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장 (Chapter Thirty-One)

영적 전쟁에 관한 현대 신화, 2부(Modern Myths About Spiritual Warfare, Part 2)

이 장에서 우리는 계속하여 사탄과 영적 전쟁에 관한, 잘못되었지만 널리 보급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추가로 살펴볼 것이다. 결론에서,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모든 신자가 연습해야 하는 영적 전쟁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신화 5: “우리는 영적 전쟁을 통해 공중에 있는 마귀의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다.”(Myth #5: “We can pull down demonic strongholds in the atmosphere through spiritual warfare.”)

성경에 따르면, 사탄이 이 땅의 공중에 거하면서 그를 도와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는 악의 영들의 계층 구조를 지배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악의 영들은 “지역적”으로 분포되어 특정 지리적 지역을 통치하는데 이 점 또한 성경에 언급되었다(단 10:13, 20-21; 막 5:9-10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낼 권한과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은 성경적이다(막 16:17; 약 4:7; 벧전 5:8-9을 보라).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의 악령을 이길 수 있을까? 대답은 그럴 수 없다. 또한,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하여 우리가 도시의 악령도 이길 수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귀신을 쫓아낸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당신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누군가가 한 도시 또는 지역을 통치하는 악령을 이겼다는 사례를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례가 존재하지 않기에 당신은 읽어보았을 리가 없다. 당신은 서신서에서 우리가 공중의 악령을 이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가르침을 본 기억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공중의 악령에 대하여 “영적 전쟁”을 벌릴 수 있다거나 또는 벌려야 한다고 믿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비유에 대한 지나친 해석(Pushing Parables Too Far)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은유가 포함된 성경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보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잘못을 범한다. 은유적인 언어를 잘못 해석한 전형적인 예는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바울의 말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3-6).

제임스 버전에서는 우리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린다”고 쓴 것이 아니라 “요새를 무너뜨린다”고 썼다. 이 하나의 은유적인 표현으로부터, 공중의 악령들이 거하는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완전한 신학체계가 세워졌다. 하지만 새로운 미국 표준 버전의 명확한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공중의 악령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거짓 믿음의 요새를 말한 것이다. 바울은 높은 곳에 있는 악한 영이 아닌, 이론들을 무너뜨린 것이다.

우리가 문맥적으로 읽어보면, 이 점은 더 뚜렷해진다. 바울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강조 추가)라고 말하였다. 바울이 상징적으로 썼던 전쟁은 생각 또는 인식에 대한 전쟁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적한다.

바울은 군사적인 은유를 사용하여,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전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투에서 우리의 주요 무기는 진리이며,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 세계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메시지로 적의 영토에 침입하도록 명령받았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진은 거짓말과 속임수로 세워졌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The Whole Armor of God)

바울이 쓴 글 중에 종종 잘못 해석되는 또 다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할 책임에 관해 쓴 에베소서 6:10-17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이 마귀와 악의 영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관한 것은 확실하지만, 도시의 악령을 이기라는 언급은 없다. 우리가 이 구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바울은 주요하게 각 개인이 자신의 개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적용하여 사탄의 계략에 저항해야 할 책임에 관해 썼음이 분명해진다 .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또한 은유적인 언어로 쓴 것이 분명한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에 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가 쓴 전신 갑주는 비유적이다. 갑주의 각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와 악령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다양한 성경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또 적용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여 하나님의 갑주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에베소서의 이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바울이 우리에게 진정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한테 물어보자.

우리의 영적인 힘의 근원(The Source of Our Spiritual Strength)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라”(엡 6:10)는 분부를 받았다. 강조점은 우리의 힘이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진일보 바울의 다음 주장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갑주이다. 바울은 하나님 자신이 갑주를 입으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갑주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제공하신 갑주가 필요할까? 그것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함이다”(엡 6:11). 이 갑주는 주요하게 방어하기 위함이지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따라서 전신 갑주는 우리로 하여금 나가서 도시의 악령을 무너뜨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간계에 대적하여 굳게 있게 해준다.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악한 계획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이 제공하신 전신 갑주를 입지 않으면 공격받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님을 주목하라.

계속하여 읽어보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여기에서 바울이 혈과 육의 전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을 말한 것임이 더욱 명백해진다. 우리는 바울이 나열한 다양한 계층의 악의 영들의 간계와 싸우고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바울이 악의 영들을 아래에서 위로의 순서로 나열했으며, “통치자”가 가장 낮은 계층이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가장 높은 계층이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존재에 대적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영적인 존재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해답 될 수 있다. 그들은 주로 유혹, 생각, 제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되는 인식들을 통해 우리를 공격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순종함으로써 방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다시 한 번, 바울의 목적은 우리를 장비시켜 사탄의 공격에 대적하고 서게 하려는 것임을 주목하라. 그의 목적은 우리가 나가서 사탄을 공격하고 공중의 악령들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세 번이나 굳게 서라고 말했으며 우리는 공격이 아닌 방어의 위치에 있다.

진리 우리의 주요한 방어(Truth–Our Primary Defense)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엡 6:14 상).

진리는 우리의 갑주를 고정해준다. 진리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분의 아버지께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을 대적하는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의 공격 앞에 굳게 서기 어렵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그의 모든 제안을 대답하심으로써 이 점을 잘 보여주셨다.

바울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엡 6:14 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았다(고후 5:21을 보라). 그분의 의는 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 되었다. 그 의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둘째, 우리는 의롭게 살고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의의 흉배에 대해 생각했던 바일 것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된다(엡 4:26-27을 보라).

복음의 신을 신고 굳게 서라(Firm Footing in Gospel Shoes)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엡 6:15).

복음의 진리를 알고, 믿고, 적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탄의 공격에 대적할 수 있는 견고한 발판을 제공한다. 로마 군인들이 착용한 신발의 바닥에는 스파이크가 있어 전장에서 굳게 설 수 있게 해준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실 때,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에 대적하여 굳게 설 수 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엡 6:16).

바울의 강조점이 우리의 방어 자세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그는 우리가 도시의 귀신을 무너뜨리는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마귀의 거짓말을 대적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한다면, “악한 자의 불화살”에 비유된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를 가진 것과 같다.

우리의 영적인 검인 하나님의 말씀(Our Spiritual Sword–God’s Word)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구원은, 성경의 설명처럼, 사탄의 속박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우리가 여전히 그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믿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투구를 가진 것과 같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유인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한다. 내가 이미 언급 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그분의 영적인 검을 능숙하게 다루시는 영적 전사의 완벽한 모델이다. 그분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그분은 매 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사탄의 제안에 답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그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의 검”을 방어용으로 사용하셨음을 주목하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쓴 전신 갑주가 주로 방어하는데 사용된다고 믿는 우리에게 검은 명백히 공격용이라고 지적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들은 무력한 논거로 에베소서 6:10-12의 말씀이 우리가 공격적으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요새를 무너뜨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이론을 정당화하려 한다.

