리의 생명을 다스리시는 데에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True Saving Faith)

 

전도자들과 목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요청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절과 개념이다)하게 할 때 종종 그들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빌립보 간수가 바울에게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바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라”고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어떤 구원 또는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기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담당하기에 충분하다고 믿고, 믿음에 의해 구원에 이르는 것을 믿으며, 또 기타 수많은 예수님과 구원에 관한 것들을 믿기 때문에 자신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없다. 마귀도 예수와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을 믿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예수님 안의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는다면 나의 행위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것이고 마음으로부터 그분께 순복하게 된다. 내가 만약 순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는 나의 신발안에 독사 한 마리가 움츠리고 있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고서 침착하게 그 신발을 신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하게 자신이 믿는다고 한 것을 진정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 순복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되신 예수님이 아닌 상상 속의 예수님을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의 모든 내용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역자가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을 때 그는 첫 시작부터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역자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수가 부단히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역 속에 하나님의 보편적인 비전이 성취되도록 하는 데에는 불행하게도 실패하였다.

큰 비전(The Big Vision)

 

마태복음 28:18-19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그분의 최고의 주권을 선포 하신 후에 하나의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상).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 “그러므로”를 주목하라. 그분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다시 말해서 이는 “내가 금방 말했기 때문에… 내가 모든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내가 주님이기 때문에…사람은 마땅히 나에게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다(그리고 너희도 마땅히 나에게 순종하여야 한다)–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그 제자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나의 분부한 모든 것을 순종하게 하라”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이 바로 큰 목표이다. 우리의 모든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큰 목표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제자를 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하였다고 했다”(롬 1:5). 목표는 순종이다. 순종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이다. 예수님안에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한다.

그래서 오순절 날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더러 마땅히 순종하라고 한 분을 죽인 것이다. 큰 후회에 빠진 그들은 베드로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베드로는 제일 먼저 “회개”하라고 답했다. 그것은 불순종으로부터 순종으로 전환하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다음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분부하신 것처럼 세례를 받으라고 알려주었다. 베드로는 지금 제자–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하는 무리–를 삼고 있으며 정확한 말씀과 정확한 방법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역자마다 모두 자신의 사역의 성공 여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응당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나의 사역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공하고 있는 것이나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죄의 회개에 대해서는 촉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라”라고만 설득하는 전도자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교 활동을 조직하는 것을 통해 큰 회중을 거느리는 교회를 세운다 해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가 최신유행을 따르는 교리만 가르치는 것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가 교회는 개척했으나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순종의 삶을 살지 않는 성도들로 구성되었다면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축복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 역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실패(My Failure)

 

수년 전 내가 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성령님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비전과는 동떨어진 사역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질문을 하셨다. 내가 마태복음25:31-46에 묘사한 양과 염소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읽고 있는 중 성령님은 “만약 너의 교회 회중들이 오늘 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양에 속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염소에 속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작년에 얼마나 많은 교인이 주님 안의 굶주린 형제자매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었으며, 노숙자나 여행중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했으며, 헐벗은 지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든 자나 투옥 중인 지체들을 방문하였는가?” 나는 그들이 비록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고 나의 설교를 듣고 헌금을 드리는 일은 했지만 거의 아무도 위에서 언급한 일 혹은 그와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염소이며 나도 책망을 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 안의 형제자매의 절박한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예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못했다. 사실상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 —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인식하였다.

그 외에도, 나는 마침내 내가 나의 회중들에게 가르쳤던 온화한 “번영신학”이 사실상 하나님의 가장 큰 목표인 제자 삼는 것과 어긋남을 깨달았다. 비록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마 6:19-24을 보라), 그것이 단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일지라도(히 13:5; 딤전 6:7-8을 보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지만 나는 나의 부유한 미국인 회중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나는(전 세계 수많은 다른 목사가 그랬듯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한 부분에 있어서는 순종하지 않도록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인식한 후로부터 나는 회개하고 나의 회중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나는 제자를 삼고 그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혹시 나의 회중 가운데 예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기를 원하지 않고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 편한 신앙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안고 이 일을 해나갔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맞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현상이 보여주듯이 극히 소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신자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미전도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 반면, 그들은 그들을 위해 더욱 많은 것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다. 성결에 관한한 그들은 가장 수치스러운 죄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죄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책망하는 죄들이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 말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검증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14:21을 보라).