분명히,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바울 자신만의 이유를(그렇게 하여야만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 읽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전신 갑주를 주로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록 검이 공격 무기로 생각 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상대가 칼로 찌르는 것을 막고 보호할 수 있기에 방어용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는 전체 비유를 왜곡하지 않도록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갑주의 여러 부분들의 의미를 짜내려고 시도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검의 방어와 수비의 특성을 논할 때, 우리는 비유를 “너무 지나치게 해석하여” 단순한 비유를 분해하여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분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강한 자를 결박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는가?(But Didn’t Jesus Instruct Us to “Bind the Strong Man”?)

우리는 예수님께서 신약 성경에서 “강한 자를 결박하라”는 언급을 세 번 하신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번의 사례에서, 그분은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그럼 예수님이 정확히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3-30,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강한 자를 결박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오히려, 그분은 예루살렘 서기관들의 비판에 공격할 수 없는 논리와 분명한 은유로 답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난했다. 예수님은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도 이 말씀을 지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 사탄의 힘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면, 그분은 누구의 힘을 사용하셨을까? 그 힘은 반드시 사탄의 힘보다 강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님의 능력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는 강한 자에 은유적으로 비유했다. 강한 자의 소유물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보다 더 강하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것은 그분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에 대한 진정한 설명이다.

강한 자에 대해 언급한 이 말씀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언급한 유사한 말씀은 우리가 도시의 “강한 자를 결박할 수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면, 사람이 도시의 “강한 자를 결박했다”는 어떠한 예거나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도시 또는 특정 지역의 “강한 자-악의 영”을 결박 또는 무력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What About “Binding on Earth and in Heaven”?)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에 단 두 번 나오는데 모두 마태복음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공중의 악의 영을 “맬” 수 있고 또 매야 함을 가르쳤을까?

첫째, 매다풀다는 그분의 말씀을 살펴보자. 그분은 이 단어들을 분명히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추종자들이 밧줄이나 끈으로 문자적으로 무언가를 매거나 푸는 것을 의미하시지 않아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뜻하셨을까?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 중에 매다풀다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분은 악령의 주제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다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악령을 매는데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매다와 풀다에 관해 언급하신 첫 번째 구절을 살펴 보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5-19, 강조 추가).

이 구절이 그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그것이 적어도 5가지 은유적인 표현을 담고 있기 때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 “혈육” (2) “반석” (3) “음부의 권세(문)” (4) “천국 열쇠” (5) “매다/풀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다른 뭔가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음부의 문(Hades’ Gates)

은유의 정확한 의미와는 관계없이, 당신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악령을 언급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과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언급은 “음부의 문”인데 이것은 물론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음부의 문이 문자적으로 교회를 방해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부의 문”은 무엇을 상징할까? 아마도 그것은 사탄의 힘의 상징이며, 예수님은 사탄의 힘이 그분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의미하셨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은 그분께서 세우실 교회가 사람들을 음부의 문 뒤에 투옥될 운명에서 구원해주리라는 것을 의미하셨을 수 있다.

예수님이 실제로 두 개의 문에 대해 언급하셨음을 주목하라. 음부의 문과 그분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는 것을 통하여 암시하신 천국의 문이다. 이런 대조는 음부의 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음부로부터 구원해주는 교회의 역할을 상징한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힘이 그분의 교회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매다와 풀다에 관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가 도시의 악령들에 대해 해야 할 일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누군가가 도시의 악령을 맸다는 어떠한 예도 찾을 수 없으며 서신서에서도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어떠한 가르침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다와 풀다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반드시 문맥적으로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에 의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성경적인 예가 없다는 것으로부터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매었다” 또는 “내가 그 사람 위의 천사를 풀어주었다”와 같은 말들을 자주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신은 신약 성경에서 이런 말을 한 사람을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마귀에게 말을 하거나 악령을 매거나 푸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사탄의 사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할 때, 그는 그것을 “매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였다(고후 12:7-10을 보라).

천국 열쇠(The Keys to Heaven)

“매다”와 “풀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문맥을 더 살펴보자. 그분은 매다와 풀다에 관해 언급하시기 바로 전에,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베드로는 종래로 천국의 문을 여는 문자 그대로의 열쇠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임이 틀림없다. “열쇠”는 무엇을 상징할까? 열쇠는 잠겨있는 뭔가에 접근하는 공구를 나타낸다.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열 수 없는 특정 문을 열 수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사역을 살펴보았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잠긴 문을 여는 것에 간주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가 모든 믿는 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그리고 음부의 문을 닫아주는) 복음을 선포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사이기 때문에,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 천국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 복음만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다.

매다와 풀다의 의미(And Now, Binding and Loosing)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후, 예수님은 “매다”와 “풀다”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이 구절의 다섯 번째 비유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말씀의 맥락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베드로의 “매다”와 “풀다”가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에, 음부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에,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어떻게 적용될까?

거기에는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나는 너에게 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니 이 땅에서 너의 책임을 다하라. 그리고 천국에서도 너를 지지할 것이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만일 한 고용주가 자신의 판매원에게 “당신이 방콕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본사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판매원은 상사의 이 말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는 그가 방콕에서 회사를 대표 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 땅에서 천국의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하셨다. 이 약속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대표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베드로가 이전에 존경했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비판의 눈초리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해석은 마태복음에서 18장에서 사용된 동일한 표현과 잘 조화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5-20, 강조 추가).

“매다”와 “풀다”에 관한 두 번째 구절에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악령을 매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믿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징계를 말씀하신 직후에 “매다”와 “풀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 구절의 “매다”와 “풀다”에 관하여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누가 교회에 있어야 하고 누가 있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책임을 주었다. 그것은 너희의 일이다. 너희가 책임을 다할 때, 천국에서도 너희를 도울 것이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너희는 이 땅에서 천국의 대리인으로서 위임받았다. 너희에게는 책임이 있으며 너희가 이 땅에서 책임을 다할 때, 천국에서는 항상 너희를 지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맥상에서의 “매다”와 “풀다”(Binding and Loosing in Context

이 해석은 문맥상에서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보다 넓은 맥락에도 잘 부합된다.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예수님은 “매다”와 “풀다”에 관해 말씀하신 후 바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또다시 “너희가 땅에서 하는 일은 하늘에서도 지원될 것이다”라는 주제이다. 땅에 있는 우리는 기도할 권세와 책임이 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늘에서 이루실 것이다.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다”와 “풀다”에 관한 그분의 말씀에 대해 진일보 해석하셨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구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역시 “천국에서 너희를 지원할 것이다”라는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면, 천국에 계신 그분도 나타나신다.

당신이 나의 해석에 대해 완전히 반대하더라도, 예수님이 도시의 악령들을 매는 것에 말씀하셨다는 성경적인 주장을 펼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탄이 포함된 하나님의 계획(God’s Divine Plan Includes Satan)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반란군이지만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반역군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들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반역적이지 않았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강조 추가).

예수님은 사탄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천사들을 만드셨다. 그분은 그들 중 일부가 반역할 것을 알고 계셨을까? 물론, 아셨다. 그럼 왜 그분은 그들을 창조하셨을까? 왜냐하면, 그분은 그 반역적인 영들을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분께서 그들에 대한 목적이 없으시다면, 그들을 언녕 지옥에 던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분께서 이미 일부 반역적인 천사들에게 그렇게 하셨으며(벧후 2:4을 보라), 언젠가는 사탄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계 20:2을 보라).

하나님께는 사탄과 모든 악령이 땅에서 역사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 만일 그분께서 허용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땅을 완전히 떠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사탄이 땅에서 역사하도록 허락하실까? 나는 모든 사람이 모든 이유를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서 일부 이유를 드러내셨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려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탄이 땅에서 제한적으로 역사하도록 허락하신다. 사탄은 인류가 충성할 수 있는 대체 선택으로 제공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 또는 사탄에게 복종한다. 하나님은 그분이 주신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시기 위해 사탄이 그들을 유혹 하도록 허락하셨다. 자유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은 그들의 마음에 들어있는 순종 또는 불순종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 한다.[1]

둘째, 하나님은 사탄이 악인에 대한 그분의 진노의 대리인으로서 땅에서 제한적으로 역사하도록 허락하셨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악령을 통해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신 몇 가지 사례를 보여주면서 이 점을 증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통치하게 허락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그분의 진노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악인을 통치하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을 심판하셨고, 또한 악의 영이 그들을 통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셨다.

셋째, 하나님은 사탄이 땅에서 제한적으로 역사하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분 자신께 영광을 돌리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매 번 하나님께서 사탄의 일을 파괴하시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찬양하게 된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다(Jesus is the Head Over Principalities and Powers)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탄과 악령에 대적해야 할 우리의 책임은 두 가지이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것과(약 4:7) 마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막 16:17). 다른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귀신 들린 자가 귀신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그들은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며 사람이 악한 영에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제지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역적으로 분포된 특정 영역의 영들을 무너뜨릴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이다. 악의 영들은 그곳의 사람들을 속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이 한 선택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일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그들은 사탄과 악령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탄이 그들을 속박하도록 허용하실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다”(골 2:10). 통치자(arche)와 권세(exousia)에 대응한 희랍어가 종종 인간의 정치적 지도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신약 성경에서 그들은 또한 마귀의 영적 통치자로 사용되었다. 에베소서 6:12은 통치자(arche)와 권세(exousia)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을 묘사한 전형적인 구절 중의 한 예이다.

우리가 바울이 골로새서 2:10에서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했던 말씀을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영적 능력을 말했음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네 구절 뒤에, 바울은 예수님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라고 썼다.

예수님이 영적 통치자와 권세들의 머리시라면, 그분은 그들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이교도적이고 정령 숭배적인 문화에서 살면서 그들을 통치하는 악령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상을 숭배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멋진 계시이다.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The Only Way of Escape)

악령의 사로잡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제공하신 탈출이다. 아무도 도시의 악마의 힘을 결박하고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거나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요 3:36). 그것은 악마의 힘에 지배받는 것을 포함한다.

영적 전쟁에 관한 대회를 주최한 도시들에서 큰 변화를 볼 수 없는 이유는 정작 그 지역을 통치하는 마귀의 계층에 영향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사와 권세를 향해 밤낮 부르짖을 수 있다. 그들은 소위 “대적 방언”으로 악마를 괴롭힐 수 있다. 그들은 “나는 도시의 악령을 결박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비행기 안에서 거나 고층 빌딩의 꼭대기에서 행할 수 있다(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악령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영향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한바탕 크게 웃는 것뿐일 것이다.

아래에 영적 전쟁에 대한 여섯 번째 현대의 신화를 살펴보자.

신화 6: 지역적인 악령에 대한 영적 전쟁은 전도에 효과적이다.(Myth #6: “Spiritual warfare against territorial spirits opens the door for effective evangelism.”)

지역적인 악령에 대해 영적 전쟁을 하는 데 깊이 관여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동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려는 소망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칭찬받아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무엇이 역사하고 무엇이 시간 낭비인지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의 확장에 관하여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려주셨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예수님, 베드로, 또는 바울이 사역 중에 종래로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함으로써 전도의 효과를 배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이 전도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할까? 그들은 대개 이런 추리를 한다: “사탄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사탄을 대적하여 영적 전쟁을 하여 이런 일을 막아야 한다. 그들의 마음을 가리운 것을 없애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까?

사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문제는,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을 하도록 동기 부여함으로써 지역적인 악령들을 무너뜨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것을 썼을까?

대답은 아니다이며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바울은 계속하여 “그러므로 고린도인들아, 사탄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였으므로 나는 너희가 영적 전쟁을 하여 지역적인 악령들을 무너뜨려 그들을 혼미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곧이어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는데 그것이야말로 영적 무지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둘째, 바울은 종래로 그의 서신 중에서 신자들에게 도시의 악령의 진을 무너뜨리는데 참여함으로써 복음 전도의 효과를 높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셋째, 우리는 바울의 모든 서신서를 읽는 것을 통하여 그가 사탄이 혼미하게 하는 것이 불신자들이 믿지 않는 주요 이유라고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탄이 혼미하게 하는 것은 한 가지 요인이 될 수 있지만 주된 요인 또는 유일한 요인이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주요 원인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탄이 모든 사람을 혼미하게 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전에 믿었던 모든 거짓말을 거부한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사탄이 그들을 혼미하게 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이 사탄이 그들을 혼미하게 하도록 한다.

감각 없는 마음(Callous Hearts)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왜 사람들이 믿지 않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여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강조 추가).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무지할까? 왜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졌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근본적이고 주된 이유이다.[3] 그들 자신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 사탄은 단지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거짓말을 제공할 뿐이다.

씨 뿌리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5, 11-12).

복음을 나타내는 씨앗이 길 가에 떨어져 밟혔음을 주목하라. 씨앗은 사람들이 자주 걸어 다니는 굳은 땅을 침투 할 수 없다. 따라서, 마귀를 나타내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기 쉽다.

전체 비유의 요점은 사람의 마음 상태를(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수용성) 여러 가지 유형의 땅에 비유한 것이다. 예수님은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지를 설명하셨다. 그것은 모두 그들에게 달려있다.

사탄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는 단지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말씀을 훔칠 수 있을 뿐이다. 이 비유 속의 새들은 단지 씨앗이 싹트지 않는 것에 대한 부차적인 원인이다. 주요 문제는 땅에 있다. 사실, 땅이 굳기 때문에 새들이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문제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이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마음이 혼미해지려는 선택을 한 것과 같다. 그들은 진리보다 거짓말을 더 선호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강조 추가).