내가 두려워했던 것이 진실임이 밝혀졌다 — 바로 일부 자칭 그리스도인이 양의 탈을 쓴 염소가라는 사실이다. 내가 그들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화를 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주요하게 좋은 음악을 부대한 하나의 사교경험에 불과하다. 꼭 마치 세상 사람들이 술집에서 즐기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일부 설교를 듣는 것은 용인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것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것들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관해서는 듣기 싫어한다. 그들은 누구도 그들의 구원받음 여부에 대해 묻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들의 삶을 조절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이 더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또 교회시설을 개진하는 것 같이 그들이 준 것을 통해 직접적인 혜택을 입을 수 있다면, 헌금에 동참할 것이다.

자기성찰의 시간(A Time for Self-Examination)

이 책을 읽는 매 사역자마다 자기 자신에게 성령님이 나에게 물으셨던것처럼 똑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목회하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 죽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면 얼마만큼 양에 속하고 얼마만큼 염소에 속해 있을까?” 사역자들이 회중 가운데 염소처럼 행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 사역자는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5:31-46에서 하신 말씀을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의 전반 요점은 염소들을 향한 경고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 13:35을 보라). 그분이 말씀하신 이 사랑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사랑을 뛰어넘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제자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구별될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한다(요13:24; 요일3:16-20을 보라). 요한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쓰고 있다(요일 3:14). 예수님의 명령을 가르치는 사역자를 원망하고 비판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과연 거듭남의 징표인 사랑을 드러내고 있을까? 아니, 그들은 염소가며 지옥을 향해 치닫고 있다.

모든 민족의 제자들(Disciples of All Nations)

계속해 나가지 전에, 마태복음 28:19-20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자. 가장 큰 그리고 보편적인 사명인 이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우리가 얼마만큼 집어낼 수 있을지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상).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를 원하신다. 더 정확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세상의 모든 종족 군체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족 군체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 가능하다. 이 임무는 처음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닌, 그들 뒤를 이은 매 한 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또 그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열한 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가르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이 과정은 그 후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영원히 존속되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매 제자마다 모두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동참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지상명령”이 왜 지금까지 성취되지 않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비록 수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지만 진정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제자는 적고도 적다. 대다수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의지적인 결단을 내린 적이 없다. 매번 이러한 결단을 요구할 때마다 그들은 “그건 나의 사역이 아니다”그리고 “나는 그런 쪽으로 인도받은 것 같지 않다”라는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많은 목사가 이러한 말들을 하고 있으며 모든 염소가 그렇듯이 항상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데 맞는 말씀들만 골라서 따른다.

만약 자칭 그리스도인이 모두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머지않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가 합심한다면 이 일은 가능해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과 돈을 더는 잠시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예수님이 분부하신 그들의 큰 사명을 위하여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신실한 목사가 회중들에게 모 선교사가 오셔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공고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석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염소는 집에 있거나 다른 곳에 갈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에는 관심이 없다. 반면에, 양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동참된다는 것에 대해 항상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마태복음28:18-20에 관한 마지막 요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셨고, 사도들은 이 명령을 신실하게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즉시 세례를 주었다. 세례는 물론 신자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에 참예함을 뜻한다. 새 신자는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매 새 신자마다 모두 새로운 성품을 가진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머리에 새기기를 원하신다. 그는 이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이 그의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전에는 죄 가운데 죽어 있었으나 이제는 성령님을 통하여 깨끗게 씻은바 되었으며 새롭게 태어났다. 이젠 그저 “용서받은” 정도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죽어 있을 때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됨을 나타낸다. 이 부분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속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이는 신자들에게 임하시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임재가 그들의 행위에 영향준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예수님의 제자도(Jesus Defines Discipleship)

 

우리는 예수님의 가장 큰 목표가 우리가 제자 삼는 것임을 확립했다. 제자란 바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32에서 진일보 제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리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에 의하면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의 진리를 배워가면서 점차 “자유함을 얻게” 된다. 그다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로부터의 자유함에 대해 암시한다(요 8:34-36을 보라). 그래서 알 수 있다시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배우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 후에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그러므로 예수님의 정의에 따르면, 제자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그분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25-33에서 진정한 제자가 맺는 열매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하게 정의 내리신다. 25절부터 시작하여 읽어 보도록 하자.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른다”고 하여 만족하셨는가? 수많은 회중을 거느리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분의 설교를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고, 또 어떤 때에는 그분의 음식을 먹었던,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무리로 인해 만족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나열한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제자가 인간적으로 가장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을 반드시 미워해야만 하는가? 이는 어쩌면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라는 명령과는 달라 보이는 듯하다.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과장의 수법을 쓰셨다. 과장의 목적은 그분이 뜻하시고자 하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기준은 적어도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분을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기대는 아주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직업이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의 아내나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제자들을 삼아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매 사역자마다 모두 이러한 질문을 자신한테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제자를 삼는 일에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가?”