성경은 사람은 성실하고 마음이 착하여 사탄이 그들을 혼미하게 하지 않기만 하면 복음을 믿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았다. 반대로, 성경은 인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마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의 변명은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가?(How Satan Blinds People’s Minds)

사탄은 정확히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할까? 그는 신비한 영적인 힘으로 사람의 머리에 약 같은 것을 부어 넣어 그들의 총명을 어둡게 하였을까? 악마가 발톱으로 그들의 머리에 파고들어 가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파괴하였을까? 아니, 사탄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제공하여 믿게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정말로 믿는다면, 그들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삶에 대해 결산해야만 한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들은 회개하고 그분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무언가를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거나 또는 죽음 이후에는 생명이 없다고 믿을 수 있다. 그들은 환생을 믿거나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 활동들이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믿든 간에,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면,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거짓말. 그들은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사탄이 거짓말로 그들을 혼미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여 진리를 믿는다면, 사탄은 더 이상 그들을 혼미하게 할 수 없다.

어둠에 관한 거짓말(The Lies of Darkness)

사탄의 나라는 성경에서 “흑암의 권세”(골 1:13)로 언급되었다. 물론, 흑암은 진리가 없는 상태-빛이나 깨달음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당신이 어둠 속에 있으면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이동하며 마지막에는 종종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은 곧 사탄의 어둠의 나라의 상황과 같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그들의 상상력은 사탄의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영적 어둠 속에 있다.

사탄의 나라는 명확한 국경으로 정의되는 지리적인 나라가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믿음의 나라이다. 어둠의 나라는 빛의 나라와 같은 장소에 있다.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다.[4] 우리의 주요 임무는 이미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진리를 믿게 될 때, 사탄은 그를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에 또 한 명의 신하를 잃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사탄에게서 풀어주는 것은 그들을 사로잡은 악령을 매는 것을 통하여서거나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리를 통하여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난다.

요한복음의 같은 구절에서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 강조 추가).

예수님께서 자신과 마귀를 대조시키신 것을 주목하라.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지만, 사탄은 궁극적으로 거짓말쟁이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청중들에게 그들의 아비가 마귀이고 마귀는 거짓말쟁이라고 지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셨음을 주목하라. 그들이 혼미 된 것은 마귀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제공하여 믿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둠을 사랑하여” 어둠의 나라에 거하게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사탄은 진리를 믿는 어떤 사람도 속일 수 없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우리는 어둠의 나라를 물리칠 수 있는 주요 방법은 빛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아가 마귀를 결박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행 26:18, 강조 추가)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고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가고 거짓말이 아닌 진리를 믿으려는 결정을 내릴 때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유일한 요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짓말의 요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이다(This is God’s Plan)

하나님께서 사탄을 천국에서 땅으로 쫓아내셨다는 점을 잊지 말라. 그분은 사탄을 우주의 다른 곳에 영원히 갇아두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시지 않았다. 왜서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을 사용하여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 그 목적은 바로 언젠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택함을 받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큰 가족을 이루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원하신다면, 다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사랑의 기초가 자유 의지이기 때문에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만드셔야 한다. 로봇과 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께 순종 또는 불순종하거나, 그분을 사랑 또는 미워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여 그들을 시험하셔야만 한다.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시험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충성도에 대한 시험이라면, 불충성하게 하는 유혹도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사탄을 땅에 두셨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사탄은 인간의 충성에 대한 대체 선택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거짓말에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영향 주도록 허락받게 되었다. 모두 사람들은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사탄을 믿을 것인가? 사람들의 그것에 대한 인식 여부를 떠나서 그들 모두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그곳에 두고 아담과 하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면, 왜 그 나무를 그곳에 두셨을까? 그것은 그 나무가 시험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와를 유혹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불충성하게 하는 유혹이 반드시 존재한다. 사탄은 하와를 속였고 그녀는 사탄을 믿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첫 번째로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에 대한 불충성을 드러냈다.

비슷한 방식으로, 모든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평생 동안 시험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보아낼 수 있다(롬 1:19-20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기에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다(롬 2:14-16을 보라). 사탄과 그의 악령들은 제한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 결과, 모든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시험을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모든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롬 1:25).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그분의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을 주신 것에 감사하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야말로 우리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다.

지금과 나중의 사탄의 속임수(Satan’s Deception, Now and Later)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와 그의 반란군들이 이 땅에서 역사하는 이유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바로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함이다.

사탄이 언젠가는 한 천사에 의해 천 년 동안 감금당할 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살펴볼 때, 이 같은 사실은 더욱 확증된다. 사탄이 감금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계 20:3) 하기 위함이다. 그 천 년 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직접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다.

하지만 그 천 년이 지난 후, 사탄은 잠깐 놓이게 되며 그 결과, 그는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할 것이다”(계 20:8).

하나님께서 사탄이 그 때 사람을 미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면, 왜 그분은 사탄을 놓아주셨을까? 특히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그를 감금하신 사실에 비추어보면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지 않기를 바라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이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밖에 미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다. 사탄은 오직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밖에 미혹하지 못하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지금 그리고 나중에 역사하도록 놔두신다.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면, 그들의 마음 상태가 명백해지므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가라지 속의 곡식”을 뽑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마 13:24-30을 보라).

이것은 정확히 사탄이 천 년의 끝에 풀려날 때 일어날 일이다. 그는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군대를 모아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뒤엎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그분을 사랑하고 누가 그분을 미워하는지를 아시므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보내 “그들을 태워버릴 것이다”(계 20:9). 사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역적인 악령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역사하게 허락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이다.

성경적인 전도(Biblical Evangelism)

예수님과 신약 성경의 사도들 중 아무도 이런 영적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오늘날 효과적인 전도를 하는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예수님, 베드로, 요한, 스데반, 빌립, 또는 바울이 그들이 복음을 전파했던 곳에서 “영적인 요새를 무너뜨렸다”거나 “강한 자를 결박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곳을 찾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단순한 복음-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을 전했으며 놀라운 결과를 얻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사탄이 그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하여 혼미하게 하지 않게끔 영적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성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음을 볼 수 있다(마 10:14; 행 13:5을 보라).

교회 역사상 수천 번의 큰 부흥에서 “영적 전쟁”을 했다는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성공적인 전도의 전제 조건이 “영적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과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술은 효과가 있다!”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영적 전쟁을 하기 시작해서부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이유가 그와 동시에, 더 많은 영적 기도와 전도가 있었기 때문이거나 한 그룹의 사람들이 갑자기 복음에 더 수용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한 전도자가 당신에게 “오늘 밤, 나는 부흥 집회에서 설교하기 전에, 바나나 세 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설교하자 16명이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마침내 효과적인 전도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설교 전에 반드시 바나나 세 개를 먹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당신은 그 전도자에게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먹은 세 개의 바나나와 구원받은 16명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이 복음을 전했으며 16명의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누군가가 그 약속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비성경적인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약속만은 지키실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영적 전쟁의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전도지를 전달하고 도시의 “강한 자를 결박한다면”, 일정 비율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 전도지만 전달해도, 같은 비율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다.

영적 추수를 위한 성경적인 기도 방법(How to Pray Scripturally for a Spiritual Harvest)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신약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을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없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했다는 기록도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분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 필요한 일을 이미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분의 아들을 내어주어 죽게 하실 정도로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을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들이 아직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또는 (2) 그들은 복음을 들어 보았으나 거부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성경적인 기도 방법은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눅 10:2, 강조 추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영적 추수에 관해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29-30, 강조 추가).

그들은 (1)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간구했거나 (2)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을 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구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치유, 표적과 기적을 통해 복음을 확증해주시기를 바랐다. 이것은 성경적인 기도이며 그 기도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는 것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추수에 관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는가? 아니, 그가 한 말을 읽어보자.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살후 3:1, 강조 추가).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강조 추가).

사람들이 현재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보다 그들 자신한테 더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음을 담대히 선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것을 보장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은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달려있다.

신화 7: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면, 마귀가 그에게 들어와 그와 함께 거하게 된다.”(Myth #7: “When a Christian sins, he opens the door for a demon to come and live in him.”)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면, 악령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악령의 제안에 굴복한다는 것이 악령이 신자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지으면 그분께 불순종한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게 되며(요일 1:5-6을 보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과의 관계가 깨지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9). 그런 다음, 우리와 그분과의 교제도 회복될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우리 안에 내주하는 마귀로부터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세상, 육체, 마귀부터 오는 유혹을 대면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참으로 다양한 악의 영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썼다(엡 6:12을 보라).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어느 정도 마귀의 영의 교란을 받는다. 그것은 정상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벧전 5:8-9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탄이 우리에게 우울한 생각을 가져다 주면, 우리는 우울함을 없애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는 말씀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탄의 생각을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만일 신자가 계속하여 악령의 제안을 경청하고 따르기를 선택한다면, 그는 잘못된 생각의 억압을 받아 그것에 더 수용적이고 더 좌우되도록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게 된다. 그가 더 많이 굴복할수록 그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더 많은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드물지만,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자유함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순종하여 마귀를 대적하려는 결정만 내리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 있을까? 오직 그가 억압을 받지 않고 마음속으로부터 의지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분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려는 결정을 했을 때에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5] 만일 그가 그를 억압하는 악령에게 더 많이 굴복한다면 귀신들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귀가 그에게 들어와 그와 함께 거하게 된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

신약 성경에는 귀신 들린 그리스도인에 대한 예가 단 하나도 없으며 귀신 들릴 위험한 가능성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한 적도 없으며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없다.

진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필요가 없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의 마음이 일단 낡은 사고방식을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새롭게 되면, 우리는 죄의 습관을 이기고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수 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요 8:32). 우리는 모든 귀신을 쫓아 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다.

그럼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다고 증언하는가? 한 가지 가능성은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냈다고 환상했을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속기 쉬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심리적으로 사람들을 조종하여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구원의 사역자”들의 먹이로 전락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확신이 들면 자연스럽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과 협조하게 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자신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길지라도, 그 당시 그리스도 안의 진정한 신자가 아니었을 수 있다. 성경의 복음과는 대조적인 현대의 복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속이고 있다. 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지 않으며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이 아니시다. 성경을 보면, 사람이 복음을 믿고 거듭나면, 그들에게 붙었던 귀신들은 자동으로 나가게 된다(행 8:5-7을 보라).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사람에게는 귀신이 들릴 수 없으며 성령님은 모든 거듭난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

신화 8: “한 도시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통해, 우리는 그 도시가 어떤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므로 영적 전쟁과 궁극적인 복음 전파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Myth 8: “Through studying the history of a city, we can determine which evil spirits are dominating it, and thus be more effective in spiritual warfare and ultimately in evangelization.”)

이 신화는 몇 가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주장에 기반을 둔다. 한 가지 주장은 지역적인 악령은 한 지역에 오랫동안 머문다는 것이다. 즉 수백 년 전에 그곳을 통치했던 악령은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한 도시가 탐욕스러운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면, 우리는 그 도시가 오늘날에도 탐욕의 악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만일 한 도시가 전에 오래된 인디언 마을이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그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샤머니즘과 마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수백 년 전에 그곳에 있던 악의 세력이 오늘날에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아마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전에 다니엘서 10장에서 살펴보았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미가엘의 도움을 받아 “바사의 군주”와 싸웠던 무명의 천사는 다니엘에게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주와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의 군주가 이를 것이라“라고 말했다(단 10:20; 강조 추가). 역사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가 바사 제국을 정복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이 무명의 천사는 그것에 대응한 절박한 영적 영역의 변화-“헬라의 군주”가 오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헬라의 군주가 왔을 때, 바사의 군주가 바사 제국의 영적 영역을 통치했던 것처럼 그리스 제국의 영적 영역을 통치했을까? 그것은 합리적인 결론인 듯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 제국이 실질적으로 바사 제국의 영토를 차지했으므로 일부 높은 계층의 악령들도 지리적인 위치를 변경했을 것이다. 이 땅에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 어둠의 나라에서도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어쨌든, 어느 악령이 어느 지역을 통치하는지는 큰 차이가 없다. 우리가 전에 증명했던 바와 같이, “영적 전쟁”을 통해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악령에 대한 지나친 분류(Over-Categorizing Evil Spirits)

또한, 특정 죄를 짓게 하는 특정 악령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만의 가정이다. “탐욕의 영”, “욕망의 영”, “종교의 영” 등이 있다는 관점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어둠의 나라를 통치하는 높은 계층의 악령들에게는 이런 종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복음서를 자세히 공부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세 종류의 특정 귀신만 쫓아내셨다는 사실은 놀라울 것이다. 예수님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눅 11:14)에 대해 한 번 언급하셨고,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막 9:25)에 대해서도 한 번 언급하셨고, “더러운 귀신”에 관해 한 번 이상 언급하셨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쫓아내신 모든 귀신을 포함하는데 심지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도 포함한다(막 9:25을 보라).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 사람을 말 못하고 못 듣게 하는 외에 다른 무언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귀신은 마가복음 9장에서 한 아이가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은 특정 종류의 악령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 귀신이 어떻게 특정 사람을 해쳤는지를 가리킨 것이다. 우리 중 일부는 성경의 계시를 벗어나, 귀신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분류”하고 있다.