한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보아낼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들의 아내들이나, 자녀들이나 부모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

두 번째 요구(A Second Requirement)

예수님은 그날 그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시한 두 번째 요구이다. 그분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제자가 문자적으로 무거운 나무묶음을 지고 그분을 따르라는 뜻일까? 아니, 예수님은 또다시 과장의 수법을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 중 대부분은 죄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범죄에 대한 억제력으로서의 십자가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도시의 성문 밖의 주요 도로에서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시대에는 “너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보편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사람마다 모두 로마병사의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죄수들에게는 이 말이 무섭기만 하다. 왜냐하면, 몇시간 내지 며칠 동안의 혹독한 아픔과 고통이 곧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곧 “자신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아들여라”는 뜻이 된다.

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나는 네가 냄새나고 더러운 화장실 청소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달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너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화장실 청소를 하려무나”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나는 아내가 남편에게 “나는 당신이 로마인에게 세금 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은 세금 내는 날이니 세리가 지금쯤 집에 오고 있으니 어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서 그 사람에게 세금을 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같은 의미로 마태복음 16:24에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그 결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난을 감수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한 고통을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치뤄야 할 값을 계산하였고 어려움과 고난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경기를 마치기 위해 이미 결단을 내리고 출발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기 위해 치뤄야 할 대가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뒤바침된다 . 그분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울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 14:28-32).

예수님의 뜻은 분명하다. “만약 네가 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가는 길에 시련이 더해질 수록 견지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된다. 진정한 제자는 나를 따름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감수한다.”

 

세 번째 요구(A Third Requirement)

예수님은 그날 그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하여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한 가지 더 말씀하셨다.

이처럼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이 과장의 수법을 쓰셨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있을 곳이 없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며 우리가 재물을 섬기는 것이 아닌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많은 불필요한 소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소박한 삶을 살며 사도행전에서 읽은 초대교회 모습처럼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고, 보물을 이 땅위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을 정리해보자. 예수님에 의하면, 만약 내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는 반드시 그분을 최고로 사랑해야 하며 내 가족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 나는 반드시 그분을 따름으로 말미암은 감수해야 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나의 수입과 소유를 관리해야 한다. (나는 많은 사람처럼 “예수님이 나의 재산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다 순종할 것이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께 순복하고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사역자가 삼아가야 할 제자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표이다! 우리는 제자 삼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전 세계 수많은 사역자가 놓치고 있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만약 그들이 내가 했던 것같이 자신의 사역을 평가해본다면, 나처럼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과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나의 회중들이 예수님께 순복한 정도를 봤을 때, 많은 사람을 아직은 진정한 제자로 보기 어렵다.

목사가여, 자신의 회중들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누가복음 14:26-33에서 말씀하신 기준에 맞는 진정한 제자들인지? 전도자들이여, 당신이 전하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세워가고 있는가?

마지막 날에 우리가 예수님앞에서 최후평가를 받기 전에 우리의 사역들을 평가 해야 할 시점이 왔다. 만약 내가 그분의 목표에서 빗나갔다면, 나는 지금 곧바로 발견하기를 원한다.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마지막 엄중한 생각(A Final Sobering Thought)

 

누가복음 14:26-33의 말씀이 보여주다시피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명확하게 원하신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말씀을 마치실 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셨다.

그러므로[2]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 14:34-35).

보다시피 이 말씀은 상관없는 구절이 아니다. 이 구절은 그러므로 로 시작한다.

소금은 짠맛을 내기 때문에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 없어 지며 “버려지게” 된다.

이것이 제자가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소금이 짠맛을 내야 하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유일한 의무는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유일한 이유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쓸데 없어 “버려지게”될 것이다. 그것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들려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곳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마 5:1을 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사실상 이것은 아주 엄중한 경고이다. 첫째로, 오직 짠맛을 내는 사람만이(여기서는 명백히 “완전히 순복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나머지 사람은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둘째로, “짠맛”을 내는 사람은 짠맛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지않고서야 예수님이 제자들을 경고할 필요가 없다. 이런 진리는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얼마나 모순되는지 모른다. 그들은 제자가 되지 않더라도 천국에 꼭 갈 수 있으며 그들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서 다음 장들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1] 이 책속에서 나는 사역자를 지칭함에 있어서 남성대명사 he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문맥상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과 목사와 같은 전직사역자 대다수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성을 전직사역자로 부르신다고 믿고 있으며, 꽤 많은 수의 아주 효과적인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매분들을 알고 있다. 그 부분은 이 책의 12장 사역 속의 여성의 주제이기도 하다.

[2] 역주: “그러므로” 이 단어는 개역개정판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영어번역본 성경원문대로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