전체 구약 성경에서, 이름을 갖고 있고 특정 악령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거짓말하는 영”(왕상 22:22-23), “어지러운 영”(사 19:14), 그리고 “음란한 영”(호 4:12, 5:4)일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영에 관해서, 모든 악령은 당연히 “거짓말하는 영”, “어지러운 영”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음란한 영”은 반드시 특정 악령을 가리키는 것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일반적인 태도를 나타낼 뿐이다.[6]

사도행전 전체에서 특정 악령에 관한 언급은 16장 16절에서 유일하게 한 번 나오는데,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서신서에서 특정 종류의 악령으로 언급된 것은 “미혹하는 영”(딤전 4:1)인데 그것 또한 모든 악령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특정 종류의 귀신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에게 붙어있거나 도시를 지배하는 수백 가지 종류의 귀신을 포함한 현대 목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죄의 종류에 따라 높은 계층의 악령들을 분류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 도시에 많은 도박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박의 영이 그곳을 통치하는 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설일 뿐이다.

흡연의 영?(Smoking Spirits?)

누군가가 “그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는 흡연의 영들이 많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일지 생각해보라. 그 도시들이 생기기 전에 “흡연의 영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어디에 있었을까?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지금 흡연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이유가 “흡연 마귀”들이 죽어가거나 새로운 지역으로 옮겼기 때문일까?

당신은 우리가 “그 도시는 음란의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매매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만한가? 진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곳마다 어둠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많은 악령들은 어둠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 계속하여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유혹한다. 그 악령들은 죄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며 어떤 곳에서 사람들은 다른 죄보다 한 죄에 더 많이 굴복하게 된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복음이다.

특정 종류의 악령들이 특정 죄를 짓게 하고 특정 지역을 통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쫓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책임은 미혹당한 사람들을 위해 (성경적인 방식으로)기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특정 도시를 지배하는 가장 큰 죄를 알아내는 것의 유일한 좋은 점은 우리가 그곳에 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죄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음으로 하여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도시의 역사까지 연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곳을 잠깐 방문하여 보고 듣는 것을 통하여 그곳에 가장 창궐한 죄가 무엇인지를 곧 알아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에서 영적 전쟁 또는 복음화의 준비수단으로 “영적 지도”를 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신서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도 없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들은 그들이 어느 곳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지에 관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으며 충성을 다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주님께서 잇따라 행하신 표적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였는데 그들의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신화 9: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대의 저주 또는 사탄의 저주에서 풀려나야 한다(Myth 9: “Some Christians need to be set free from generational or satanic curses.”)

“세대의 저주”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네 개의 구절에서 파생되었다. 그들은 출애굽기 20:5; 34:7; 민수기 14:8과 신명기 5:9이다. 먼저 민수기 14:8을 살펴보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강조 추가).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한 사람이 그의 부모, 조부모, 증조 부모, 또는 증증 조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 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그의 증조 부모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내리신다고 믿을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하게 불공평하고 위선적이다는 비난을 정당하게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은 한 사람이 부모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그런데 너희는[이스라엘]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하나님의 대답:]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9-20, 강조 추가).

또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은 아버지 또는 아들이 대방의 죄를 담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조상의 죄 때문에 한 사람을 저주하시거나 처벌하실 가능성은 없다.[7] 그럼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그들의 자손에게 죄인의 본을 보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며, 그들은 그들의 자손이 그들의 영향 때문에 지은 죄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영향 때문에 증증 자손이 지은 죄에 대해 그들에게 부분적으로 책임을 물으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러하시며 아무도 그분이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으시겠다”고 하셨음을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죄악이다.

따라서, “세대의 저주”에 대한 주장은 미신이며, 하나님을 불의하게 보이게 하는 나쁜 생각이다.

사탄의 저주?(Satanic Curses?)

하지만 “사탄의 저주”는 어떠한가?

첫째, 전체 성경은 사탄이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는 능력을 암시한 적이 없으며 그렇게 했다는 예도 없다. 확실히 우리는 성경에서 사탄이 사람을 괴롭힌 예를 찾을 수 있지만, 가족을 저주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지속적인 불운을 가져다주었다는 사례는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탄과 악령의 괴롭힘을 (제한적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부모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탄의 저주”를 누군가에 의해 끊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벧전 5:8-9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축복하고 저주하는 힘을 가지신 분이다(창 3:17; 4:11; 5:29; 8:21; 12:3; 민 23:8; 신 11:26; 28:20; 29:27; 30:7; 대하 34:24; 시 37:22; 잠 3:33; 22:14; 애 3:65; 말 2:2; 4:6을 보라).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입으로 우리를 저주 할 수 있지만, 그 저주는 우리를 해칠 힘이 없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 26:2).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발락에게 고용되었지만, 그는 정확한 말을 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민 23:8).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마가복음 11:23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저주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말하는 것은 아무런 힘도 없으며 마음에서부터 믿는 말을 하는 것이 힘이 있음을 주목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에(히 11:1),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저주가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난다(롬 10:17).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저주가 그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오기를 희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약속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예외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믿음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 중 두 가지)를 주셨고, 그 은사들이 축복 또는 저주의 방식으로 말해질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구약 인물의 삶 속에서 가끔 이렇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창 27:27-29, 38-41; 49:1-27; 수 6:26, 왕상 16:34; 삿 9:7-20, 57; 왕하 2:23-24을 보라). 심지어 그런 경우에서도, 축복 또는 저주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며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에게 퍼부은 저주를 깨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저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저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종종 하나님의 능력보다 사탄의 능력을 더 신뢰하는 목사들을 볼 수 있다. 비록 내가 매달 다른 나라로 다니면서 사탄의 나라를 파괴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나는 사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에게 저주가 내려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주술의 저주?(Occult Curses?)

우리가 과거에 주술에 개입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사탄의 저주가 내려질까?

우리는 우리가 거듭났으며 사탄의 권세와 어둠의 나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행 26:18; 골 1:13을 보라). 우리가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는 한,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비록 성경은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기 전에 마술을 행하는데 깊이 관여되었다고는 기록 했지만(행 19:18-19을 보라), 그들이 거듭난 후, 바울이 그들이 받은 “사탄 의 저주”를 풀었다거나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신에는, 사람들을 세대 또는 사탄의 저주에서 풀어주는 것에 관한 가르침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단지 그들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엡 4:27),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할 수 있기를”(엡 6:11) 부탁하였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왜 어떤 경우에 누군가에 의해 “세대의 저주” 또는 “사탄의 저주”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도움을 경험하게 될까?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은 “저주”가 일단 풀리면 마귀가 도망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도망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을 쫓아내기 위해 “마귀 전문가”를 청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강조 추가)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기 때문에 전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심으로써 우리는 저주에서 풀려났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더 이상 저주하지 말라.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는”(엡 1:3) 축복을 받았으므로 기뻐할 수 있다.

성경적인 영적 전쟁(Scriptural Spiritual Warfare)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영적 전쟁에 관한 현대 신화를 제시했다. 하지만 성경적인 영적 전쟁은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것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영적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첫 번째 것은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따라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춰야 하며 그분을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여야 한다. 신약 성경은 영적 전쟁에 대해 아주 작은 비율로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영적 전쟁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요치 않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 대해 알아야 할 두 번째 것은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알려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특별한 통찰력(또는 특별한 분별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설교자)이 필요하지 않다. 성경적인 영적 전쟁은 단순하다. 사탄의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우리의 책임도 똑바르게 설명되어 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기만 하면,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보장된다.

태초로 돌아가 보자(Back to the Beginning)

우리가 처음으로 마귀에게 소개되었던 창세기로 돌아가 보자. 창세기 처음 몇 장에서,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뱀이 마귀라는 것에 의심이 든다면 요한계시록 20:2은 그것을 제거해 줄 것이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강조 추가).

창세기 3:1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당신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들이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먹이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면 사탄이 얼마나 교활한지가 느껴질 것이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처럼 전지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사탄을 대적함에 있어서 우리가 지적인 열세에 처해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같이 지혜롭기를”(마 10:16, 강조 추가) 바라셨다. 바울은 사탄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며(고후 2:11을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고전 2:16).

사탄이 처음으로 기록된 공격을 시작한 것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대답은 사탄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끔 속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을 드러내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속일 방법이 없다. 이 때문에 그의 전체 전략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생각이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은 그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물었다. 이것은 그저 사탄이 무심결에 던진 질문인 듯 해 보이나 사탄은 자신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2-3)라고 대답했다.

하와는 거의 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못하게 하신 적이 없으시며 단지 그들이 그것을 먹는 것을 금지하셨을 뿐이다.

하와는 확실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는 사탄의 대답이 거짓말임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진리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뻔뻔스러운 부인이며, 하와는 그것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그가 종종 그렇게 하듯이 그의 거짓말에 진실로 사탕 칠하여 삼키기 쉽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라고 말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한 뒤, 실제로 세 가지 진실을 말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 사탄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을(창 3:7을 보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도 나중에 그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창 3:22을 보라). 사탄은 종종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에 진실을 섞는다는 것을 조심하라.

또한, 사탄이 하나님의 성품을 비방했음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금단의 열매를 먹지 않기를 바라셨는데 사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좋은 것을 주시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사탄의 대부분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 뜻 및 동기를 헐뜯는다.

유감스럽게도, 이 땅 최초의 부부는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그에 따른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 속에 있는 현대적인 영적 전쟁의 모든 요소를 주목하라. 사탄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 뒤에 매복한 거짓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지 아니면 사탄의 말을 믿을지 선택해야 한다. 진리를 믿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방패”가 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이 “믿음의 방패”를 들지 않았다.

예수님의 영적 전쟁(Jesus’ Spiritual Warfare)

우리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는 것을 읽어보면, 사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공격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으로 하여금 진리를 믿거나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전투의 중심에 놓였다. 사탄은 자신의 거짓말을 발사하였고 예수님은 진리로 그것이 빗나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셨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인 영적 전쟁이다.

예수님도 하와, 아담 그리고 우리 모두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지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들으실지를 결정해야만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전쟁을 하셨다.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살펴보자.

예수님이 받으신 두 번째 시험에 관해, 마태는 이렇게 썼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로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5-7).

이곳의 핵심 문제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탄은 심지어 시편 91편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뜻하시지 않은 것을 의미하도록 왜곡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약속한 시편 91편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가져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지만, 우리가 어리석게 “그분을 시험할 때”는 아니다. 내 성경의 여백에 있는 각주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전체 성경의 문맥을 떠나서 해석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성경 말씀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말씀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영적 전쟁 에서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전술 중 하나이며, 안타깝게도, 그는 현대의 영적 전쟁 운동을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 전술을 사용하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왜곡의 전형적인 예는 “요새를 무너뜨리라”는 성경 구절을 왜곡하여 공중의 악령을 무너뜨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구절은 문맥적으로 읽어보면, 공중의 악령을 무너뜨리는 것에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늘의 정사와 권세를 향해 소리치는 데에 시간을 낭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시험에 대해 마태복음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8-10).

이것은 권세에 대한 시험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사탄을 숭배했고, 사탄이 그분께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면, 예수님은 어둠의 나라에서 부사령관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다. 그분은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모든 악령들을 통치하시고 사탄이 전에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은 세계적 권위를 가지시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악몽에서나 예수님이 시험에 굴복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록 된 말씀으로 사탄의 제안을 물리치셨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라.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셨다. 우리도 사탄에게 미혹되고 그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이다.

전쟁터(The Battle Ground)

대부분의 경우, 사탄과 그의 귀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각을 심는 것이다(비록 하나님에 의해 제한받지만; 고전 10:13을 보라). 이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의 말씀들을 살펴보자.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강조 추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강조 추가).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강조 추가).

뱀이 그 간계로 너희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강조 추가).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협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강조 추가).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 3:5, 강조 추가).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강조 추가).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9, 강조 추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강조 추가).

이 말씀들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은 영적 전쟁의 주요한 전쟁터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탄은 악한 제안, 잘못된 생각, 잘못된 철학, 유혹, 각종 거짓말 등의 생각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 반드시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탄은 자기를 도와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의 생각을 심어주는 많은 대변인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신문, 책, 텔레비전, 잡지, 라디오, 친구와 이웃, 심지어는 설교자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사도 베드로도 어느 한 번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대변인이 되어 예수님께 그분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마 16:23을 보라).

그러나 사탄과 악령은 인간이란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도 인간의 마음에 직접 역사할 수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때부터 영적 전쟁은 시작된다.

나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어느 한 번 나에게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고백한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이 기도 할 때마다 모독적인 생각과 욕설이 마음에 떠오른다고 했다. 그녀는 교회에서 가장 예쁘고, 친절하고, 소중하며,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끔찍한 생각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들이 그녀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그는 지금 그의 기도 생활을 망치려는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들이 다시 떠오를까 봐 날마다 기도하는 것을 멈췄다고 말했다. 사탄이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다시 기도를 시작하고, 불경의 생각이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대적하라고 말했다. 만일 “예수님은 단지…”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들면, 그녀는 “아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하며, 만일 그녀에게 욕설이 떠오르면, 그녀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생각으로 그 생각을 대체해야 할 것이다.

나는 또한 그녀가 잘못된 생각을 할까 봐 두려워할수록 그런 생각들을 불러온다고 알려줬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인 마귀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생각할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오른손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즉시 나의 말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오른손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오른 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적으로 다른 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의 신발과 같은 것이다. 당신이 일단 신발에 대해 생각하면, 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나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그녀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생각을 인식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생각으로 그것을 대체하라고 그녀를 격려했다.

나는 그녀가 나의 충고를 따른 것에 대해 기쁘다. 비록 그녀는 기도 하면서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녀는 성경적인 영적 전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내가 많은 교회를 조사해본 결과, 흥미롭게도 그녀의 문제가 매우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조사했던 그리스도인 중 절반 이상은 기도할 때,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탄은 너무 기발하지 않다.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는 사탄과 악령을 중지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즉, 우리는 마귀의 생각과 제안에 빠져 그런 생각속에 머물 필요는 없다. “새가 내 머리위를 지나가게 할 수는 없더라도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않게는 할 수 있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또한 ,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사악한 영향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한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읽을 때, 우리는 사탄의 생각일 수 있는 영향에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바로 “너희는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라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사탄이 그의 “씨앗”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심어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듣게 하는 것의 파괴적인 영향을 알고 계셨다. 그 씨앗들은 결국 가시떨기로 자라나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막 4:7, 18-19).

베드로가 말한 영적 전쟁(Peter on Spiritual Warfare)

사도 베드로는 진정한 성경적인 영적 전쟁을 이해했다. 그의 서신에서 그는 종래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시의 정사와 권세를 무너뜨리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개인 생활에 대한 사탄의 공격을 저항할 것을 가르쳤으며, 어떻게 저항해야할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첫째로, 베드로는 우리가 공격이 아닌, 방어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나타냈음을 주목하라. 두루 다니는 것은 사탄이지 우리가 아니다. 사탄이 우리를 찾고 있지 우리가 사탄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임무는 공격이 아닌 방어이다.

둘째로, 사탄이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음을 주목하라.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을 삼킬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사탄이 문자 그대로 사자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살을 먹을 수 있음을 의미하였을까? 분명히 아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삼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끔 속임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다.

셋째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했음을 주목하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공중에 주먹을 휘두른다 하여 사탄을 이길 수 없다. 그는 거짓말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그 거짓말에 대항한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인 영적 전쟁이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심각한 박해를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서신을 썼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혹 받고 있었다. 우리는 사탄의 의심과 거짓말의 공격을 받는 역경속에 종종 놓이게 된다. 그 때에 당신은 믿음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그것은 곧 바울이 우리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강조 추가)고 쓴 “악한 날”이다.

야고보가 말한 영적 전쟁(James on Spiritual Warfare)

사도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영적 전쟁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전투의 결과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도시위에 있는 욕망의 영, 무관심의 영, 그리고 술 취함의 영을 무너뜨리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들이 어떤 악령이 처음부터 그들의 도시에 있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 도시의 역사를 공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야고보는 영적 전쟁에 대해 성경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강조 추가).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는 방어임을 주목하라. 우리는 공격이 아닌 방어를 하여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우리를 피할 것이라고 야고보는 약속했다. 사탄은 자신의 제안에 따라 거짓말을 믿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에게 붙어있을 이유가 없다.

또한, 야고보는 우리더러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가르쳤음을 주목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께 복종한다. 사탄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있다.

요한이 말한 영적 전쟁(John on Spiritual Warfare)

사도 요한도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영적 전쟁에 대해 썼다. 그는 우리에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악마의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말했는가? 아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화를 자주 내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분노의 귀신을 쫓아내는지에 대해 말해주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오직 성경적인 영적 전쟁을 믿었으며 그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1-6).

이 말씀 속에서 요한은 사탄의 거짓말과 하나님의 진리를 중심으로 토론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며 그 분별은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악령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요한은 또한 우리가 악령을 이기었다고 말했다. 즉, 빛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않다. 더 크신 분인,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는 사람들은 귀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또한 이 세상은 악령의 말을 듣는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 악령들이 말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들이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거짓말을 심어놓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우리는 악령의 거짓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진리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사탄의 전략은 사람들이 자기의 거짓말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임을 주목하라. 우리가 진리를 알고 믿는자면, 사탄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이 성경적인 영적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이다.

믿음이 관건이다(Faith is the Key)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관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전에 살펴보았던,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마 10:1)를 주신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일곱 장 뒤에,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음을 찾을 수 있다.[8] 예수님은 그들의 실패를 아셨을 때 한탄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 17:17, 강조 추가).

예수님이 한탄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그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다”(마 17:20)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세가 믿음을 떠나서는 의미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고 마귀를 대적하는데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말씀처럼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강아지가 그들에게서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가는 것처럼, 마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당신이 믿음위에 굳게 서면, 마귀는 당신을 피할 것이다(약 4:7).

제자들이 그 아이게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애썼지만 실패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까닭임은 모든 사람들이 보아낼 수 있었다. 만일 그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 행했던 것처럼, 제자들 앞에서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그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면(눅 9:42), 그리고 거품을 흘리게 했다면(막 9:20을 보라), 제자들의 믿음은 두려움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그들이 목격한 것으로 말미암아 마비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고후 5:7, 강조 추가).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기에(딛 1:2을 보라), 우리의 상황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달라보일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 몇 초 만에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음을 주목하라. 그분은 “귀신을 쫓는 작업”에 시간을 낭비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믿는 사람은 귀신을 쫓는데 몇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또한, 예수님이 귀신에게 소리치셨다는 기록도 없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소리칠 필요도 없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한 번의 명령은 충분했다. 두 번째 명령부터는 의심하고 있음을 나타냈을 것이다.

요약(In Summary)

제자 삼는 사역자는 자신의 모범과 말로써 성경적인 영적 전쟁을 가르친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은 사탄의 계략에 대적하여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 현재 “유행하고 있는 교리”들을 따라 비성경적인 영적 전쟁을 진행하라고 인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초점이 잘못되고 실제로는 사탄에게 미혹당했으나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이 개념은 나의 책 ‘하나님의 시험‘이란 책에서 더 철저하게 논의되었다. 이 책은 우리의 웹 사이트[2]이 규칙의 예외는 사람이 귀신의 지배를 너무 강하게 받아 자유를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필요하며 그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역사한다.

[3]로마서 1:18-32 에 기록한 불신자에 대한 바울의 설명도 이 같은 개념을 뒷받침한다.

[4]물론, 부동한 지역에 따라,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비율도 다를 것이다.

[5]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은 영원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만일”이란 단어가 나오는 곳을 특별히 주의하면서 롬 11:22; 고전 15:1-2; 빌 3:18-19; 골 1:21-23과 히 3:12-14를 읽어볼 것을 권장하고 싶다.

[6]민수기 5:14-30에서 언급한 “의심의 마음(영)”과 잠언 16:18에서 언급한 “거만한 마음(영)”은 이란 단어가 실제 마귀가 아닌 어떤 지배적인 태도를 전달하는데 사용된 좋은 예다. 민수기 14:24에서 우리는 갈렙의 “마음(영)이 달랐다”는 구절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분명 갈렙의 좋은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7]이것은 자식이 부모의 죄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을 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완악하여 자신의 죄가 아이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음을 알면서도 특정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한 사람을 심판하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처럼 악하거나 그보다 더 악한 자손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자비하심으로 악한 세대에 대한 심판을 미루시지만, 그 뒤에 그 세대와 동등하거나 그 세대보다 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세대에게 심판을 내리신다(렘 16:11-12을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조부모의 죄 때문에 그를 징벌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8]우리는 모든 간질이 다 내주한 악령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정을 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해야 한다.